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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이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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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순서 가운데 헌상(獻上) 순서가 있어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헌상하는 일은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이번 헌상의 보편화와 함께 헌상에 대한 오해도 우리 주변에 난무(亂舞)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에 대해 성경 신학적 고찰을 하여 우리의 목회가 진정 성경에 근거한 바른 목회가 되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 헌상을 다시 생각하여 바르고 성경적인 헌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의 삶과 특히 교회가 성경적 모습을 가져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기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용어에 대한 정리를 하고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 교회 안에서는 예배 중에 하나님께 헌상하여 드리는 순서를 흔히 ‘헌금’(獻金)이라고 불러 왔다. 좋은 용어이지만 이를 오해하면 돈이나 재물만을 드리는 순서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므로 헌금이라는 용어는 이제 우리가 밝히려고 하는 폭 넓고 바른 의미의 헌상이 가진 풍성한 뜻을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헌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또한 연보(捐補)라는 용어도 사용되는데, 이것도 의연금(義捐金) 같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연금(捐金)이라는 뜻을 전달하므로 헌상 되어진 것의 사용에 대한 한 성격에 대해서는 좋은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우리의 헌상의 폭넓은 의미를 다 드러내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이런 뜻에서 진정 성경적 헌상의 의미를 잘 드러내면서 가르쳐 오신 김홍전 목사님의 용어인 ‘헌상’(獻上)을 채용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이는 ‘위로 헌신하여 드림’, ‘바치어 올려 드림’이라는 뜻을 지닌 용어로 결국 헌상의 대상이 우리 자신임을 잘 드러내고 있는 좋은 용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헌상’ 이라는 용어가 이후에 설명할 모든 의미를 잘 포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용어라고 생각되어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헌상에 관한 이 논의를 하기로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용어는 우리 말 성경에 “연보”라고 번역된 말의 헬라어인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이다. 이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교제”라는 말인데 성경에서는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이 용어를 써서 사용하고 있다(고후 8:4; 9:13; 롬 15:26). 헌상은 성도들 사의의 구체적인 교제의 표현의 하나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생각하면 그것은 또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과 은혜를 받은 우리의 교제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헌상은 또한 넓은 의미의 “코이노니아”, 즉 교제라는 것이 성경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제(코이노니아)로서의 헌상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성경이 말하는 다른 용어인 성도들에 대한 “섬김”(διακονία)이기도 하다(행 11:29, 30, 고후 8:4; 9: 1, 12, 13). 그러나 용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헌금’이라고 하든지 ‘연보’라고 하든지 그러한 전통적 용어 사용에 친숙한 분들은 전통적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교제(κοινωνία)와 섬김(διακονία)의 의미를 지닌 헌상으로 생각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자신들을 헌상할 수 있기 원한다.



I. 헌상이란 무엇인가?



헌상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개념 정의와 함께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이다. 무엇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일단 그것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들을 열거하고 그런 것이 아님을 생각하여 부정적 뉴앙스를 제거하는 작업을 통하고, 그와 함께 헌상의 의미를 찾아서 긍정적 뉘앙스를 제시하는 것이 매우 좋은 탐구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헌상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열거하고 부인하는 일을 하여 보기로 하자.



1. 헌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1-1. 헌상은 죄 씻어 주신 것을 보상하기 위한 대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헌상에는 주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구속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헌상은 구속받은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헌상이 죄 씻음에 대한 대가일 수는 없다. 우리가 헌상하는 그것으로 주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상을 함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갚는다는 어리석고도 얄팍한 생각을 다 버려야만 한다. 우리가 후에 드러내려고 하는 헌상의 장중한 의미를 생각할 때 헌상을 구속의 대가로 생각한다는 발상 자체가 있을 수 없고 한심한 것이다.

더구나 헌상은 이 세상적 의미에서 복 받은 대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렇게 잘해 주셨으니 우리가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드린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있을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런 생각은 사실상 아주 주제넘은 어리석은 생각임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을 우리가 대가를 주고 갚는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후에 생각할 헌상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드리고 나 자신을 드리고 나의 일생 전부를 모두 다 주께 드린다고 해도 그것으로서도 부족하다는 심령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신 것에 대가를 주어 갚는다는 의미로 헌상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1-2. 헌상은 영적인 복을 얻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돈을 드려서 영적인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 이는 그 돈과 함께 망하리라는 것을 강하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헌상도 영적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드리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헌상은 더구나 이 세상적 의미의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돈을 많이 내는 이에게 이 세상적인 복을 더 주시고, 적게 내는 이에게 복을 덜 주고 하는 이 세상적인 신이 아니시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은 돈보고 무엇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헌상은 무엇을 얻기 위해 드시는 수단과 도구가 아닌 것이다.

1-3. 따라서 헌상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성경 구절은 이런 사람들에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아이러니칼하게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산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生畜)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편 50: 9-13).



이는 구약 시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과 염소와 황소로 제사드릴 것을 명하셨던 시대에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 때에라도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제사를 요구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이 말씀의 뜻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만 한다. 사실 그 제물은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심지어 구약에 요구된 십일조와 헌물들도 결국 잘 따져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제대로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결코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주 강한 표현까지를 동원하신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하나님께서 주리실리가 없다. 또한 하나님이 주리셔도 그 분이 짐승과 생축과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들을 잡아드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표현하신 것은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를 깨우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헌상하라고 하신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히 깨우침 받을 수 있다.

1-4. 헌상은 나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헌상은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여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런 저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식의 발상 자체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1-5. 헌상은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와 연관해서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곤 하는 다음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라 보라(말 3:10).



이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으로 이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행하여 자신들의 존재하는 이유와 사명을 다 행해야 할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우심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말씀을 진정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며 말씀을 이해하는 수준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1-6. 헌상은 나의 것 중 일부만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전체적 사상에 의하면 헌상된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열매를 주께 드리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수확하면 첫 열매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고, 제사장은 그것은 흔들어서 하나님께 드린다[搖祭]. 그것은 밭에 있는 나머지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며, 이것을 그 전체의 대표로 주께 드린다는 의미이지, 첫 열매만을 주께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자기겠다는 태도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나머지를 가지고 살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을 잘 드러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헌상할 때에도 헌상한 그것만을 주께 드리는 것이고, 나머지는 거룩하지 않은 것이라거나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의 사고는 나머지를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여 갈 때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면제하는 심리적 면책 의식을 낳는 잘못된 기제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상된 것 일부만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나머지는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1-7. 헌상은 자신의 부족한 삶을 보충하여 하나님의 애호를 받기 위해 드리는 수단이 아니다. 다른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할 때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헌상이 아니다.

1-8. 헌상은 교회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영향을 더 하게 하도록 하기 드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교회에서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 것을 의식하는 이들을 죽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헌상의 자시 과시적 성격이나 다른 목적으로의 전용을 경멸하신다.



이와 같이 수많은 잘못된 생각이 열거된 것은 그런 의미로 드려지는 헌금이 이 세상에 실로 무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것들이 헌상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자행(恣行)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례하고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인가? 헌상이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 결코 아니라면 과연 헌상은 무엇인가?



2. 헌상은 구속받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상징적 행위이다.



2-1. 헌상에서 드려지는 것은 재화나 다른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나 자신’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일으킴을 받은 나 자신을 구속하여 주신 주님께 다시 드리는 일이 헌상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만이 헌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헌상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헌상을 할 수 없고 혹시 헌상 예식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헌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가치하지만 주께서 불쌍히 여겨 구속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이제는 온전히 주께 속한 삶으로서 온전히 주께서 주관하시는 가운데 자신들을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데 드리며 살겠다는 마음을 다 담아서 헌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헌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한 헌상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헌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속사적인 일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공동체와 구속사의 진행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구속사에 속한 일원으로 인정하면서 드리는 것이 헌상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리는 의미가 헌상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헌상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한 헌신(獻身)이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인 진행에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서 온전히 드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헌신이 없는 헌상은 헌상이 아니다. 온전하지 않은 헌신도 헌상이 못된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성경에서는 흠 없는 것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받지 않으신다.

2-2.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흠이 있는 존재인데, 우리는 어떻게 주께 헌상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항상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 제사에 의존하여 성령님 안에서 드리는 헌상만이 헌상이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께 의존해서 우리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성령님의 온전하신 인도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히 주께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전히 성령님께 의존하는 우리의 헌상은 영적의 일(신령한 일)이기도 하다.

2-3.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의 공로 없이는 헌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구속에 근거해서만 헌상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드린 헌상은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온전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항상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없이는 헌상이 없다. 그러므로 헌상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성령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님께 둘러싸여진 우리를 기꺼이 받으시는 삼위일체적인 사건이다.

