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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4:20-27
강설날짜 2020-04-26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cY8AFNNtoTA&t=1049s

고소당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한 후 다시 감옥에 갇히다.(행24:20-27)

 

좋은 강설을 준비하는 것은 마치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음식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기에 사랑을 담은 음식을 먹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음식으로 가족을 건강하게 하고자 하는 것처럼, 강설도 같습니다. 말씀을 통해 건강한 교회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위한 좋은 강설은 신앙의 유익한 길을 갈 수 있도록 합니다. 강설을 선포하는 말씀 봉사자는(목사) 몸에 건강하지 아니하는 조미료 즉 이단들이 말하는 것이나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몸에 유익하지 않은 조미료는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이상한 강설은 교회가 무너지도록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연결되지 아니하는 예화도 좋지 않습니다. (참고로 많은 예화는 강설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 예화보다 오히려 카리스마를 돋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 위험합니다. 이런 예화는 조미료와 같이 먹기에는 좋으나 몸을 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간증입니다. 간증은 좋은 신앙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과 같지만 복음의 참맛을 막아버리는 도구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간증은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상적인 길로 가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간증은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성공주의 즉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화와 간증 등은 복음의 말씀을 잘 먹이도록 하고자 했지만, 어떤 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참된 말씀을 알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강설을 들으면서 어떠한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까? 조미료와 같은 강설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강설입니까?

 

몸에 좋지 않은 강설은 사망이라는 길로 가도록 합니다. 하지만, 몸에 좋은 강설은 사망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합니다. 죄악의 길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참된 교회의 표지를 지키고자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넘어 주님을 늘 섬기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강설을 참되게 알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고소당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다”에 대한 후반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후 바울이 “다시 감옥에 갇히다”를 생각하면서 든든히 세워져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난주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 그리고 변호사 더둘로에 의해 고발을 당한 바울은 스스로 변론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담대함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고발을 당한 바울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거짓임을 잘 설명했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더둘로의 이야기를 들은 후 바울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기회를 얻은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에서 10년 넘게 재판을 했으니 유대인의 현실을 잘 알 것입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는 유대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한 우리나라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리라 믿습니다. 간략한 소개를 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배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기간도 “열이틀”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은 더둘로가 고발한 것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한 기간이 짧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한 것인지 잘 알리라 믿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면 홈페이지에 강설이 올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성전에서 소동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발자들은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증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예루살렘을 위해 이방인들이 준비한 “구제할 것과 제물을 전달”하고자 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 듣도록 하겠습니다. 벨릭스 총독이여! 제가 변호한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고발하는 모든 일에 나는 무죄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을 전해달라는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예배와 구제 그리고 제물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습니다.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나를 정치범으로 고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고발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도 저들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 소망을 믿습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악인과 의인의 부활은 다른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부활을 믿기에 양심으로 생활하고자 노력합니다. 복음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선한 양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무죄입니다. 나는 선한 양심으로 예루살렘 즉 동포들에게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전달자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와서 결례를 하였으나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례를 한 것도 유대인의 법에 따라 한 것이기에 저들의 고발은 거짓입니다. 그러니 저는 무죄입니다. 사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말한 내용을 천부장 루시아로부터 이미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발자들에게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확실한 증거로 고소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고발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법정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했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무고죄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은 무서웠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지난주 강설을 기억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은 먼저 고소당한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변호하고 있는지 이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고소하는 자들에게 담대하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20절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바울은 자신을 고소하는 자들에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지금 이 자리에 증인 자들을 세울 수 없다면 너희들이 예루살렘에서 어떠한 소동이 일어났는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고발자들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그들은 바울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합법적인 판결을 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소인들에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 그리고 더둘로는 즉시 증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에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고소하는 것이 거짓임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성전에 관한 고소를 21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사도행전에서 한결같이 전하는 메시지는 부활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여기서 부활을 꺼냄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한 말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공회에서 했던 유일한 발언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공회에서 말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유죄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약 부활에 관한 것을 이야기했다고 해서 심문을 받는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는 로마법으로부터 유죄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부활에 관해 이야기함으로 그들은 서로 분란이 생기었지만, 유죄 판결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것으로 고소를 한다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또한, 성전을 모독했다는 고발도 틀린 것입니다.

