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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막16:1-20
강설날짜 2021-04-04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EYLbwtwXLk

주님께서는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고 있다.(막16:1-20)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현대의 교회는 부활절, 성탄절 등 즉 절기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인데도 불구하고 특별한 날이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주님을 더 찾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절기에만 부활에 대한 찬송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성탄절에 부르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절기 때에만 부르는 부활 찬송가에 머물렀습니다. 이것을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날 즉 주일에 대한 것을 오해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모든 날이 주의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6일은 인간을 위해 그리고 하루는 당신님을 위해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날을 통해 당신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시간은 당신님을 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님의 날 즉 주일에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절기에만 주님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매 주일 주님의 날로 생각하며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이날을 기념하는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첫 날 즉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주님과 같은 부활을 소망하며 매 주일 “영과 진리”로 예배했습니다. 그러면 부활을 주일에만 생각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생활에서 서로 모이기를 힘쓰며 물건을 서로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자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면 부활만 생각하며 생활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참한 현실에 오신 것도 생각했습니다. 성탄절과 부활만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믿으며 성경의 말씀대로 생활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에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지금도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신앙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기에 우리의 삶에서도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기에 고난 중에도 부활을 믿으며 하나님만 바라 보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삶에서 기도하며 예배하는 삶을 생활합니다. 흩어지는 교회로 예배하다가 모이는 교회로 주일 예배하며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특별한 날에만 부활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날이 주의 날임을 명심하며 부활의 영광을 생각하며 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을 소망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번 부활주일도 참된 부활을 생각하며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 믿으며 부활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산상수훈을 통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알아가다도 부활주일이기에 부활을 생각하며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유럽 교회처럼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현실 가운데서 온전하신 주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 세상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이미지를 상실하고 세상을 더 좋아하며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오늘 부활주일은 더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회복하는 주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주일을 통해 우리의 죄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왜 부활하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하시고 부활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부활주일은 우리 죄에 대한 형벌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부활주일에 우리는 영적인 회복을 해야 합니다. 그런 후 모든 삶에서 영적으로 회복된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좋아하는 현실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기념한 후에도 영적으로 병든 상태를 그냥 유지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심각한 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주일의 부활을 기념한다는 말이나 행사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주일에 왜 예배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대로 종말적 사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 참여한 신자들을 의롭다 하기 위한 부활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앞에서 무죄를 증명하여 주셨습니다. 무죄로 구원받은 교회인 우리는 마지막 주님의 날에 주님과 같은 부활의 모습으로 구원받으며 영광을 누립니다. 부활을 위해 주님께서는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로 오셔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바로 나 때문이었습니다. 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도 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만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오늘 본문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예수님께서 사망한 것을 알고 있는 여인들은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 두었습니다. 안식일에 주님을 생각하며 여인들은 일상적인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을 보낸 여인들은 새롭게 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 즉 주일에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향품을 바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성스러운 안식일은 아무런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생각함으로 예수님만 믿을 때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메시지였습니다. 몸과 영혼의 부활을 알기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사용하며 신앙고백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몸의 부활을 믿사오며”라고 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부활장이라고 하는 고전 15장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여인들은 안식 후 첫날 주일에 아침 일찍이 곧 해 돋을 때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고자 무덤으로 갔습니다. 여자들은 무덤으로 걸어가면서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을 막은 큰 돌을 굴려 줄 수 있을까”였습니다. 여인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들에게 주님은 소중했습니다. 여인들의 발걸음은 슬픔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한 것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과 여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부활로 증명하셨습니다. 6절을 보시면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는 무덤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무덤이 필요하지만, 영원하신 주님은 무덤이 필요 없습니다. 마가는 빈 무덤보다 더 중요한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이니하니라’입니다. 빈 무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입니다. 죽은 줄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꽃은 부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종교와 다릅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 무엇인가를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빈 무덤을 보여주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명확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인들은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있는 그대로 말했습니다.(요20:1-10) 여인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 들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각자 자신의 생업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높은 신분으로 통치하고자 했던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더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부활 소식을 들음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됩니다. 부활의 믿음에 있으면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인데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어도 제자들과 같은 불신앙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인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시면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전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동행하시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제자들은 사랑을 알기에 주님의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개인적 부활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부활 즉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감당하신 형벌이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이 세상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이면서도 구원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영으로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개인적 부활인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우리들의 현재의 영의 부활과 미래의 우리들의 몸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의 수단이 되는 부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자들의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을 보증하는 공적인 부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과거의 몸과 다른 것입니까? 12절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입니다. 시골로 내려가는 제자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모습을 즉시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던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12절에 있습니다.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열 번에 걸쳐 사람들 앞에 당신님의 몸을 드러내셨습니다. 특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몸을 만져보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께서 죽지 않고 살아계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강도 높은 책망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의 믿음이 약해졌다는 것이고,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창설직원으로 세우시며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시면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은혜요 기쁨이기도 합니다.

 

교회인 성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16절에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세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과 불신앙에 대한 것을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례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에 의해 신앙고백 하며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 하지 아니하며 세례를 받는 것은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속이며 세례를 받은 죄는 결국 영원한 형벌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믿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세상의 것을 더 좋아합니다. 이런 가운데 교회는 때를 얻지 못해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은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별됩니다.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중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연옥은 없습니다. 오직 천국과 지옥뿐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가를 아는 제자들은 20절에서 무엇을 증언했습니까?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과거의 불신앙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 신앙인으로 생활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과 함께 계심으로 힘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부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부활하신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일들의 성격과 같이 부활도 그 안에서 종말이 이미 임하여 왔으나 이 세상 끝은 아직 이르지 않은 그런 “이미와 아직 아니”의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며 순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본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육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에도 몰랐지만, 나중에는 알았습니다. 성육신으로 오셨던 외형적인 몸이 아니라 부활하신 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몸은 우리가 알기에 어렵습니다. 우리도 부활한 후 예수님께서 어떻게 변형되어 부활하신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몰랐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안 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헌신하며 주의 길을 가는 제자였습니다. 제자들만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누구나 부활에 참여하며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특별한 날에만 주님을 생각하며 고난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365일 모두 주님의 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늘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는 날을 소망하며 교회인 성도는 몸의 부활을 기다리며 생활해야 합니다. 부활의 의미를 아는 성도는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며 부활의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꼭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아는 지팡이 교회는 오늘 말씀을 늘 기억하며 생활하는 교회이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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