2-4. 헌상에서 드려지는 나 자신은 매일 매일의 삶과 그것이 합하여 이루는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뜻의 진전과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드리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헌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헌상은 헌상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있는 헌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왜 드리는 지도 모르고, 또는 헌상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무조건 많이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께 의존해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헌상한 자답게 사는 일이다. 따라서 헌상 예식 때 드린 것은 이렇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받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면서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노력과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주께서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헌상 된 것이 주께 의미 있으려면,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쓰고 하는 것도 이렇게 주께 드려지는 것으로서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마치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매일 진설병을 하나님 앞에 진설하여 놓는 것과 같다. 우리는 매일을 주 앞에 드려진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인생의 행보를 걸어 나가며,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님의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삶과 연관된 헌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헌상은 우리의 삶과 함께 다시 한 번 더 신령한 일이다.

2-4. 그러므로 삶과 분리된 헌상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며, 그런 헌상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상에 있어서는 돈을 얼마나 많이 드리는 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헌상의 의미에 충실하게 나 자신을 주께 드렸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 가려고 하시는 바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결적인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들답게 하나님의 뜻의 수행을 위해서 자신을 드려 주님의 뜻을 수행하며, 재화를 드려 그런 일이 잘 수행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헌상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의 헌상은 삶과 관련된 헌상이어야 한다.

2-5. 헌상은 주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나 또한 주께서 우리를 받으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은혜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헌상을 그저 감사의 표현으로만 여겨서는 안되고, 그렇게 우리의 존재와 삶을 주의 것으로 받으셔서 주께서 당신님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그야 말로 황송하고 은혜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상을 하면서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 한다는 의식이 있어서는 안되고,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주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여 살게 하시는 것을 황송하게 여기며 은혜롭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헌상하는 사람은 그렇게 헌상할 수 있는 것을 은혜로 여기는 사람이다.



3. 헌상은 교회의 지체인 우리를 함께 주께 올려 드리는 상징적 행위이다.

헌상은 결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다. 헌상은 교회의 공동체적 행위이다. 헌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그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주께 드려 주께서 시키시는 일을 다 수행하겠다고 드리는 행위이다. 이 교회가 주께서 불러 시키시는 일을 잘 감당하도록 주의 뜻을 깨닫고 그 깨달은 주의 뜻에 온 교회를 온전히 바쳐 드리는 행위이다. 헌상은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 자체를 위한 것도 우리들 자신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드러내는 교회의 각성과 의식의 표현이다. 따라서 개개인들은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그 일원으로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주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해 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그 교회의 일부로 주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상은 교회적인 일이다. 개인적으로 헌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상은 항상 교회의 예배 중에 그 온전한 교회적 의미를 다 담아서 주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교우들이 다 참여해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 교회적 행위에서 빠지는 것을 있을 수 없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잘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교회가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각 몸의 각 지체가 자신의 몫을 주께 드리는 공동체적 행사가 예배 중에 드리는 헌상이다. 따라서 다음절에서는 헌상과 예배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II. 헌상과 예배



1.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헌상

헌상은 예배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지교회(肢敎會)가 모여 하나님의 뜻을 기리고 찬송하며 하나님께 그 영혼의 무릎을 끓어 절하는 공동체적 경배의 여러 요소 가운데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결단하는 순서가 있는 동시에 그렇게 배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우리 자신을 공동체로 주께 드리는 행위가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가 예배 중에 드리는 헌상에는 첫째로 우리의 한 주간 동안의 삶을 구속받아 주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로서의 삶으로 인정하고 온전히 주께 드린다는 복음에 대한 온전한 신앙 고백(confession of faith)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둘째로 헌상에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의존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에 우리의 힘써 노력하여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 때문에 흠과 죄가 많음을 인정하는 죄고백(confession of sins) 행위이다. 이 죄 고백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속에 공로에 기대는 것이며 성령님께서 그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온전히 적용하여 주시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로 하나님께 감히 접근하게 하시는 “시은소”(施恩所, mercy-seat)이다. 따라서 우리는 헌상하면서 자만한 마음으로 할 수 없다. 자족하여 스스로 설 수 있는 마음으로 하는 헌상이나,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하는 헌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헌상은 항상 우리 자신의 부족과 잘못과 연약함과 힘없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로 이제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어서 우리 자신을 주께서 부탁하시는 일에 온전히 드리겠다는 헌신(commission)의 다짐으로 헌상하는 것이다. 주께로부터 오는 용서에 힘입어서 이전보다 더 온전히 뜻을 깨달아서 주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들을 드려 나가겠다는 헌신의 재다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모든 교회의 지체와 함께 고백하는 것이므로 헌상은 예배 중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는 헌상이 복음 사건의 결과를 드리는 것이란 의미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이 산출해낸 공동체가 그 전체를 주께 드리는 것임을 말하기에 구속받은 공동체 전체의 경배 가운데서 나타나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헌상 예식은 그것의 참된 의미에 근거해 생각해 볼 때에 교회 공동체의 경배의 가장 상징적인 행위요 경배 전체를 요약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경배는 구속받은 공동체가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며 하나님께 자신들은 온전히 드리는 일인데, 헌상에서는 이렇게 구속받은 우리들을 온전히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헌상 예식은 예배의 꽃이요 면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돈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고, 헌상의 진정한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자신을 온전히 구속된 자로서 주께 드린다는 의미가 가장 잘 요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헌상 예식이다. 물론 우리는 찬송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여 주님의 뜻을 수행하여 살게 하심 주님의 크시고 기이한 일을 찬양 드린다. 우리는 또한 기도 가운데서 그 일에 대한 감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있게 풀어 설명하고 그 설명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에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 하는 일에서도 역시 같은 것이 나타난다. 그런데 헌상 예식에는 온전히 구속된 자들로서 자신들을 주께 드리고 주님의 처분을 받기를 원하는 예배의 의미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2. 예배 때마다 헌상해야 하는가?

이렇게 예배와 헌상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과연 예배 때마다 헌상 예식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과거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에서는 그런 점을 강조해서 공예배로 모일 때마다 헌상을 했었고 그것이 예배 순서 중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예배로 모일 때마다의 모습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예배가 아닌 시간에, 예를 들어서 기도회 시간에나 구역 모임을 하는 시간에 헌금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예배 중에 헌상하는 것이 한 주간 동안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 전체를 다 담아 하는 것이라는 이제까지의 설명을 생각한다면 공예배라고 해도 그 모든 예배 때마다 헌상 예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일 주일에 한번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헌상 예식을 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 그 의미를 더 잘 드러내는 순서로 의미가 있으리라고 판단된다. (1) 혹시 이것을 위한 성경적 근거를 굳이 말하자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를 말하는 중에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주해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것에서 아주 명확한 성경적 근거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바울은 “매 주일 첫날에(κατὰ μίαν σαββάτου)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라고 한다(고전 16:2). 이 말은 각 사람이 매주 첫날에 각자의 집에 저축하여 두었다가 후에 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크리소스톰 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a) 바울이 굳이 “매주일 첫날에”(κατὰ μίαν σαββάτου)라고 하여 사도행전 20:7이나 요한 계시록 1:10과 연관될 수 있는 매주 첫 날의 예배를 상기시키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날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모여 성찬 등을 나누던 날이었음을 생각 할 때, 그리고 (b) 그 뒤에 나오는 “내가 갈 때에 연보하지 않게 하라”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매주일에 헌상을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리스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 (여기서) 예배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아마도 예배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더구나 2세기에는 분명히 교회가 매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중에 헌상하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3) 우리가 주일 아침 예배 때에 위에서 말한 온전한 의미를 다 담아서 헌상하였다면 그 헌상 예식 속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다 포괄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녁 예배 시간은 성찬 예배를 드린 경우에 성찬 감사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이, 아침 예배 때에 주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아 주셨고, 또한 더불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 예배로 드리는 것이 더 좋으리라고 여겨진다. 감사를 표현하는 예배를 드리는 이 때에 굳이 또 헌상 예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주일 저녁이나 오후 예배 시간이 흔히 이루어지는 각 기관이나 전도회 헌신 예배와 그와 관련된 헌금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예배는 그 자체가 헌신의 행위이다. 따라서 헌신 예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지를 주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그런 시간에 따로 헌금 순서가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헌상의 진정한 의미를 손상시키고 오해할 수 있는 여지는 주는 것이 될 것이다.



3. 헌상과 관련된 순서의 진행 방안 제시

예배 중에 헌상을 할 때 정확히 어떻게 하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헌상에 대한 성경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건강한 시대의 교회가 헌상 예식을 하는 것에 비추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헌상 예식 순서를 제안 해 볼 수 있다.

헌상은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일 주간의 삶을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 자체가 헌상이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 전에 자신의 삶을 잘 살펴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산 삶을 주님께 다른 성도들과 함께 교회로서 드리려는 준비를 하게 된다. 주일 전날인 토요일에 이렇게 준비하여 주일 하루 종일을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봉사하는 일에 드리도록 잘 준비하는 것이 헌상의 준비가 된다.

