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41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걔2:18-29
강설날짜 2020-08-30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wzg3MlfsYeI

악을 간과한 타협주의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말씀(계2:18-29)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전하며 성장하고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환난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감당하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가 이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교회인 성도는 이 세상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들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말씀과 성례와 기도(권징)로 은혜를 누립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무기입니다. 총과 핵 등이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무기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녹이면서 세상의 마음을 녹이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백성으로서 세상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권력 등을 배설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이 누구신가를 다메섹에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수혜자였습니다. 당연히 지팡이 교회도 바울과 같은 수혜자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수혜자로서 세상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마저 포기했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자아조차 비우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하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신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바울처럼 마음을 비우고자 하십니까? 이웃의 교회가 어떻게 되든, 내 목회만 잘되고자 하십니까? 이웃이 어떻게 되든 신자인 나만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떠 올려 보십시오. 바울은 세상의 복을 배설물로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복은 세상의 것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힘을 다하여 이웃의 유익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의 씨앗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최고의 복을 주실 것을 교회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이때 이웃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악을 간과한 타협주의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우리는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를 강설로 들었습니다. 각 교회마다 위치한 장소가 다르듯이 그들이 겪는 문제 역시 같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들으려고 하는 두아디라 도시는 비교적 중요한 도시가 아닙니다. 두라디아는 소아시아 일곱 도시 중 가장 별 볼 일 없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도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님의 백성인 성도 즉 교회가 중요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일은 잘했습니다. 자신의 사업과 사랑 그리고 믿음, 섬김, 인내,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칭 이세벨이라는 선지자를 막지 못했습니다. 순결성을 유지해야 하는 두아디라 교회는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고 거짓 교훈을 그냥 두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오늘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새기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십시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입니다. 위에서 두아디라의 환경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좀 더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두아디라는 오늘날 “아킷살”로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버가모와 서머나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종교와 정치적 중심지가 아니고 공업 도시였습니다. 염색과 가죽, 구리 세공업 등으로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에는 산업이 잘 발달해 있어서 그런지 노동조합이 발달했습니다. 또한, 세계 무역의 절반을 감당하니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우상도 하나의 우상이 아니라 사람들은 각각 다른 우상을 섬기었습니다. 우상을 소개하면 아데미와 삼바다, 아폴로 등이 있었습니다. 각각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받쳐진 음식을 먹으며 교제했습니다. 그러면 두아디라 교회는 누가 세운 교회였습니까? 언제 누가 설립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럽 최초의 개종자인 루디아가 바로 두아디라 출신입니다. 그녀는 자주색 장사를 하는 무역 상인이었습니다. 자주색 장사를 하던 루디아가 회심한 후 귀향하여 교회를 세운 것으로 추측합니다. 아니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시며 당신님을 어떻게 소개하시고 있습니까?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구약의 환상을 떠 올리도록 합니다.(겔1:27) 그리고 두아디라 도시에서 발전한 금속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여튼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이라 신자들은 생생하게 느낌이 왔을 것입니다. 그 눈이 불꽃같다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다는 것이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강력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20절 말씀을 염두해 두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아디라 교회는 우상숭배와 행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혹적인 교훈에 넘어갔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주님께서는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섬뜩하십니까? 아니면 주님 그렇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고민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당신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여기서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면서도 부활하신 당신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이 영적인 통치자요 강력한 심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한 후 19절에서는 권면의 칭찬을 하셨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다섯 가지를 칭찬하셨습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사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의미합니다. 그런 후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두아디라 교회는 실천에 있어서 퇴보하지 않고 더 잘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와 달리 두아디라 교회는 첫사랑이 식지 않고 다섯 가지 덕목을 잘했습니다. 처음 사랑보다 나중의 행위가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참으로 에베소 교회와 정반대이기도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하신 주님께서는 20절부터 책망을 하십니다. 상당히 길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긴 구절이기도 합니다. 20절을 보시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다섯 가지 덕목으로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많아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악을 간과한 타협주의로 물들었습니다. 교회는 잘못된 가르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두아디라 교회는 잘못된 가르침을 용납했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는 좋지 않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분별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환난과 고난은 없었지만, 교회 안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는 것이고, 성도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두아디라 교회는 관용주의에 물들었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교회가 용납했습니다.

 

