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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7:1-6
강설날짜 2021-07-18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VeOf-MWCaDE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마7:1-6)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삶의 한계와 위험을 아시고 가장 먼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신 것이 산상수훈이었습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강설로 듣고 있습니다. 그중에 팔복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온유해야 하며, 긍휼히 여김이 있어야 하며, 마음이 청경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도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지팡이 교회는 이 세상의 것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함으로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인정하며 성도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복음을 전하며, 화평케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은 부귀영화의 삶을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두고자 합니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호가호위하며 생활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생활을 하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살기 위한 복의 근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김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섬기며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장성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우리는 산상수훈을 잘 배움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난주 말씀을 다시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 강설 제목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의 명령의 말씀”이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교회로 하나님만 섬기며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하찮게 보이는 꽃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그런데 그 들풀을 말씀하시면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과 마테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시며 입히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보물을 쌓으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를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존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용할 양식을 매일매일 구하도록 하심으로 믿음이 작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하신 것을 생각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의 삶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좁은 길이지만 구원이 있는 나라입니다. 목숨이 먹는 것 입는 것보다 중요한 것을 아는 교회는 참된 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죄로 타락한 우리는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우리의 생존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로 예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염려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 세상의 보물보다 더 귀하고 존귀한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도록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상명령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를 가르쳐 주셨는가를 통해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의해서 지켜야 할 것들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지켜야 할 교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까?라는 고민을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비판하는 것 자체를 금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이웃의 인격과 삶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비판할 때는 분별할 수 있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나는 옳고 이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인격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함부로 비판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선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누가도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눅6:37절에서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대한 추가적인 말씀까지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주님께서 어떠한 맥락으로 말씀하였는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눅6:36절도 보아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입니다. 그런 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맥락을 연결하여 볼 때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 하라는 것입니다. 자비와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자비와 용서를 위해 인격적인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씀하였지만, 무조건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다른 생각이나 행동에 관해 판단과 평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누가 개와 돼지인지를 적극적으로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을 보시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조심할 수 있도록 분별 즉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이웃의 말과 행동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격이 상할 수 있는 말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이 돌이킬 수 있는 말을 함으로 교회가 무엇을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웃과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인은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말을 해야 합니다. 정죄하는 말을 하면 이웃은 교회가 어떠한 사역을 하든지 거부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이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의인과 같은 모습을 하며 습관적으로 이웃을 죄인으로 정죄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2절을 보시면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언급하면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웃을 비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비판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날에 비판에 대한 비판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부당한 가혹한 말과 인격 모독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같은 대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웃과 대화할 때 늘 자비로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판단하는 그대로 마지막 때에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바라는 자들은 누구나 비판하지 말며 하나님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기 때문에 갈6:1절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관대한 마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을 아끼며 이웃의 티는 잘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절에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에게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3절을 보시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입니다. 나의 눈 속에 있는 들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장법을 이용하여 이웃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을 말씀하셨을 때 단순히 사람의 눈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의 영혼과 인격으로서의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형제의 눈은 형제의 인격과 영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탈무드에서 “티”는 그리 중요치 않은 “흠”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을 연결하면 티는 조그마한 잘못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티를 가지고 이웃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은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들보는 “대들보, 통나무”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대들보처럼 큰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이웃의 아주 작은 티를 공격하는 것은 자비와 용서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들보가 있는데도 이웃의 티를 공격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까?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합니다. 타인에게는 티를 들보처럼 보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티와 들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가져야만 티와 들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4절에서 ‘들보’만 한 큰 잘못을 범한 자가 아주 작은 ‘티’를 범한 자를 비판하는 불합리한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하셨습니다. 4절을 보시면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사소한 티는 아주 잘 보면서도 자신의 들보와 같은 허물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것 자체가 영적으로 어두운 것이며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라는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어두운 무지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시작장애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었지만,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판단할 때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도와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적부패를 인정하며 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지 아니하며 심령이 가난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섬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외식하는 자여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5절을 보시면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에 종교지도자 중 바리새인들을 의미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참되게 믿지 아니하며 세상에 보물을 쌓아두고자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답해야 합니다. 나는 바리새인과 같은가? 반대로 심령이 가난하여 주님만 믿고자 하는 성도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으로 외식하는 것은 타인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웃의 잘못된 보고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지 못하는 위선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눈을 빼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 모든 비판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이웃과 관계에서 우애를 나눌 때 인신공격과 비난적인 비평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들보를 빼내는 자들은 이웃의 티를 볼 수 있어서 복음을 전하며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은유의 방식을 사용하심으로 당신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셨습니다. 6절을 보시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개와 돼지 앞에 던지지 말며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였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개와 돼지는 복음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먼저 적용해야 할 것은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며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을 통해 복음을 듣지만 거부하는 자들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고의 메시지를 주심으로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거룩한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거룩한 복음을 위해 우리는 거짓과 불의 그리고 악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복음이 발로 밟고 돌이켜 우리를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연결된 신앙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상하지 아니하도록 서로 비판하지 말며 거룩한 것과 진주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비와 용서가 있는 마음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개와 돼지라는 의미를 들을 때 그러려니 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개와 돼지에 대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개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때때로 원수나 악한 자를 개로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원수들을 개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돼지는 파멸의 상징으로 생각하며, 이방인들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 자입니다. 열매를 맺든지 못 맺든지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하는 사명 자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웃에 대한 비판의 부당함을 지적하신 오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비판과 판단에 앞서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며 자비와 용서가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동행하시며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우리는 이웃을 공격하는 비판이 아니라 복음으로 섬겨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도 우리와 같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을 정죄하지 아니하므로 산상수훈의 가르침처럼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개와 돼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 자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기에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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