주일 아침 예배 처소에 모이면서 각자 준비한 헌금을 헌금함에 넣는 것으로 헌상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여러 방법 가운데서 이것이 가장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헌상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되면 성도들이 예배 시작 전에 모이면서 이미 각각을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함께 드리는 예배를 준비하게 된다.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각각이 모여서 하나로 주께 드릴 준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배를 드리면서 경배 순서 중에 정한 헌상 시간이 되었을 때 모든 성도들이 헌상송(獻上頌)을 올려 드리는 것으로서 헌상 예식이 시작된다. 우리들은 부족하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 우리를 주께 드리오니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용을 담은 헌상송을 온 교회가 하나로 주께 드리는 것이다. 헌상송이 끝날 때 집사 님들 가운데서 맡은이들은 온 교회를 대표해서 헌상을 주께 드리는 봉헌을 하는 순서를 가지는 것이 좋다. 봉헌과 함께 예배 인도자가 온 교회를 대표해서 주께서 우리의 헌상을 받아 주셔서 주의 뜻을 위해 온 교회를 사용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는 헌상 기도를 드림으로 (또는 헌상 기도 후에 헌상송을 하나 더 부름으로) 헌상 예식이 마쳐지게 된다. 이렇데 헌상송이나 봉헌 순서나 헌상 기도 모두에서 하나님께 온 교회를 드리니 주께서 교회를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만이 전체의 주조(主調)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진전이 우리의 헌상 예식을 주관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헌상 기도 중에 헌상한 자들을 높이는 말이나 시사가 있거나, 헌상한 자들에게 복 내려 주시기를 위한 어구가 있을 때 우리들이 헌상의 본래적인 목적을 오해할 위험이 많으므로 그런 것을 제외하는 것이 좋다. 또한 헌상 시간 중에 헌상한 분들을 일일이 호명하는 것도 헌상의 본래적 의미를 손상시킬 수 있으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III.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1. 신약의 헌상에 대한 교훈

신약 시대에는 어떤 명확힌 기준을 제시하여 우리에게 그에 따라서 헌상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신약 시대에는 헌상과 관련한 정신을 좀더 강조하고 있다. 그 정신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1.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다(고후 9:7). 그리고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ὅ τι ἐὰν εὐοδώται)하는 것이다(고전 16:2), 즉 “각각 그 힘대로” 하는 것이다(행 11:29). 이와 같은 말들이 신약에서 성도들이 얼마나 헌상해야 하느냐를 가장 잘 규정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각자가 정해서 헌상할 때 유념해야 할 세 가지 말씀을 덧붙여 주고 있다:



(1)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후 9:7).

(2) 억지로 하지 말라(고후 9:7).

(3)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각자가 알아서 정한대로 헌상한다고 할 때 부패한 인간성이 구속받은 성도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면 어떤 결과가 드러나게 되는지를 바울 사도는 잘 알고 있기에 이런 부패한 인간성의 작용을 염두에 두면서 바울은 인색함으로 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체면치레로나 다른 이유 때문에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바울은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고 말하고 있다. 성도들이 각자의 힘과 원하는 바에 따라서 준비하여 헌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각 사람의 양심에 따라 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그런 식으로 하되 참으로 즐겨 내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발적 행동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헌상의 정도에 대한 큰 원칙이다. 즉, 헌상에는 그 어떤 강제도 있어서는 안되고, 원칙상 각자의 능력과 원함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1-2.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마음이 보물이 있는 곳에 있다고 하셨으니, 이는 우리의 마음을 기울여서 우리의 마음이 다 가게끔 헌상해야 할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씀의 보다 근본적인 뜻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어서 하늘에 속한 것을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또한 우리가 헌상할 때 마음을 기울여서 그만큼 헌상해야 할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1-3. 이렇게 온 마음을 다 기울여서 하는 헌상의 대표적인 예로 주께서는 과부가 헌상한 두 렙돈을 들어 설명하시고 있다(눅 21:1-4). 이 교훈은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과 과부의 두 렙돈 넣는 장면의 비교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교훈은 동시에 두 가지 교훈을 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하나님 앞에서는 헌금의 다과(多寡)가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주께서 보시기에도 부자들은 많이 헌금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적게 헌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든지 진정으로 헌금하는 한(限), 누가 많이 하고 누가 적게 하는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부자가 진정으로 헌상한다면 그는 자신이 많이 헌상하는 것이라는 의식을 도무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상대적으로 많이 헌상한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늘 부족하게 바치고 있다고 느낄 것이며, 하나님께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들 다 드려도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헌금의 다과(多寡)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다과로 사람을 취하시지도 않으신다. 따라서 헌금 양의 다과는 하나님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그러나 동시에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주님의 평가는 이런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4). 그러므로 주님의 시각에서는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 21:3)라고 판단하실 수 있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바 생활비 전부를 헌상해야 한다든지, 그런 절대적인 의미에서 누구보다 많이 헌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주께서 다른 곳에서 가르치신 마음을 다 하여, 마음이 기울어질 정도로 하는 것의 의미를 주께서 의미 있게 보신다는 것을 보충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어떤 구체적인 지침을 주지 않았어도 이렇게 헌상하는 정신을 규제하는 말씀들에 근거해서 우리가 각기 정한대로 하되 인색하게 하지말고 마음을 기울여서 전부를 넣는 심정으로 즐겨 헌상하며, 결코 억지로 헌상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즐겨 헌상하는 것이다.



2. 헌상한 돈과 헌상된 삶의 문제

다시 강조하지만, 헌상한 돈만이 주께 드려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재산, 건강,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헌상한 사람은 나머지 돈을 사용할 때에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주님께로부터 그 재물의 사용을 담당하는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목적이 사는 방향이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런 자답게 재물을 사용해서 건강도 유지하고 식물로 먹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번 것으로 우리가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날마다 우리의 쓸 것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먹고 입고 살아간다는 의식이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의식이 헌상에서 표현되는 것이며, 헌상한 것이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라는 것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삶과 사명 수행을 하고서 여유가 있는 재물이 있으면 주변에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청지기로서 의미 있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사용하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 특히 구제하는 일에 신경 써서 우리가 풍족하게 받아 누리는데 우리 주변에 굶주려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다 누리는 것을 오직 우리만 받아 누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많은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받아 누리는 일을 실천해 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 헌상한 이다운 삶의 방식이다.



IV. 교회의 헌상 관리와 사용의 문제



1. 바람직한 헌상 관리 방법

성도들이 자신 전체를 드리는 것을 대표하여 드린 헌상된 물질을 관리하는 일에서 교회는 매우 심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일단 이 헌상을 관리하는 일은 성경적으로 집사님들 고유의 일이다. 재정 출납을 집사님들이 감당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을 감당한 집사님들 이 신중하게 드려진 물질을 관리해야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누가 얼마를 드렸는지를 알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누구에게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연말 정산에서 기부금에 대한 증빙 서류를 갖추는 목적이 없는 한(限) 재정 담당 집사님들조차도 누가 얼마를 드렸는지를 알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개발하는 것이 최선이다. 혹시 연말 정산과 관련해서도 그런 의식과 비밀 유지 중심의 관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의 재정 관리에서의 큰 원칙은 비밀성과 정직성이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에 이 두 가지 원칙이 잘 보장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헌상한 것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는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헌상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음절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2. 헌상된 재물의 이상적인 사용

신약 성경에서는 헌상된 재물이 일차적으로 구제와 복음 전도에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있다. 아직 복잡하게 제도화되지 않은 처음 교회의 이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주요한 시사를 준다.

(1) 처음 교회는 교회 안의 과부와 같이 가난하고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없는 이들을 돕고 그들의 생활을 지지하는 데 우선적으로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6장은 과부들에 대한 구제가 사건의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고, 2장에서도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것을 공동체의 목적을 따라 사용하도록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 2:45)라고 명시하고 있다. 자발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헌상된 물질이 각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서 교회의 직임자들에 의해서, 특히 집사님들에 의해서 공급된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은 교회가 수행해야할 본질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과부나 가난한 이들을 모두 교회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5:16)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구제는 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한 지역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지역의 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돕는 일을 신약 성경은 자주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대 지역이 크게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안디옥 교회는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扶助)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9-30)고 했으며,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오니라”(행 12:25)라고 했다. 이방의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대 교회의 어려움에 구제하는 일을 각 기 그 힘대로 실행한 것이다.

