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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1:1-11
강설날짜 2017-06-18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서 여리고에 도착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이 두 맹인을 고치신 사건을 우리는 저번주에 강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 강설의 제목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였습니다. 두 맹인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쳐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신체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자들이었고, 구걸해서 생활해야 하는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곁에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조용히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두 맹인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이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신 이유를 섬김을 통하여 구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임을 드러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두 맹인은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두 맹인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눈 뜨기만을 간구했습니다. 이것을 마태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영적인 눈이 뜨이는 것으로 기록을 합니다. 바로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두 맹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진성한 섬김으로 두 맹인의 영적인 눈이 뜨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은혜의 방도인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눈이 뜨이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대와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종교적 삶과 메시야적 기대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자들도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할 정도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승리의 왕, 만국을 다스리는 통치의 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두 맹인을 ‘여리고’에서 고치신 후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으로 지상 생활에서 마지막 한 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남은 시간에 주님은 고난을 더욱 감당하시고 결국에는 당신님의 모든 것도 하나님에게 부탁하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런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목적을 모두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첫 구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하신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드디어 예루살렘에서 대략 1.6키로미터 거리에 있는 ‘벳바게’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벳바게’는 정확한 위치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감람산 동쪽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측합니다. 감람산은 올리브 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감람산은 슥14:4절을 보시면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지척에 두고서 2절을 보시면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단순한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무조건 매인 나귀와 새끼를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염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절에서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예수님은 이미 나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주인의 마음을 준비해 둔 것입니다. 그래서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에 아무런 조건 없이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마음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친히 다 이루시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4절을 보시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것이 증거입니다.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까? 5절을 보시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상반절은 사62:11절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태는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전 500년 전에 활동하던 스가랴 선지자가 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을 인용하여 유대인에게 명확히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메시야는 특이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것이다. 어떻게 입성하는 것입니까? 스가랴서의 말씀에 나귀를 타고 들어간다는 것을 마태는 유대인들이 기억하도록 확인해 준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기록한 마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허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가랴와 학개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같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을 이해해야만 신약 즉 오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없는 신약이 없고, 신약없는 구약이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고레스 왕이 주전538년(?)에 칙령을 내려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학개와 스가랴는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파괴된 성전을 건축 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전한 선지자입니다. 특히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예언을 합니다. 그것이 슥9:9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슥6:13절을 보시면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라고 하심으로 성전을 건축도 하고, 왕직과 제사장이 하나로 통합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이 잘 알고 있는 말씀 중에 슥9: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스가랴가 예언한 말씀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만국을 다스릴 왕적인 권위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만국을 다스리는 분봉왕 같은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님이 오신 이유가 나귀에 잘 나타나 있다는 것을 제자들과 유대인은 몰랐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귀는 짐을 지고 운반을 하기도 하고, 사람을 태워서 다니기도 하는 동물입니다. 이런 이미지와 같이 예수님은 겸손으로 낮아지심으로 섬기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에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주님과 함께 걷는 지팡이교회는 승리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길을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풀어 당신님에게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나귀의 주인이 질문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함으로 이미 준비해 두었다는 것을 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6-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런 후 제자들은 자신의 겉옷으로 안장을 만들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입성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는 때는 유월절이 가까워 오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서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하고자 여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조용하게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받은 것은 당연합니다. 조용한 입성이 아니라 더욱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을 알리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다투지 않고 피해 다니셨지만 이제는 의도적으로 알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알리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을 보십시오. 8절을 보시면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나뭇가지에 대해서 요12:13절은 “종려나무 가지”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을 보면서 승리의 기쁨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펴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마태는 더욱 구체적으로 9절에서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치 왕의 행차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시편118:25-26절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절기행사 때마다 시편을 사용하여 노래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바로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승리의 왕으로 ‘호산나’라고 외침으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성을 보면서 “승리의 왕”이고 ‘메시야’라는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면서 군중들의 행렬을 계속 따랐을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을 사람들은 더욱 많이 예수님을 보고자 왔을 것입니다. 더욱 ‘호산나’라는 외침은 1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아직까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리신 것입니다. 마태는 왜 ‘소동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까? 쉽게 읽어 갈 수 있지만 마태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소동하다’라는 원어는 ‘지진’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지친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엄청난 힘처럼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모두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자신의 입성에 대하여 주목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이 왕 되심을 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며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심을 잘 드러내는 것이 ‘이는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잠깐이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를 깨닫게 했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우편과 좌편으로 생각을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만국을 통치하는 나라로 생각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오신 이유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병행본문인 막19:39절을 보시면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무리 중에 바리새인은 제자들이 군중을 선동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책망하여 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해야 하는 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절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당신님이 메시야의 왕으로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로 ‘호산나’라고 소리 지르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누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11절은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많은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지만 그들의 대답에는 다소 혼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 예수’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학수고대하던 예수님의 입성은 마치 백마와 황금 마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신 나귀 새끼를 타셨고, 양탄자 길이 아니라 때 묻은 겉옷과 종려나무가지가 깔린 길을 통해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성에는 진정한 섬김의 겸손이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무엇을 타든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승리의 ‘호산나’만 생각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그 어떤 민족도 넘보지 못하는 강력한 나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를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잘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의 현실을 보십시오. 특히 지팡이교회 예배당을 보십시오. 화려하기 보다는 초라합니다. 화려하고 잘 가꾸어진 예배당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배하는 성도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일생동안 화려합니까? 초라하고 고난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호산나’라는 뜻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자를 모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모습을 보는 무리들과 같을 것입니다. 지진과 같은 소리를 내지만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소리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원망은 마26:3-5절을 보시면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당신님이 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는지를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시었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는 고난과 죽음이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기 때문에 고난이 있는 것이고 결국 영광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면서 주를 따르는 신앙고백을 하는 지팡이교회는 승리의 면류관을 다시 예수님께 올려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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