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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8:12-17
강설날짜 2019-09-15

바울을 고소한 고린도 유대인들.....왜?(행18:12-17)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자들이 신자들애게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왜입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그분이 메시야라고 답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휴일이라고 하면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휴식을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지팡이 교회는 삼위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으로 예배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배를 세상 사람들도 같이할 수 있도록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그것을 이렇게 고백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많은 인물을 보았습니다. 대충 열거하면 베드로, 디모데, 실라, 빌립, 바나바, 야고보 등이 있었습니다. 이 인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문입니다. 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통해 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잘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안 후 자신을 어떻게 소개를 하였습니까? 고전15:9절을 보시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볼 때 사도 바울은 대단한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사도 바울이나 우리가 같은 존재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자신의 몸을 알면서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신 것처럼 교회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헌신하면서 전도 여행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신을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을 위해 엡3:8절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지상명령을 잘 감당하던 사도 바울은 사역에 종착지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딤전1:15절을 보시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면서 나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자랑할 것이 없는 신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보십시오. 이렇게 겸손할 수 있는가입니다. 처음에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로 하면서 그다음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자”라고 하고 마지막 사역의 글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황당한 것입니다. 이런 황당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번 주는 총회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타락하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 것입니다.

 

지난주 강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이었습니다. 지상명령을 잘 감당하는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사역을 잘 감당한 후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고린도는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환락으로 도시이며 항구와 운동 경기로 유명하였습니다. 또한, 인구는 남양주시와 같을 정도이면 큰 도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도시에 비교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심각한 정신적 고심을 감수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기로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바울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격려와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 바울은 고전2:1-5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함을 받은 바울은 고린도에 주님의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바울은 해산의 진통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자비량으로 사역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들과 같은 직업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에 좀 더 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했습니다. 성경을 잘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하고 있던 바울에게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한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전하여준 소식은 자신이 가야 할 길에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늘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사람들은(디아스스포라 유대인)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바울은 자신의 옷을 먼지를 털 듯이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상처도 많은 것입니다. 비방과 대적을 당하는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에게 갑니다. 디도 유스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놀랍게도 회당장 그리스보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자신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집안과 고린도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밤에 환상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격려와 위로를 해 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향해 같은 말을 하시고 있습니다. 비방과 조롱을 당해도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가르쳤습니다.

 

복음을 잘 전하고 있던 바울에게 같은 민족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자들로부터 당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도 그랬듯이 고린도에서도 바울을 둘러싸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갈리오 아가야 총독이 왔을 때 기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새로운 지역으로 갔으면 추방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를 세워야 하기 때문에 비방과 조롱을 당해도 복음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격려와 위로를 해 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가 세워짐으로 교회에 대한 교리와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다른 서신에서도 알 수 있지만, 특히 은사와 성찬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 고린도전후서에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생활하는 유대인들은 기회를 통해 바울을 대적한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에게 바울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고린도에서 최고의 법정에 바울을 고발한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유대인들 때문에 총독에게 고발당하였습니다.

 

고발 내용이 무엇인가를 13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입니다. 고린도에서 생활하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부각하게 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을 어기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하면 유대인들의 법보다는 로마법이 더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야 문맥적으로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로마의 왕이 신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것은 로마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이 살아있는 신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황제는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예루살렘 성전 안에 두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고린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다고 한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루살렘에 우상을 두면서 유대인들로부터 반감을 당하자 글라디오 황제는 칙령을 내려 어디서든 유대인들은 예배 행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도 허용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총독의 마음을 이용하기 위해 속이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공인되지 않은 불법 종교를 전하면서 로마를 무너지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발을 당한 바울은 자신을 변론하고자 합니다. 바로 그때 총독은 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라고 합니다. 바울이 입을 열어 자신을 변호하고자 할 때 총독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심각한 범법 행위와 관련된다면 너희가 고소한 것을 경청하겠다, 하지만,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 있었는가를 다시 질문한 것입니다. 총독 자신이 재판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확인해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총독은 15절에서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들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종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미 관습으로 회당에서 예배하고,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인에게 전하는 것은 금지였습니다. 갈리오 총독은 바울에게서 로마법을 어긴 사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또한, 총독은 귀찮은 일에서 손을 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면서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했습니다.

 

총독은 로마법으로는 문제가 없으니 고소한 것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했습니다. 총독이 볼 때 유대인들의 ‘언어 명칭과 법’에 관한 것임으로 본 것입니다. 여기서 총독은 예리하게 말한 것입니다. ‘언어’는 곧 “로고스” 즉 말씀이고, ‘명칭’은 메시야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그리고 ‘법’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갈리오는 총독은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이 사건은 자신이 재판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총독이 해야 할 일은 로마의 안정과 질서 유지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너희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바울에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자유로 볼 수 있습니다. 총독이 이러한 기각 판결을 함으로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총독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곧바로 법정에서 나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6절을 보시면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총독이 기독교를 좋아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총독의 말에도 법정에서 나가지 않자 유대인들을 쫓아낸 것입니다. 격분한 유대인들은 17절에서 어떻게 합니까?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극악한 일을 유대인들이 법정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당장 소스테네를 잡아 매질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회당장으로 개종한 그리스도가 사망한 후 소스테네가 회당장이 된 것 같습니다. 하여튼 회당장도 개종하여 바울의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법정에서 매질한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이 내린 결론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법정에 이렇게 하는 것은 갈리오 총독이 개입하기를 원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자신들을 위한 가짜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만들어진 하나님을 믿는 시대 아닙니까?

 

교회는 혼자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창설직원 즉 열두 제자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없어도 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섭립해 가도록 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혼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전도 여행의 길을 열러 줄 수 있도록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가 있었고, 전도의 여행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실라와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것을 알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후원금을 보내주었습니다. 후원금이 부족할 때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통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강인한 정신이 있던 바울에게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결코 목회자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목회자와 함께 하는 것이고, 물질과 자료와 노동과 봉사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하며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또한, 바울도 혼자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듯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각자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나안 정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 갈렙을 좋아합니다. 여호수아보다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지만, 늘 2인자로 지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땅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좋아합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칭호처럼 이스라엘이 다른 길을 가는 것을 슬퍼하며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오늘날 시대도 같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좋아하는 목회자를 보며 쓸쓸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갑과 을이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 안에서는 갑과 을이 없어야 합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갑과 을의 이용하여 목회자의 마음은 늘 을과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그리고 교회가 타락되지 않게 하려면 목사이든, 장로이든, 신자들이든 누구나 주님의 제자일 뿐입니다. 직분은 신자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목회자는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헌신하지 않았도 됩니까? 그들도 역시 예수님을 믿기도 했기 때문에 헌신한 것입니다. 서로 헌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자입니다. 제자 된 바울은 늘 자신이 헌신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흔신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 위기의 순간이 닥쳐왔지만,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격려와 위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로 주신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격려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함을 받은 신자들이요 성도요 교회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오늘 지팡이 교회는 행18:12-17절 말씀을 통해 “바울을 고소한 고린도 유대인들....왜?”라는 주제를 가지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동포로부터 고소를 당해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같습니다. 교회도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내부로부터 고소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됩니다. 세상 사람이 날 알아주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도 바울은 고소를 당해도 늘 교회를 세우는 데 힘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도 알고 있는 고린도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안식일 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안식일만 한 것이 아니라 삶이 전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늘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갈리오 총독을 준비했습니다. 총독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복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을 통하여 복음 증거 하는 바울을 보호하셨습니다. 갈리오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유대교의 종교에 관심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바울은 자유로운 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강설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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