이는 후에 바울의 전도 여행 기간에도 여러 번 있게 된 일이었고, 바울은 이런 활동을 격려하는 일을 자주 하였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16:1-4에서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매 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자신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에 소위 특별 헌금을 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면서 성도들이 이렇게 모은 것을 성도들을 위한 “연보”(ἡ λογεία εἰς τοὺς ἁγίους = the collection for the saints, 1, 2절), 또는 “은혜”(χάρις, 3절), 즉 자비로운 선물(a gift of kindness or of generosity)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의 어려움 당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가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위한 것임은 고리도전서 16:3에 언급되어져 있다. 이것이 그 곳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임은 고린도후서 8:13; 9:9, 12에 시사되어졌고 로마서 15:26에서 아주 명백히 언급되고 있다.

또한 고린도후서 8장-9장에서는 고린도를 포함한 아가야 지역의 교회와 마케도니아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를 위한 섬김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구제를 위한 헌금을 “성도들을 위한 연보”(λογεία εἰς τοὺς ἁγίους, 1, 2절), 또한 “교제”(κοινωνία, 8:4; 9:13), 은혜(χάρις, 8:4)와 섬김(διακονία, 8:4; 9:1, 12, 13)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면서 이 모든 것은 서로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고 하여 헌상이 교회와 교회 사이의 평균케 하는데 사용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것은 로마서 15:25-27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쁘게 얼마를 동정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또한 사도행전 24:17도 참조하라). 이와 같은 교회간의 구제는 그 자체로도 의미 있을 뿐만이 아니라, 특별히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이들이 많고 그의 사역의 결과로 세워진 교회들이 그런 구제를 모아 보낸다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진다. 자신을 미워하고 의심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교회적인 유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이런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이와 같이 성경의 가장 많은 부분에서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간의 성도를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헌상된 재물이 사용되었고, 또 그런 목적을 위해 헌상되어야 할 것이 언급되어져 있다.

(2) 이 보다 적게 언급된 것은 바울이나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위해 여러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나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냐?”고 한다(고후 11:8).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고후 11:9)고 말한다. 즉, 마케도니아와 다른 여러 교회들이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운 것이다. 복음이 온 세상에 효과적으로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은혜를 먼저 받은 교회가 선교 사역에 힘쓰는 사역자를 경제적으로 지지하는데 헌상된 재물과 개인적 도움과 교제인 연보가 사용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또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바울을 후원한 유일한 교회였다(빌 4:15). 또한 그들은 바울이 데살로니아에서 사역할 때에도 여러 번 선교 헌금을 보내었다(빌 4:16). 또한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위해서도 늘 생각하던 후원을 실행하고 아마도 에바브로 디도를 통해 전달한 것에(빌 4:18) 대해서 바울은 기쁨과 칭찬의 마음을 가지고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 4:10). 물론 이런 선교 헌금에 대해서 바울이 칭찬할 때 그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그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빌 4:11)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라는 것을 강조한다(빌 4:17). 그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빌 4:18). 그는 또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빌 4:11). 즉,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 배고품과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것이다(빌 4:12).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주장한다(빌 4:13) 그러므로 이 말씀은 흔히 오용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끔을 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나 적극적 사고 방식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든지 자족하며 주께서 주신 한도 내에서 울에게 맡겨 주신 것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말이며, 풍부 가운데서도 주께서 주신 일을 수행한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빌립보 교회가 선교 사역을 하는 바울을 돕는 것은 그의 괴로움에 동참하는 교제의 한 부분이며, 귀하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온 세상에 알게 하여 많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 안에로 데리고 들어오는 선교 사역을 위해 교회의 헌상과 개인의 기금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3) 물론 이와 같은 도움을 받을 때 바울 등의 사도들은 매우 조심해서 자신이 지금 사역하고 있는 해당 교회로부터는 도움을 될 수 있는 대로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 중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한 것이다(살전 2:9, 고후 11:9). 그래서 고린도에서도 바울은 장막 깁는 일을 하였고(행 18:3),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밤낮으로 일하면서 ......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살전 2:9).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 자신의 손으로 자신과 동행들의 쓴 것을 감당하였다(행 20:33, 34). 그가 그렇게 한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 그러나 그는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소위 목회 사역자가 교회의 지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원칙을 천명하는 일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고후 9:4) “우리가 ......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후 9:5)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후 9:6)는 수사의문문을 제시하면서,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고 하면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기록한 신명기 25:4의 말씀을 인용하고 또한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후 9:13)고 구약의 제도까지를 인용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원칙을 재천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히 한다: “이것을 쓰는 것은 내가 이 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고후 9:15). 그러나 원칙은 풀타임으로 복음 사역에 힘쓰는 사역자들을 교회가 그 생활을 지지하는 것이 마땅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5:17-18절의 맥락과 이를 연결시키면 결국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에 대한 교회의지지 책임이 시사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사역자 자신은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딤전 3:3),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여야” 하며(딛 1:7), 목회 사역을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아야” 한다(벧전 5:2). 그러나 교회로서는 그들의 생활을 지지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상의 성경적인 예를 잘 종합하면 헌상된 재물은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과 교회들을 평균케 하는 데 상당 부분 사용되어야 하며, 복음 사역을 효과적으로 하도록 전도자들과 해외 선교 사역을 돕고 그 사역자들을 생활을 지지하며, 목회를 담당하는 복음 사역자들의 삶을 지지하는 데 대부분 사용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일년 3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도록 하던 구약의 예를 들어서 요약하자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신 그 하나님 백성의 사명을 잘 의식하도록 하고 유지시키며 그 사명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헌상된 것들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년 3차례 예루살렘 방문은 그저 순례적 성격을 가진 것이나 그 자체가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구약 백성을 하나님 백성으로 세우신 그 성격을 상기하고 유지시키며, 실제로 그 성격을 드러내는 가장 기본적인 기초를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구약의 하나님 백성의 모습은 이런 절기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왜 이렇게 독특한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주께서 의도하신 바를 이 세상 가운데서 드러내는데 열심 있는 하나님의 친 백성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주께서 우리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시고 세우셔서 하도록 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헌상하는 것이므로 항상 주께서 우리를 불러 주의 백성으로 세우신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헌상된 재물이 교회의 구체적 교제(구제)에 사용되는 것에 힘쓰며, 복음이 온 세상에 효과적으로 전파되도록 하는 일에 힘쓰고, 각교회에서 목회를 담당하시는 분들의 생활을 잘 지지해서 그들이 다른 염려 없이 목회하며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여 주께서 교회를 세우신 뜻을 잘 드러내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이런 성경적 이상과 우리의 현실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요점을 생각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건물을 치장하고 유지하는 일에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돈이 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건물이 예배와 교육과 교제를 위해 필요할 수 있으나 이것이 너무 나도 많은 헌상된 재물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특히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 할 구제와 선교, 교육과 전도의 일은 못하면서 이 부분에 너무 많은 재화가 사용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사역자들을 잘 선정해서 그들의 삶을 잘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지지하지 않아도 되는 봉사자들이 교회에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로 자발적으로 섬겨야 할 일에 대해 교회가 경제적으로 지지하도록 하는 일이 줄어야 할 것이다. 대신에 교회에서는 전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사역하는 분들의 삶으리 잘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성경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생활 지지를 교회가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안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 교회에서 나온 지혜를 종합하여 가장 바람직한 방안을 제시한다면 다음 두 가지를 유념하면 좋을 것이다: (a) 사역자들의 사례는 그 교회 교우들의 중간 정도의 사례가 적당하다. (b) 여러 사역자들의 사례의 정도는 기본적으로 부양 가족에 비례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다.



V. 결론: 우리의 헌상이 진정한 헌상이 되기 위해서



이제까지 우리는 헌상이 과연 어떤 것이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문제는 이런 의식에 충실하게 매 주일 주께 헌상하는 일이다. 그것을 제대로 감당할 때 우리는 매 주일의 헌상 예식만을 바르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도 주께 헌상한 자답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헌상한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더 온전히 순종하여 나갈 것이다. 주께서 저들의 삶은 책임져 주시고 친히 인도하여 가시는 삶의 실재를 경험하며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렇게 온전히 헌상하는 이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헌상의 된 의미를 더 풍성히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혹시 부분적으로 오해하는 부분이 있었을지라도 날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헌상의 이해에로 나아가서 복 받는 대가나 수단으로 헌금을 생각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헌상한 것과 나머지 부분에 대한 오해도 하지 않고 헌상과 삶의 관계도 잘 정돈하여 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진정 헌상하여 가는 이들은 날마다 교회아(敎會我) 의식도 풍성해져 가서 교회가 주께 받은 사명을 수행해 가는 것에 대한 한 지체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날마다 그 인격이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진전해 가고, 모든 판단과 해 나가는 일이 주님의 뜻에 점점 더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가는 데서 자신이 진정 헌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우리 모두와 우리가 속한 각 지교회들이 이런 의미의 헌상을 하여 갈 수 있기 원한다.