 

바울의 변론을 들었던 벨릭스 총독은 22절에서 판결을 내리기전 기독교에 대한 논평을 제시합니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벨릭스 총독은 거의 15년 동안 유대인 지역에서 통치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총독은 22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고 했습니다. 고발한 자들의 이야기만 듣고 판결하기보다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까? 고발자들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하지만, 총독은 ‘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보다 오히려 이방인 총독이 기독교 신앙의 ‘도’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독은 도를 알면서도 바울에게 돈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이런 일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무죄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판결을 연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나 벨리스 총독은 휴정하여 연기했습니다. 그러면 시일을 오래 걸리게 하지 말고 판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벨릭스 총독은 로마로부터 해임되기까지 거의 2년 동안 바울의 재판을 재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도는 지식으로는 알 수 있지만, 참된 마음으로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과 말씀을 사모하며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재판을 연기한 총독은 백부장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3절입니다.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총독은 바울을 지키라고 백부장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동시에 약간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자유를 허락한 것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은 바울은 친구들과 교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자유를 얻은 바울은 이 기간에 편지를 이용하여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재판이 연기되고 며칠 후에 벨릭스는 아내와 함께 바울에게 왔습니다. 24절을 보시면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에게 온 이유는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유로운 몸이었지만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총독 부부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였습니다. 총독의 아내는 드루실라였습니다. 그녀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며 아그립바 2세의 누이였습니다. 총독과 처음으로 결혼하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드루실라는 수리아에 위치한 작은 나라 에메사의 왕과 결혼했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총독은 그런 사실을 알고 드루실라에게 접근했습니다. 왜냐하면, 드루실라의 미모가 예뻤다고 행25:23절에서 말합니다. 그의 미모 때문에 총독은 이혼하도록 하고 자신과 결혼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성경의 말씀을 참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을 찾아왔을까? 이런 의문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집안 혈통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루실라는 어느 정도 메시야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총독과 함께 바울이 전하는 도를 알고자 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 예수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전해야 할 사명이기도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바울은 직설적으로 벨릭스 부부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범적인 강설이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늘 한결같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심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결혼과 삶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두려워한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선교지에서 의와 절제를 전함으로 장차 오는 심판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들을 귀 있는 자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자입니까? 벨릭스가 두려워한다는 원어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상외의 엄청난 사건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의 반응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는 말씀을 계속 듣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심정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수 있는 심정이 되도록 하심으로 사람은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총독 부부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저절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환심을 이용하여 석방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석방을 받은 자신은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가장 유익하게 전할 기회였을 것입니다. 하여튼, 복음을 전심으로 전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두려워했지만, 자신의 야망이 중요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6절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완악하고 강퍅한 마음입니다.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바울을 자주 만나서 그가 바랬던 것은 결국 돈이었습니다. 벨릭스는 부패하고 파렴치한 마음에서 돌이키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을 자주 불러서 복음을 들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지만,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늘 맘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재판을 담당하는 총독과 재판장들은 돈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받을 수 없습니다. 로마법으로도 금지입니다. 하지만,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만연했다고 합니다. 이런 부패는 결국 나라가 무너지도록 하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망해가는 나가를 볼 수 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변론을 잘 알고 있는 총독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의 2년 동안 구류했습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바울을 구금하고 있는 기간이 2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태가 지난 후’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벨릭스가 바울을 석방한 것입니까? 아니었습니다. 벨리스는 가이사랴에서 벌어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분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이유로 로마로부터 해임되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섭리로 바울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함으로 온 누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벨릭스와 같은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왜라고 각자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벨릭스와 같은 마음입니까? 나라면 어떻게 판결을 하겠습니까? 벨릭스는 참으로 곤혹스러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석방하면 유대인들의 비난과 반감을 일으키리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계속 바울을 구금시켜 두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자신의 권력이 중요하기에 권력가다운 비열한 모습입니다. 고발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면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에게 내린 판결은 로마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진퇴양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진실입니다. 판결을 진실하게 함으로 자유로움을 누려야 합니다. 마음을 속이는 것은 당장은 이롭지만,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구금되어 있더라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을 들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합니다. 그럴 때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벨릭스는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의 권력이 더 중요했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생활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복음을 감당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바울은 진심으로 회개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법정에서도 진실을 전한 것입니다. 공회에서도 부활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공회가 되었든, 벨릭스 총독이 이끌어가는 법정이라도 늘 바울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자유로움을 누릴 기회도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기에 바울은 소중하게 생각한 것입니까? 우리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설은 벨릭스 총독과 그의 아내에게 충분한 기회였습니다. 오늘날 계속해서 강설을 듣는 것도 충분한 기회입니다. 총독의 기회는 2년이었고, 우리에게 기회는 언제까지라고 말할 수 없지만 소중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총독은 야망과 권력이 중요했습니다.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는 벨릭스 총독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멸망의 길입니다. 마치 벨릭스가 2년 후 로마로부터 해임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벨릭스는 해임을 당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해임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입니다. 영원한 지옥에서의 삶입니다. 신자는 영원한 심판을 알기에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사모하며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처럼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성경을 알기에 총독 앞이라도 담대함으로 거리낌 없이 의와 절제 그리고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팡이 교회와 늘 동행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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