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48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0:17-19절
강설날짜 2017-05-28

고난 죽음과 부활을 다시 예고하심(마20:17-19)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한 은혜”를 들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대체적으로 강설을 들은 후 다음 날이면 제목도 기억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고 있을 것을 믿습니다. 기억을 다시 떠 올리면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20장의 첫 시작을 알리면서도 19장과 연결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19장은 부자청년의 이야기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대답을 예수님의 말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의 대표로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님을 따라왔으니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 대답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면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심으로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20장 첫 시작을 “왜냐하면”이라고 시작을 하면서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들어서 부자청년과의 대화에 오해가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된 “왜냐하면”이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20:1-16절의 말씀을 주의 깊게 보시면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을 함으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1절은 이른 아침, 3절은 제3시, 5절은 제6시, 6절은 제11시로 기록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노력하게 희생하고 봉사한 대가는 각각 달라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의 집주인은 이른 아침에 왔던 마지막 한 시간만 일한 노동자에게든 모두 한 데나리온씩 준 것입니다. 상식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자들도 놀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의 이야기를 하심으로 한 데나리온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자 했습니다. 부자청년에게서 예수님은 선행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 같이 은혜를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포도원의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같은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이해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집주인은 계속하여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에게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하신 것입니다. 더욱 그들은 종일토록 일을 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터에서 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용직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루의 희생과 봉사에 대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시간이 왔습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이 받는 것을 보면서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은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 기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을 알고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불평을 하는 것은 옳다고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집주인은 13-15절에서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포도원에서 일한 품꾼들은 집주인의 의도를 생각해야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집주인이신 삼위 하나님은 타락란 인간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리신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에게 집주인은 당신님의 긍휼과 은혜임을 가르쳐 주신 것으로, 세상에서 환대 받지도 못하고, 일꾼으로 써주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는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나라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의 공로와 선행 그 외의 것으로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구원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회개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집주인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한 은혜의 마무리를 이렇게 전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른 아침부터 일한 품꾼은 적게 일한 사람보다 많은 대가를 요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한 대가를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일한 대가를 통해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렇다면 부자청년처럼 늘 고민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행을 잘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지 늘 좌절하면서 고민해야 합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 나라를 오직 은혜로 주어진 것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만 있습니다. 감사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노력으로 갈 수 없는 나라임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부자청년과 같이 근심하는 것이고, 은혜로 주어지는 나라를 알지 못함으로 결국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팡이교회는 처음이든 나중이든 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성도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죽음과 부활을 다시 예고하심“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번 주와 연결이 안 될 것 같은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자청년의 이야기든, 포도원 품꾼의 비유든 계속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고난과 사랑을 위해서 가시는 도중입니다. 죽음을 향해서 가시는 중에 ’죽음과 부활을 다시 예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대표로 베드로는 마16: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21절에서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제자들에게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알리셨습니다. 두 번째는 마17:22-23절에서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라고 반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 번째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여 주심으로 이제 모든 과정의 마무리를 위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는 왜 포도원 품꾼의 비유 다음에 그것도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있는 중에 말씀하여 주시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의 말씀을 볼 때는 전후 문맥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결과로 받을 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나라를 위해서 친히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일을 미리 알리고자 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병행본문인 눅18:31절에서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구약에서 예언한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는 중대한 일이 마무리 될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주어진 나라이면서도 너희도 고난과 죽음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다음주에 배울 내용이지만 잠시 언급을 하면 이렇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의 지위적인 상승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겸손과 희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모욕과 조롱을 당하면서 가장 낮은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셨지만 성육신으로 오심으로 결국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면 서도 가장 낮은 자로서 섬기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섬김은 고난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가시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가시는 것입니다. 너가 아니라 지금 우리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십니다. 이것이 섬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17절에서 ‘올라가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점점 더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예루살렘은 해발 약765미터의 신등성에 위치해 있습니다. 어느 방향에서 오든 예루살렘은 올라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해수면보다 약360미터 아래에 위치한 사해 입구 쪽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가는 길은 더 확실한 오르막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약1100미터 오르막처럼 더 보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방금 요단강을 건넜거나 예루살렘에 가는 길목인 여리고에 도착하셨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마20:29절에서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라는 말씀입니다. 참고로 한국적인 입장으로 생각을 한다면 과거에 한양에 올라간다고 사용하는 것처럼 어느 곳에서든 한양으로 올라간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18-19절에서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님의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언한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더 구체적으로 길게 설명하여 주신 본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이방인’과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임을 통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처음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게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오히려 구약의 말씀을 자세히 알고 있고 암송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한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17:8-12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네 성중에서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서로 간에 고소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9.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지를 네게 가르치리니 10.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11.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2.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대한 일에 대해서 판단을 하기도 하고 특별한 재판에도 직접 판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은 계속하여 예수님 시대에도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최고 법정이 무엇입니까? 산혜드린 아닙니까? 예수님은 바로 산헤드린 공회에 넘겨져서 재판을 받고 그들로부터 사형을 당한다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사형을 시키시고자 결의를 한 후 어떻게 한다고 하십니까? 19절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두 번에 걸쳐서 말씀하여 주신 내용에서 ‘이방인’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여 주심으로 결국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성취는 예수님을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음’을 사용하심으로 당신님의 고난을 상세하게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님의 십자가의 죽음만 알리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알려 주셨습니까?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즉 부활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의 위치만 중요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님의 지위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섬기어 주셨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당신님의 임무를 충실히 완벽하게 이루어 가는 것을 보면 우리의 모습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즉 나는 과거에 죄의식을 생각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안 후에는 “인애하신 구제주요 내 말 들으사“라고 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나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있는 자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성경의 있는 말씀을 그대로 믿으며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더욱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주신 의미를 되새김 하면서 참된 길을 걷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33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 전은덕 마24:36-51 2017-12-10 499
32 무화과나무에게서 비유를 배워라(마24:32-36) 전은덕 마24:32-36 2017-12-03 573
31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은 택함을 받은 자도.....(마24:23-41) 전은덕 마24ㅣ23-31 2017-11-26 523
30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마24:15-22) 전은덕 마24:15-22 2017-11-19 600
29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겠사오며 전은덕 마24:3-14 2017-11-12 443
2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다2 전은덕 마23:13-24 2017-10-15 507
27 이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을 아십니까? 전은덕 마22:34-40 2017-09-10 535
26 사두개인들의 시험- 부활 논쟁 전은덕 마22:23-33 2017-09-03 898
25 혼인 잔치의 비유를 아십니까? 전은덕 마22:1-14 2017-07-30 620
24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아십니까? 전은덕 마21:33-46 2017-07-23 1067
23 무화과나무 사건과 기도의 능력과 응답 전은덕 마21:18-22 2017-07-09 494
22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2) 전은덕 마21:12-17 2017-07-02 550
21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1) 전은덕 마21:12-17 2017-06-25 405
20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전은덕 마21:1-11 2017-06-18 434
19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전은덕 마20:29-34 2017-06-11 394
» 고난 죽음과 부활을 다시 예고하심(마20:17-19) 전은덕 마20:17-19절 2017-05-28 481
17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한 은혜 전은덕 마20:1-16 2017-05-21 1054
16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을 상 전은덕 마19:27-30 2017-05-14 398
15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영생의 문제, 오직 하나님만..... 전은덕 마19:23-26 2017-05-07 337
14 인생 최대의 문제, 영생 전은덕 마19:16-22 2017-04-30 30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