예배 순서 가운데 헌상(獻上) 순서가 있어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헌상하는 일은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이번 헌상의 보편화와 함께 헌상에 대한 오해도 우리 주변에 난무(亂舞)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에 대해 성경 신학적 고찰을 하여 우리의 목회가 진정 성경에 근거한 바른 목회가 되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 헌상을 다시 생각하여 바르고 성경적인 헌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의 삶과 특히 교회가 성경적 모습을 가져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기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용어에 대한 정리를 하고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 교회 안에서는 예배 중에 하나님께 헌상하여 드리는 순서를 흔히 ‘헌금’(獻金)이라고 불러 왔다. 좋은 용어이지만 이를 오해하면 돈이나 재물만을 드리는 순서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므로 헌금이라는 용어는 이제 우리가 밝히려고 하는 폭 넓고 바른 의미의 헌상이 가진 풍성한 뜻을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헌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또한 연보(捐補)라는 용어도 사용되는데, 이것도 의연금(義捐金) 같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연금(捐金)이라는 뜻을 전달하므로 헌상 되어진 것의 사용에 대한 한 성격에 대해서는 좋은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우리의 헌상의 폭넓은 의미를 다 드러내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이런 뜻에서 진정 성경적 헌상의 의미를 잘 드러내면서 가르쳐 오신 김홍전 목사님의 용어인 ‘헌상’(獻上)을 채용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이는 ‘위로 헌신하여 드림’, ‘바치어 올려 드림’이라는 뜻을 지닌 용어로 결국 헌상의 대상이 우리 자신임을 잘 드러내고 있는 좋은 용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헌상’ 이라는 용어가 이후에 설명할 모든 의미를 잘 포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용어라고 생각되어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헌상에 관한 이 논의를 하기로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용어는 우리 말 성경에 “연보”라고 번역된 말의 헬라어인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이다. 이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교제”라는 말인데 성경에서는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이 용어를 써서 사용하고 있다(고후 8:4; 9:13; 롬 15:26). 헌상은 성도들 사의의 구체적인 교제의 표현의 하나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생각하면 그것은 또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과 은혜를 받은 우리의 교제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헌상은 또한 넓은 의미의 “코이노니아”, 즉 교제라는 것이 성경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제(코이노니아)로서의 헌상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성경이 말하는 다른 용어인 성도들에 대한 “섬김”(διακονία)이기도 하다(행 11:29, 30, 고후 8:4; 9: 1, 12, 13). 그러나 용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헌금’이라고 하든지 ‘연보’라고 하든지 그러한 전통적 용어 사용에 친숙한 분들은 전통적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교제(κοινωνία)와 섬김(διακονία)의 의미를 지닌 헌상으로 생각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자신들을 헌상할 수 있기 원한다.



I. 헌상이란 무엇인가?



헌상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개념 정의와 함께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이다. 무엇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일단 그것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들을 열거하고 그런 것이 아님을 생각하여 부정적 뉴앙스를 제거하는 작업을 통하고, 그와 함께 헌상의 의미를 찾아서 긍정적 뉘앙스를 제시하는 것이 매우 좋은 탐구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헌상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열거하고 부인하는 일을 하여 보기로 하자.



1. 헌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1-1. 헌상은 죄 씻어 주신 것을 보상하기 위한 대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헌상에는 주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구속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헌상은 구속받은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헌상이 죄 씻음에 대한 대가일 수는 없다. 우리가 헌상하는 그것으로 주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상을 함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갚는다는 어리석고도 얄팍한 생각을 다 버려야만 한다. 우리가 후에 드러내려고 하는 헌상의 장중한 의미를 생각할 때 헌상을 구속의 대가로 생각한다는 발상 자체가 있을 수 없고 한심한 것이다.

더구나 헌상은 이 세상적 의미에서 복 받은 대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렇게 잘해 주셨으니 우리가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드린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있을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런 생각은 사실상 아주 주제넘은 어리석은 생각임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을 우리가 대가를 주고 갚는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후에 생각할 헌상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드리고 나 자신을 드리고 나의 일생 전부를 모두 다 주께 드린다고 해도 그것으로서도 부족하다는 심령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신 것에 대가를 주어 갚는다는 의미로 헌상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1-2. 헌상은 영적인 복을 얻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돈을 드려서 영적인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 이는 그 돈과 함께 망하리라는 것을 강하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헌상도 영적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드리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헌상은 더구나 이 세상적 의미의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돈을 많이 내는 이에게 이 세상적인 복을 더 주시고, 적게 내는 이에게 복을 덜 주고 하는 이 세상적인 신이 아니시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은 돈보고 무엇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헌상은 무엇을 얻기 위해 드시는 수단과 도구가 아닌 것이다.

1-3. 따라서 헌상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성경 구절은 이런 사람들에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아이러니칼하게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산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生畜)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편 50: 9-13).



이는 구약 시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과 염소와 황소로 제사드릴 것을 명하셨던 시대에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 때에라도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제사를 요구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이 말씀의 뜻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만 한다. 사실 그 제물은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심지어 구약에 요구된 십일조와 헌물들도 결국 잘 따져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제대로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결코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주 강한 표현까지를 동원하신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하나님께서 주리실리가 없다. 또한 하나님이 주리셔도 그 분이 짐승과 생축과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들을 잡아드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표현하신 것은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를 깨우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헌상하라고 하신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히 깨우침 받을 수 있다.

1-4. 헌상은 나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헌상은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여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런 저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식의 발상 자체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1-5. 헌상은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와 연관해서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곤 하는 다음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라 보라(말 3:10).



이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으로 이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행하여 자신들의 존재하는 이유와 사명을 다 행해야 할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우심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말씀을 진정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며 말씀을 이해하는 수준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1-6. 헌상은 나의 것 중 일부만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전체적 사상에 의하면 헌상된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열매를 주께 드리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수확하면 첫 열매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고, 제사장은 그것은 흔들어서 하나님께 드린다[搖祭]. 그것은 밭에 있는 나머지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며, 이것을 그 전체의 대표로 주께 드린다는 의미이지, 첫 열매만을 주께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자기겠다는 태도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나머지를 가지고 살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을 잘 드러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헌상할 때에도 헌상한 그것만을 주께 드리는 것이고, 나머지는 거룩하지 않은 것이라거나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의 사고는 나머지를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여 갈 때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면제하는 심리적 면책 의식을 낳는 잘못된 기제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상된 것 일부만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나머지는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1-7. 헌상은 자신의 부족한 삶을 보충하여 하나님의 애호를 받기 위해 드리는 수단이 아니다. 다른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할 때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헌상이 아니다.

1-8. 헌상은 교회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영향을 더 하게 하도록 하기 드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교회에서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 것을 의식하는 이들을 죽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헌상의 자시 과시적 성격이나 다른 목적으로의 전용을 경멸하신다.



이와 같이 수많은 잘못된 생각이 열거된 것은 그런 의미로 드려지는 헌금이 이 세상에 실로 무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것들이 헌상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자행(恣行)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례하고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인가? 헌상이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 결코 아니라면 과연 헌상은 무엇인가?



2. 헌상은 구속받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상징적 행위이다.



2-1. 헌상에서 드려지는 것은 재화나 다른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나 자신’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일으킴을 받은 나 자신을 구속하여 주신 주님께 다시 드리는 일이 헌상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만이 헌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헌상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헌상을 할 수 없고 혹시 헌상 예식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헌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가치하지만 주께서 불쌍히 여겨 구속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이제는 온전히 주께 속한 삶으로서 온전히 주께서 주관하시는 가운데 자신들을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데 드리며 살겠다는 마음을 다 담아서 헌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헌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한 헌상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헌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속사적인 일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공동체와 구속사의 진행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구속사에 속한 일원으로 인정하면서 드리는 것이 헌상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리는 의미가 헌상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헌상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한 헌신(獻身)이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인 진행에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서 온전히 드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헌신이 없는 헌상은 헌상이 아니다. 온전하지 않은 헌신도 헌상이 못된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성경에서는 흠 없는 것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받지 않으신다.

2-2.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흠이 있는 존재인데, 우리는 어떻게 주께 헌상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항상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 제사에 의존하여 성령님 안에서 드리는 헌상만이 헌상이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께 의존해서 우리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성령님의 온전하신 인도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히 주께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전히 성령님께 의존하는 우리의 헌상은 영적의 일(신령한 일)이기도 하다.

2-3.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의 공로 없이는 헌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구속에 근거해서만 헌상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드린 헌상은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온전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항상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없이는 헌상이 없다. 그러므로 헌상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성령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님께 둘러싸여진 우리를 기꺼이 받으시는 삼위일체적인 사건이다.

