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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9:1-7
강설날짜 2019-09-29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바울(행19:1-7)

 

지팡이 교회는 사도행전을 매주 강설로 듣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이며 성령행전이라고 불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우신 교회를 위해 일꾼 된 사도들과 신자들은 지상명령을 감당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복음의 증인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며 현시대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사도행전을 강설로 들으면서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을 듣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세상의 맘몬, 재물, 부귀영화 등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자 헌신했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메시야가 누구인가를 전했습니다. 그분은 고난과 부활을 통해 승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였다고 전한 것입니다. 성령이 과거나 오늘이나 분별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십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하셨던 성령은 오늘 나와도 함께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증인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같습니다. 주의 길을 가는 지팡이 교회에 주님의 위로와 소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참된 길로 가지 못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중세시대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과 타협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루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0월 마지막 주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종교기념 주일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가 무엇인지 교회에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알아도 10월 마지막 주의 의미는 모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없었으면 오늘날 중세시대와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또 다른 개혁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종교 개혁하면 아마도 루터가 떠 오를 것입니다. 루터는 타락한 교회의 비판자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개혁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루터를 통해 개혁하셨습니다. 루터가 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섭리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를 없애고자 한 것입니까? 타락한 교회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누가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교회를 위해 루터는 자기 뜻대로 개혁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교회도 자본주의와 맘몬으로 물든 시대에 루터의 개혁은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10월은 루터가 왜 개혁을 하고자 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루터의 정신은 우리에게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날 맘몬으로 물들 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랬다면 전도 여행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헌신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열정은 그야말로 주님의 교회를 위한 마음이었습니다.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 후 바울은 배를 타고 수리아로 이동하였습니다. 수리아로 이동한 것은 2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3차 전도 여행을 위한 것입니다. 수리아로 이동하던 중 2차 전도 여행을 종착지인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에베소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19장을 통해 긴 이야기를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한결같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변론을 하였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바울이 오랫동안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면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 말은 놀랍게도 3차 전도 여행의 무대를 준비하는 목적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만 전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늘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서신으로도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복음의 일꾼이요 사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를 위해 준비한 일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볼로였습니다. 아볼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었는지 알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여 교회를 든든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을은 고전3: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고 했습니다. 교회 사역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을 했습니다. 그것만 아니라 언변도 능통했고, 학문도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시겠지만,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준비하셨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아볼로가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음 그리고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 등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사역을 한 아볼로는 고린도로 돌아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전했습니다. 그결과 “유대인의 말”을 이기었습니다.

 

아볼로가 사역을 열심히 하고 있었을 때, 사도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도착하여 자신이 사역한 결과를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3차 전도 여행의 사역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에베소 전도 사역은 행18장에서 마지막 기록에 이미 예고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를 우연히 들리도록 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와 인도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바울”을 통해 강설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첫 시작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아볼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것은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런 후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에서 사역하고자 그곳으로 갔습니다. 고린도에서 아볼로는 복음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아볼로가 열심히 고린도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에 사도 바울은 다시 에베소에 온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즉 “하나님의 뜻이라면” 놀랍게도 다시 온 것입니다.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어떤 제자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들은 누구의 제자인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에베소에 도착하여 제자들을 만난 바울은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2절을 보시면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까? 그들이 주님은 믿은 후 성령을 받았다는 뜻보다 진정한 신자들인지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진실한 성도 즉 신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구원에 관한 보다 넓은 성경의 메시지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더불어 새로운 신자의 삶에 성령의 내주하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진실한 신자인지 물어본 것입니다. 누구의 제자인지 모르는 그들은 바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참된 제자라면 성령이 누구인가를 알았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성령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답변은 모른다입니다. 성령을 모든다는 것은 오순절 사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볼로처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도 모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 즉 제자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무엇입니까?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거나 또는 소문을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렇게 합니다. ‘요한의 세례’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던 것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를 대조함으로 진정한 메시야가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는 결국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무엇인지 알도록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오실 메시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세레 요한이 전한 메시지는 뒤에 오시는 메시야 즉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믿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을 추종하는 자 중에는 메시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바울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후 내면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제자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5절을 보시면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마음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경 말씀을 통해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그들도 바울에게서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한 번 받는 것인데 다시 받아도 됩니까?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아발로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다시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아볼로와 마찬가지로 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었습니다. 똑같이 세례 요한의 세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볼로와 달리 다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볼로와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차이점은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다시 받고자 하는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한 번 받은 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세례를 받은 후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바로 그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6절을 보시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런 현상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던 것같이 바울이 안수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안수는 성령을 받는 선물입니까? 착각하기 쉽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신자들은 안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안수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누가는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의 사역과 베드로의 사역은 같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기도로 된 것이며 안수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안수는 성령을 받게 하는 신적인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분들은 방언을 가지고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안수를 통해 성령의 선물을 내려주신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와 같이 함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제자들은 몇 명이었습니까? 7절을 보시면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누가의 관심은 열둘이라는 숫자에 해당하는 개개인의 신상에 관한 보고가 아니라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 요한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복음에 의해 완전히 변화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 사건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성취되었다는 강조이기도 합니다. 이후 이러한 기록은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사건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에베소에서 어떻게 시작을 하였습니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한 것입입니다. 물론 바울이 궁극적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성령 세례였으나 처음부터 성령 세례를 강조하면 충격을 줄 것을 고려하여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를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것은 참되게 믿는 신자들에게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기도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사도들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오늘날은 성경이 완성됨으로 그것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좀 더 자세히 강설로 듣겠습니다. 성경이 주어진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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