이세벨은 구약성경에서 시돈 왕의 딸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결혼하며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가지고 와서 유대인들이 음행과 숭배를 하도록 했습니다. 우상을 이용하여 영적 간음을 하도록 함으로 이스라엘이 타락하도록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이 구약의 이세벨처럼 교회를 타락하도록 했습니다. 두아디라 성도는 에베소 교회처럼 분별해야 했습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가 타락하도록 두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우상의 제물을 먹고 성적 타락으로 교회의 순결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내에서 이단이 활동하도록 두는 것은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는 근원입니다. 거짓된 교훈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무너지도록 합니다. 외부의 핍박보다 두아디라 교회는 내부의 문제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상실해 가고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 이세벨은 신자들에게 교묘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신자들에게 그럴듯한 말을 구사하며 양심을 마비시키었을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으로 사탄이 좋아하는 죄악으로 물들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신자들인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21절에서 기회를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에 넘어간 신자들에게 기회를 주어도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자기의 음행을 더 좋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의 때를 모르기 때문에 신자는 회개하라고 할 때 돌이켜야 합니다. 이단자인 이세벨에게도 기회를 주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을 위한 교회로 만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순결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칭 선지자가 하는 이세벨은 악한 자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단을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가 분별하지 못한 결과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22절을 보시면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두아디라 교회여 똑바로 보라. 내가(주님) 이세벨에게 그리고 타락한 신자들에게 침상을 던지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심판을 말씀하심으로 남은 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침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까? 우리말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헬라어에서 침상이라는 뜻은 잠자는 침상과 잔치용 상, 환자용 침상 등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죄로 물든 자들이 즐거워하며 먹는 잔칫상을 엎어버림으로 환자의 침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이세벨은 물론 그녀를 따르는 자들도 용납하지 않고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읽지만, 하나님의 준엄한 선고입니다. 실제로 소아시아 사람들이 음행한 결과 때문에 질병에 걸려 사망한 비문들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23절에서도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께서는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녀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른 자들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영원한 죽음입니다. 음행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참된 신자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세벨을 따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하며 당신님을 누구라고 했습니까?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이라고 하심으로 사람의 마음과 뜻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과 그녀를 따르는 자들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지금 돌이켜야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성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은 변질된 복음으로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계십니다. 지금까지는 주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권면을 통해 주님을 진실하게 믿고 섬기는 두아디라 교회를 위해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시면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신실한 성도에게 주님께서는 사탄의 깊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사탄이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심으로 성도를 보호하시고자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이 유혹을 해도 신실한 성도는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성도를 위해 주님께서는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한 시간 정도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쉽지 않습니다. 학자들도 견해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4절에서 칭찬의 권면을 하신 후 25절에서는 종말론적 격려를 통해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시면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는 말씀처럼 지팡이 교회도 굳게 잡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의 진리와 소망을 믿었던 것을 계속 굳게 잡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이 오기까지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이세벨의 유혹보다 더한 시대입니다. 나는 어떤 유혹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고민해 보십시오. 고민으로 멈추지 마시고 주님께 의지함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이기는 성도에게는 26절에서 무엇을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무엇입니까? 만국을 다시리는 권세입니다. 이세벨의 유혹으로부터 이기는 성도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님의 날을 기대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때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은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시2:9절을 인용하여 27절에서 당신님의 실체의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철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철장은 당시의 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 사용하는 것으로 양을 보호하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 철장으로 적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장은 왕의 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주님의 왕권은 그 누구도 막을 자가 없다는 위엄입니다. 주님께서는 철장을 사용하여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한 자들은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철장으로 깨뜨리기 쉽습니다. 사악한 자들 그리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을 부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상상할 수 없는 심판의 경고입니다. 하지만, 참된 성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날은 축제의 날입니다. 천국 혼인 잔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그날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기대하며 소망하는 영광의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28절에서 권면의 칭찬을 하십니다. 여기서는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28절을 보시면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주님께서는 새벽별로서 당신님의 구원을 성도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영광입니다. 새벽별이신 주님께서 재림할 것이니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믿음을 지키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거짓 복음에 속지 마십시오. 이단자들의 교훈에 따라가는 것은 결국 철장으로 심판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생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 속에서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마지막 절은 잘 아실 것입니다. 29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 그리고 버가모 교회에서 잘 들었습니다. 귀 있는 자들이 되는 지팡이 교회가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악을 간과한 타협주의 두아디라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신실하게 생활하는 남은 자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영광을 아는 신자들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의 교훈에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설은 귀가 듣기 좋은 소리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골수를 쪼개듯이 은혜를 주십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녀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과거나 오늘이나 미래를 잘 아십니다. 마지막 날을 알기에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칭찬과 책망을 통해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두아디라 교회와 같은 현실 아니겠습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악을 간과한 타협주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훈을 교회 안에 둔 것입니다. 교회는 분별이 있어야 하는데 사랑과 믿음이 많아서 그런지 사악한 자들을 그냥 둔 것입니다. 교회는 세 가지가 있을 때 교회라고 했습니다. 말씀의 강설과 성례 그리고 기도 즉 권징입니다. 사악한 자들을 권징하지 않고 타협한 결과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책망하심으로 남은 자를 보호하셨습니다. 책망의 내용을 잘 아실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을 그냥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족이라면 당장 그 길에서 멈추도록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사악한 길이라면 참된 주님의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살길입니다. 주님께서는 길과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길은 주님이십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어둡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볼지어다’라고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실 때까지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참된 길을 가는 성도에게는 새벽별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것과 약속을 믿으며 삶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두아디라 교회에게 말씀하신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는 칭찬을 지팡이 교회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205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후 유대인의 반응 전은덕 마3:1-12(4절부터 12절 중심으로) 2020-12-20 395
204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 전은덕 마3:1-12 오늘은 4절까지 2020-12-13 434
203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내리라 전은덕 마2:13-23 2020-12-06 371
202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다 전은덕 마2:1-12 2020-11-29 637
201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오다 전은덕 마2:1-12 2020-11-15 367
200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메시야가 성육신으로 오셨다 전은덕 마1:18-25 2020-11-01 333
199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2 전은덕 마1:7-17 2020-10-18 363
198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전은덕 마1:1-6 2020-10-11 426
197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2 전은덕 계3:14-22 2020-09-27 370
196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계3:14-22 2020-09-20 516
195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계3:7-13 2020-09-13 436
194 자기 만족주의 사데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계3:1-6 2020-09-06 520
» 악을 간과한 타협주의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걔2:18-29 2020-08-30 417
192 분별없는 관용주의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요한계시록2:12-17 2020-08-23 396
191 고난 중에 승리한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 전은덕 행2:8-11 2020-08-16 478
190 사랑을 잃어버린 정통주의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말씀2 전은덕 계2:1-7 2020-08-02 461
189 사랑을 잃어버린 정통주의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말씀1 전은덕 계2:1-7 2020-07-19 459
188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마지막 여정 전은덕 행28:17-31 2020-07-12 636
187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입성하다 전은덕 행28:11-16 2020-07-05 543
186 사도 바울이 구조된 멜리데 섬 전은덕 행24:1-10 2020-06-28 70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