2-4. 헌상에서 드려지는 나 자신은 매일 매일의 삶과 그것이 합하여 이루는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뜻의 진전과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드리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헌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헌상은 헌상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있는 헌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왜 드리는 지도 모르고, 또는 헌상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무조건 많이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께 의존해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헌상한 자답게 사는 일이다. 따라서 헌상 예식 때 드린 것은 이렇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받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면서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노력과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주께서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헌상 된 것이 주께 의미 있으려면,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쓰고 하는 것도 이렇게 주께 드려지는 것으로서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마치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매일 진설병을 하나님 앞에 진설하여 놓는 것과 같다. 우리는 매일을 주 앞에 드려진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인생의 행보를 걸어 나가며,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님의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삶과 연관된 헌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헌상은 우리의 삶과 함께 다시 한 번 더 신령한 일이다.

2-4. 그러므로 삶과 분리된 헌상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며, 그런 헌상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상에 있어서는 돈을 얼마나 많이 드리는 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헌상의 의미에 충실하게 나 자신을 주께 드렸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 가려고 하시는 바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결적인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들답게 하나님의 뜻의 수행을 위해서 자신을 드려 주님의 뜻을 수행하며, 재화를 드려 그런 일이 잘 수행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헌상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의 헌상은 삶과 관련된 헌상이어야 한다.

2-5. 헌상은 주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나 또한 주께서 우리를 받으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은혜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헌상을 그저 감사의 표현으로만 여겨서는 안되고, 그렇게 우리의 존재와 삶을 주의 것으로 받으셔서 주께서 당신님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그야 말로 황송하고 은혜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상을 하면서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 한다는 의식이 있어서는 안되고,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주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여 살게 하시는 것을 황송하게 여기며 은혜롭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헌상하는 사람은 그렇게 헌상할 수 있는 것을 은혜로 여기는 사람이다.



3. 헌상은 교회의 지체인 우리를 함께 주께 올려 드리는 상징적 행위이다.

헌상은 결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다. 헌상은 교회의 공동체적 행위이다. 헌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그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주께 드려 주께서 시키시는 일을 다 수행하겠다고 드리는 행위이다. 이 교회가 주께서 불러 시키시는 일을 잘 감당하도록 주의 뜻을 깨닫고 그 깨달은 주의 뜻에 온 교회를 온전히 바쳐 드리는 행위이다. 헌상은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 자체를 위한 것도 우리들 자신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드러내는 교회의 각성과 의식의 표현이다. 따라서 개개인들은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그 일원으로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주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해 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그 교회의 일부로 주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상은 교회적인 일이다. 개인적으로 헌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상은 항상 교회의 예배 중에 그 온전한 교회적 의미를 다 담아서 주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교우들이 다 참여해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 교회적 행위에서 빠지는 것을 있을 수 없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잘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교회가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각 몸의 각 지체가 자신의 몫을 주께 드리는 공동체적 행사가 예배 중에 드리는 헌상이다. 따라서 다음절에서는 헌상과 예배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II. 헌상과 예배



1.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헌상

헌상은 예배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지교회(肢敎會)가 모여 하나님의 뜻을 기리고 찬송하며 하나님께 그 영혼의 무릎을 끓어 절하는 공동체적 경배의 여러 요소 가운데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결단하는 순서가 있는 동시에 그렇게 배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우리 자신을 공동체로 주께 드리는 행위가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가 예배 중에 드리는 헌상에는 첫째로 우리의 한 주간 동안의 삶을 구속받아 주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로서의 삶으로 인정하고 온전히 주께 드린다는 복음에 대한 온전한 신앙 고백(confession of faith)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둘째로 헌상에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의존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에 우리의 힘써 노력하여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 때문에 흠과 죄가 많음을 인정하는 죄고백(confession of sins) 행위이다. 이 죄 고백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속에 공로에 기대는 것이며 성령님께서 그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온전히 적용하여 주시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로 하나님께 감히 접근하게 하시는 “시은소”(施恩所, mercy-seat)이다. 따라서 우리는 헌상하면서 자만한 마음으로 할 수 없다. 자족하여 스스로 설 수 있는 마음으로 하는 헌상이나,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하는 헌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헌상은 항상 우리 자신의 부족과 잘못과 연약함과 힘없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로 이제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어서 우리 자신을 주께서 부탁하시는 일에 온전히 드리겠다는 헌신(commission)의 다짐으로 헌상하는 것이다. 주께로부터 오는 용서에 힘입어서 이전보다 더 온전히 뜻을 깨달아서 주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들을 드려 나가겠다는 헌신의 재다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모든 교회의 지체와 함께 고백하는 것이므로 헌상은 예배 중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는 헌상이 복음 사건의 결과를 드리는 것이란 의미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이 산출해낸 공동체가 그 전체를 주께 드리는 것임을 말하기에 구속받은 공동체 전체의 경배 가운데서 나타나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헌상 예식은 그것의 참된 의미에 근거해 생각해 볼 때에 교회 공동체의 경배의 가장 상징적인 행위요 경배 전체를 요약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경배는 구속받은 공동체가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며 하나님께 자신들은 온전히 드리는 일인데, 헌상에서는 이렇게 구속받은 우리들을 온전히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헌상 예식은 예배의 꽃이요 면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돈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고, 헌상의 진정한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자신을 온전히 구속된 자로서 주께 드린다는 의미가 가장 잘 요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헌상 예식이다. 물론 우리는 찬송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여 주님의 뜻을 수행하여 살게 하심 주님의 크시고 기이한 일을 찬양 드린다. 우리는 또한 기도 가운데서 그 일에 대한 감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있게 풀어 설명하고 그 설명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에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 하는 일에서도 역시 같은 것이 나타난다. 그런데 헌상 예식에는 온전히 구속된 자들로서 자신들을 주께 드리고 주님의 처분을 받기를 원하는 예배의 의미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2. 예배 때마다 헌상해야 하는가?

이렇게 예배와 헌상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과연 예배 때마다 헌상 예식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과거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에서는 그런 점을 강조해서 공예배로 모일 때마다 헌상을 했었고 그것이 예배 순서 중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예배로 모일 때마다의 모습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예배가 아닌 시간에, 예를 들어서 기도회 시간에나 구역 모임을 하는 시간에 헌금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예배 중에 헌상하는 것이 한 주간 동안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 전체를 다 담아 하는 것이라는 이제까지의 설명을 생각한다면 공예배라고 해도 그 모든 예배 때마다 헌상 예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일 주일에 한번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헌상 예식을 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 그 의미를 더 잘 드러내는 순서로 의미가 있으리라고 판단된다. (1) 혹시 이것을 위한 성경적 근거를 굳이 말하자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를 말하는 중에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주해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것에서 아주 명확한 성경적 근거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바울은 “매 주일 첫날에(κατὰ μίαν σαββάτου)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라고 한다(고전 16:2). 이 말은 각 사람이 매주 첫날에 각자의 집에 저축하여 두었다가 후에 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크리소스톰 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a) 바울이 굳이 “매주일 첫날에”(κατὰ μίαν σαββάτου)라고 하여 사도행전 20:7이나 요한 계시록 1:10과 연관될 수 있는 매주 첫 날의 예배를 상기시키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날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모여 성찬 등을 나누던 날이었음을 생각 할 때, 그리고 (b) 그 뒤에 나오는 “내가 갈 때에 연보하지 않게 하라”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매주일에 헌상을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리스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 (여기서) 예배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아마도 예배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더구나 2세기에는 분명히 교회가 매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중에 헌상하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3) 우리가 주일 아침 예배 때에 위에서 말한 온전한 의미를 다 담아서 헌상하였다면 그 헌상 예식 속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다 포괄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녁 예배 시간은 성찬 예배를 드린 경우에 성찬 감사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이, 아침 예배 때에 주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아 주셨고, 또한 더불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 예배로 드리는 것이 더 좋으리라고 여겨진다. 감사를 표현하는 예배를 드리는 이 때에 굳이 또 헌상 예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주일 저녁이나 오후 예배 시간이 흔히 이루어지는 각 기관이나 전도회 헌신 예배와 그와 관련된 헌금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예배는 그 자체가 헌신의 행위이다. 따라서 헌신 예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지를 주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그런 시간에 따로 헌금 순서가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헌상의 진정한 의미를 손상시키고 오해할 수 있는 여지는 주는 것이 될 것이다.



3. 헌상과 관련된 순서의 진행 방안 제시

예배 중에 헌상을 할 때 정확히 어떻게 하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헌상에 대한 성경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건강한 시대의 교회가 헌상 예식을 하는 것에 비추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헌상 예식 순서를 제안 해 볼 수 있다.

헌상은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일 주간의 삶을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 자체가 헌상이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 전에 자신의 삶을 잘 살펴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산 삶을 주님께 다른 성도들과 함께 교회로서 드리려는 준비를 하게 된다. 주일 전날인 토요일에 이렇게 준비하여 주일 하루 종일을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봉사하는 일에 드리도록 잘 준비하는 것이 헌상의 준비가 된다.

주일 아침 예배 처소에 모이면서 각자 준비한 헌금을 헌금함에 넣는 것으로 헌상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여러 방법 가운데서 이것이 가장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헌상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되면 성도들이 예배 시작 전에 모이면서 이미 각각을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함께 드리는 예배를 준비하게 된다.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각각이 모여서 하나로 주께 드릴 준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배를 드리면서 경배 순서 중에 정한 헌상 시간이 되었을 때 모든 성도들이 헌상송(獻上頌)을 올려 드리는 것으로서 헌상 예식이 시작된다. 우리들은 부족하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 우리를 주께 드리오니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용을 담은 헌상송을 온 교회가 하나로 주께 드리는 것이다. 헌상송이 끝날 때 집사 님들 가운데서 맡은이들은 온 교회를 대표해서 헌상을 주께 드리는 봉헌을 하는 순서를 가지는 것이 좋다. 봉헌과 함께 예배 인도자가 온 교회를 대표해서 주께서 우리의 헌상을 받아 주셔서 주의 뜻을 위해 온 교회를 사용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는 헌상 기도를 드림으로 (또는 헌상 기도 후에 헌상송을 하나 더 부름으로) 헌상 예식이 마쳐지게 된다. 이렇데 헌상송이나 봉헌 순서나 헌상 기도 모두에서 하나님께 온 교회를 드리니 주께서 교회를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만이 전체의 주조(主調)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진전이 우리의 헌상 예식을 주관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헌상 기도 중에 헌상한 자들을 높이는 말이나 시사가 있거나, 헌상한 자들에게 복 내려 주시기를 위한 어구가 있을 때 우리들이 헌상의 본래적인 목적을 오해할 위험이 많으므로 그런 것을 제외하는 것이 좋다. 또한 헌상 시간 중에 헌상한 분들을 일일이 호명하는 것도 헌상의 본래적 의미를 손상시킬 수 있으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III.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1. 신약의 헌상에 대한 교훈

신약 시대에는 어떤 명확힌 기준을 제시하여 우리에게 그에 따라서 헌상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신약 시대에는 헌상과 관련한 정신을 좀더 강조하고 있다. 그 정신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1.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다(고후 9:7). 그리고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ὅ τι ἐὰν εὐοδώται)하는 것이다(고전 16:2), 즉 “각각 그 힘대로” 하는 것이다(행 11:29). 이와 같은 말들이 신약에서 성도들이 얼마나 헌상해야 하느냐를 가장 잘 규정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각자가 정해서 헌상할 때 유념해야 할 세 가지 말씀을 덧붙여 주고 있다:



(1)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후 9:7).

(2) 억지로 하지 말라(고후 9:7).

(3)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각자가 알아서 정한대로 헌상한다고 할 때 부패한 인간성이 구속받은 성도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면 어떤 결과가 드러나게 되는지를 바울 사도는 잘 알고 있기에 이런 부패한 인간성의 작용을 염두에 두면서 바울은 인색함으로 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체면치레로나 다른 이유 때문에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바울은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고 말하고 있다. 성도들이 각자의 힘과 원하는 바에 따라서 준비하여 헌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각 사람의 양심에 따라 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그런 식으로 하되 참으로 즐겨 내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발적 행동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헌상의 정도에 대한 큰 원칙이다. 즉, 헌상에는 그 어떤 강제도 있어서는 안되고, 원칙상 각자의 능력과 원함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1-2.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마음이 보물이 있는 곳에 있다고 하셨으니, 이는 우리의 마음을 기울여서 우리의 마음이 다 가게끔 헌상해야 할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씀의 보다 근본적인 뜻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어서 하늘에 속한 것을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또한 우리가 헌상할 때 마음을 기울여서 그만큼 헌상해야 할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1-3. 이렇게 온 마음을 다 기울여서 하는 헌상의 대표적인 예로 주께서는 과부가 헌상한 두 렙돈을 들어 설명하시고 있다(눅 21:1-4). 이 교훈은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과 과부의 두 렙돈 넣는 장면의 비교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교훈은 동시에 두 가지 교훈을 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하나님 앞에서는 헌금의 다과(多寡)가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주께서 보시기에도 부자들은 많이 헌금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적게 헌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든지 진정으로 헌금하는 한(限), 누가 많이 하고 누가 적게 하는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부자가 진정으로 헌상한다면 그는 자신이 많이 헌상하는 것이라는 의식을 도무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상대적으로 많이 헌상한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늘 부족하게 바치고 있다고 느낄 것이며, 하나님께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들 다 드려도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헌금의 다과(多寡)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다과로 사람을 취하시지도 않으신다. 따라서 헌금 양의 다과는 하나님께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그러나 동시에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주님의 평가는 이런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4). 그러므로 주님의 시각에서는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 21:3)라고 판단하실 수 있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바 생활비 전부를 헌상해야 한다든지, 그런 절대적인 의미에서 누구보다 많이 헌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주께서 다른 곳에서 가르치신 마음을 다 하여, 마음이 기울어질 정도로 하는 것의 의미를 주께서 의미 있게 보신다는 것을 보충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어떤 구체적인 지침을 주지 않았어도 이렇게 헌상하는 정신을 규제하는 말씀들에 근거해서 우리가 각기 정한대로 하되 인색하게 하지말고 마음을 기울여서 전부를 넣는 심정으로 즐겨 헌상하며, 결코 억지로 헌상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즐겨 헌상하는 것이다.



2. 헌상한 돈과 헌상된 삶의 문제

다시 강조하지만, 헌상한 돈만이 주께 드려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재산, 건강,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헌상한 사람은 나머지 돈을 사용할 때에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주님께로부터 그 재물의 사용을 담당하는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목적이 사는 방향이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런 자답게 재물을 사용해서 건강도 유지하고 식물로 먹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번 것으로 우리가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날마다 우리의 쓸 것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먹고 입고 살아간다는 의식이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의식이 헌상에서 표현되는 것이며, 헌상한 것이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라는 것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삶과 사명 수행을 하고서 여유가 있는 재물이 있으면 주변에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청지기로서 의미 있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사용하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 특히 구제하는 일에 신경 써서 우리가 풍족하게 받아 누리는데 우리 주변에 굶주려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다 누리는 것을 오직 우리만 받아 누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많은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받아 누리는 일을 실천해 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 헌상한 이다운 삶의 방식이다.



IV. 교회의 헌상 관리와 사용의 문제



1. 바람직한 헌상 관리 방법

성도들이 자신 전체를 드리는 것을 대표하여 드린 헌상된 물질을 관리하는 일에서 교회는 매우 심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일단 이 헌상을 관리하는 일은 성경적으로 집사님들 고유의 일이다. 재정 출납을 집사님들이 감당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을 감당한 집사님들 이 신중하게 드려진 물질을 관리해야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누가 얼마를 드렸는지를 알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누구에게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연말 정산에서 기부금에 대한 증빙 서류를 갖추는 목적이 없는 한(限) 재정 담당 집사님들조차도 누가 얼마를 드렸는지를 알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개발하는 것이 최선이다. 혹시 연말 정산과 관련해서도 그런 의식과 비밀 유지 중심의 관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의 재정 관리에서의 큰 원칙은 비밀성과 정직성이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에 이 두 가지 원칙이 잘 보장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헌상한 것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는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헌상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음절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2. 헌상된 재물의 이상적인 사용

신약 성경에서는 헌상된 재물이 일차적으로 구제와 복음 전도에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있다. 아직 복잡하게 제도화되지 않은 처음 교회의 이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주요한 시사를 준다.

(1) 처음 교회는 교회 안의 과부와 같이 가난하고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없는 이들을 돕고 그들의 생활을 지지하는 데 우선적으로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6장은 과부들에 대한 구제가 사건의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고, 2장에서도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것을 공동체의 목적을 따라 사용하도록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 2:45)라고 명시하고 있다. 자발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헌상된 물질이 각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서 교회의 직임자들에 의해서, 특히 집사님들에 의해서 공급된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은 교회가 수행해야할 본질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과부나 가난한 이들을 모두 교회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5:16)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구제는 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한 지역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지역의 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돕는 일을 신약 성경은 자주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대 지역이 크게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안디옥 교회는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扶助)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9-30)고 했으며,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오니라”(행 12:25)라고 했다. 이방의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대 교회의 어려움에 구제하는 일을 각 기 그 힘대로 실행한 것이다.

이는 후에 바울의 전도 여행 기간에도 여러 번 있게 된 일이었고, 바울은 이런 활동을 격려하는 일을 자주 하였다.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16:1-4에서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매 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자신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에 소위 특별 헌금을 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면서 성도들이 이렇게 모은 것을 성도들을 위한 “연보”(ἡ λογεία εἰς τοὺς ἁγίους = the collection for the saints, 1, 2절), 또는 “은혜”(χάρις, 3절), 즉 자비로운 선물(a gift of kindness or of generosity)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의 어려움 당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가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위한 것임은 고리도전서 16:3에 언급되어져 있다. 이것이 그 곳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임은 고린도후서 8:13; 9:9, 12에 시사되어졌고 로마서 15:26에서 아주 명백히 언급되고 있다.

또한 고린도후서 8장-9장에서는 고린도를 포함한 아가야 지역의 교회와 마케도니아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를 위한 섬김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구제를 위한 헌금을 “성도들을 위한 연보”(λογεία εἰς τοὺς ἁγίους, 1, 2절), 또한 “교제”(κοινωνία, 8:4; 9:13), 은혜(χάρις, 8:4)와 섬김(διακονία, 8:4; 9:1, 12, 13)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면서 이 모든 것은 서로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고 하여 헌상이 교회와 교회 사이의 평균케 하는데 사용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것은 로마서 15:25-27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쁘게 얼마를 동정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또한 사도행전 24:17도 참조하라). 이와 같은 교회간의 구제는 그 자체로도 의미 있을 뿐만이 아니라, 특별히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이들이 많고 그의 사역의 결과로 세워진 교회들이 그런 구제를 모아 보낸다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진다. 자신을 미워하고 의심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교회적인 유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이런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이와 같이 성경의 가장 많은 부분에서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간의 성도를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헌상된 재물이 사용되었고, 또 그런 목적을 위해 헌상되어야 할 것이 언급되어져 있다.

(2) 이 보다 적게 언급된 것은 바울이나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위해 여러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나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냐?”고 한다(고후 11:8).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고후 11:9)고 말한다. 즉, 마케도니아와 다른 여러 교회들이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운 것이다. 복음이 온 세상에 효과적으로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은혜를 먼저 받은 교회가 선교 사역에 힘쓰는 사역자를 경제적으로 지지하는데 헌상된 재물과 개인적 도움과 교제인 연보가 사용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또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바울을 후원한 유일한 교회였다(빌 4:15). 또한 그들은 바울이 데살로니아에서 사역할 때에도 여러 번 선교 헌금을 보내었다(빌 4:16). 또한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위해서도 늘 생각하던 후원을 실행하고 아마도 에바브로 디도를 통해 전달한 것에(빌 4:18) 대해서 바울은 기쁨과 칭찬의 마음을 가지고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 4:10). 물론 이런 선교 헌금에 대해서 바울이 칭찬할 때 그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그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빌 4:11)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라는 것을 강조한다(빌 4:17). 그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빌 4:18). 그는 또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빌 4:11). 즉,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 배고품과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것이다(빌 4:12).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주장한다(빌 4:13) 그러므로 이 말씀은 흔히 오용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끔을 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나 적극적 사고 방식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든지 자족하며 주께서 주신 한도 내에서 울에게 맡겨 주신 것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말이며, 풍부 가운데서도 주께서 주신 일을 수행한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빌립보 교회가 선교 사역을 하는 바울을 돕는 것은 그의 괴로움에 동참하는 교제의 한 부분이며, 귀하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온 세상에 알게 하여 많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 안에로 데리고 들어오는 선교 사역을 위해 교회의 헌상과 개인의 기금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3) 물론 이와 같은 도움을 받을 때 바울 등의 사도들은 매우 조심해서 자신이 지금 사역하고 있는 해당 교회로부터는 도움을 될 수 있는 대로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 중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한 것이다(살전 2:9, 고후 11:9). 그래서 고린도에서도 바울은 장막 깁는 일을 하였고(행 18:3),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밤낮으로 일하면서 ......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살전 2:9).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 자신의 손으로 자신과 동행들의 쓴 것을 감당하였다(행 20:33, 34). 그가 그렇게 한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 그러나 그는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소위 목회 사역자가 교회의 지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원칙을 천명하는 일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고후 9:4) “우리가 ......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후 9:5)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후 9:6)는 수사의문문을 제시하면서,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고 하면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기록한 신명기 25:4의 말씀을 인용하고 또한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후 9:13)고 구약의 제도까지를 인용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원칙을 재천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히 한다: “이것을 쓰는 것은 내가 이 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고후 9:15). 그러나 원칙은 풀타임으로 복음 사역에 힘쓰는 사역자들을 교회가 그 생활을 지지하는 것이 마땅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5:17-18절의 맥락과 이를 연결시키면 결국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에 대한 교회의지지 책임이 시사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사역자 자신은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딤전 3:3),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여야” 하며(딛 1:7), 목회 사역을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아야” 한다(벧전 5:2). 그러나 교회로서는 그들의 생활을 지지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상의 성경적인 예를 잘 종합하면 헌상된 재물은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과 교회들을 평균케 하는 데 상당 부분 사용되어야 하며, 복음 사역을 효과적으로 하도록 전도자들과 해외 선교 사역을 돕고 그 사역자들을 생활을 지지하며, 목회를 담당하는 복음 사역자들의 삶을 지지하는 데 대부분 사용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일년 3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도록 하던 구약의 예를 들어서 요약하자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신 그 하나님 백성의 사명을 잘 의식하도록 하고 유지시키며 그 사명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헌상된 것들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년 3차례 예루살렘 방문은 그저 순례적 성격을 가진 것이나 그 자체가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구약 백성을 하나님 백성으로 세우신 그 성격을 상기하고 유지시키며, 실제로 그 성격을 드러내는 가장 기본적인 기초를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구약의 하나님 백성의 모습은 이런 절기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왜 이렇게 독특한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주께서 의도하신 바를 이 세상 가운데서 드러내는데 열심 있는 하나님의 친 백성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주께서 우리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시고 세우셔서 하도록 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헌상하는 것이므로 항상 주께서 우리를 불러 주의 백성으로 세우신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헌상된 재물이 교회의 구체적 교제(구제)에 사용되는 것에 힘쓰며, 복음이 온 세상에 효과적으로 전파되도록 하는 일에 힘쓰고, 각교회에서 목회를 담당하시는 분들의 생활을 잘 지지해서 그들이 다른 염려 없이 목회하며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여 주께서 교회를 세우신 뜻을 잘 드러내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이런 성경적 이상과 우리의 현실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요점을 생각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건물을 치장하고 유지하는 일에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돈이 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건물이 예배와 교육과 교제를 위해 필요할 수 있으나 이것이 너무 나도 많은 헌상된 재물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특히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 할 구제와 선교, 교육과 전도의 일은 못하면서 이 부분에 너무 많은 재화가 사용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사역자들을 잘 선정해서 그들의 삶을 잘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지지하지 않아도 되는 봉사자들이 교회에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로 자발적으로 섬겨야 할 일에 대해 교회가 경제적으로 지지하도록 하는 일이 줄어야 할 것이다. 대신에 교회에서는 전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사역하는 분들의 삶으리 잘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성경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생활 지지를 교회가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안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 교회에서 나온 지혜를 종합하여 가장 바람직한 방안을 제시한다면 다음 두 가지를 유념하면 좋을 것이다: (a) 사역자들의 사례는 그 교회 교우들의 중간 정도의 사례가 적당하다. (b) 여러 사역자들의 사례의 정도는 기본적으로 부양 가족에 비례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다.



V. 결론: 우리의 헌상이 진정한 헌상이 되기 위해서



이제까지 우리는 헌상이 과연 어떤 것이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문제는 이런 의식에 충실하게 매 주일 주께 헌상하는 일이다. 그것을 제대로 감당할 때 우리는 매 주일의 헌상 예식만을 바르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도 주께 헌상한 자답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헌상한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더 온전히 순종하여 나갈 것이다. 주께서 저들의 삶은 책임져 주시고 친히 인도하여 가시는 삶의 실재를 경험하며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렇게 온전히 헌상하는 이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헌상의 된 의미를 더 풍성히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혹시 부분적으로 오해하는 부분이 있었을지라도 날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헌상의 이해에로 나아가서 복 받는 대가나 수단으로 헌금을 생각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헌상한 것과 나머지 부분에 대한 오해도 하지 않고 헌상과 삶의 관계도 잘 정돈하여 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진정 헌상하여 가는 이들은 날마다 교회아(敎會我) 의식도 풍성해져 가서 교회가 주께 받은 사명을 수행해 가는 것에 대한 한 지체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날마다 그 인격이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진전해 가고, 모든 판단과 해 나가는 일이 주님의 뜻에 점점 더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가는 데서 자신이 진정 헌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우리 모두와 우리가 속한 각 지교회들이 이런 의미의 헌상을 하여 갈 수 있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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