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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9:1-12
강설날짜 2017-04-09

지팡이교회는 베드로로부터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들은 후 예수님은 마16:21절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고난의 여행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 길을 동행함으로 참된 사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유대교 전승에는 세 번까지 용서를 하면 더 이상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잃은 양을 찾는 이야기와 권징에 대한 말씀을 들은 후 베드로는 세 번 이상 완전수인 일곱 번까지 하면 됩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번 이상 용서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고 하심으로 한없는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만큼 가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회개하는 성도에게는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세 개의 비유를 들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비유를 생각하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하심으로 종으로는 갚을 수 없는 것을 탕감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과 임금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는 자라도 구원의 선물을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유함을 얻고 전과 같이 자신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선물을 받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우연하게 동료를 만나게 됩니다. 그 동료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갚을 것이 있었습니다. 육백 데나리온으로 이 세상에서 노력하면 갚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용서를 해 주지 않고 목을 잡고 갚으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한없는 용서를 받았지만, 자신의 동료에게는 목을 잡으면서 악한 마음으로 자유를 빼앗고자 한 것입니다. 차라리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으면 육백 데라리온 빚진 사람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자유와 안정을 찾을 수 없는 모습이 된 것입니다. 왜 입니까?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이 말은 누가 한 말과 비슷합니다. 누가 한 말과 같습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임금에게 한 말과 같은 의미로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임금에게 용서를 받았지만 동료를 용서 하지 않고 목을 잡고 갚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또 다른 동료들은 임금에게 알렸습니다.

 

임금은 자초지정을 상세하게 다 들은 후 종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들도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용서와 긍휼 그리고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중요한 것은 한없는 용서입니다. 우리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지체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상상할 수 없는 은총의 나라이기 때문에 함께 천국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묵인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권징을 통해 더 이상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용서를 하는 것이고, 지체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한없는 용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의 사역에 마침표를 찍고 이제는 요단강 건저 유대 지경에 도착을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아마도 사마리아와 데가볼리 사이에 있는 요단 강 바로 옆 페레아 지역입니다. 페레아 지역은 요단강을 기준으로 갈릴리 호수와 사해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갈릴리를 떠나서 점점 더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면서도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낫고자 몰려 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널리 퍼지고 있었지만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셨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중에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꼬투리를 잡고자 했지만 그동안 모두 실패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시험을 가지고 와서 질문을 합니다. 3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자신들도 알고 있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마5:21-32절에서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는 말씀도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모세가 말한 신24:1-4절에서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바리새인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로 뜻은 “유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왜 바리새인은 유혹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는 “아내를 버리면 이는 간음함이라”고 했지만,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림으로 시험하여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환경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분봉왕인 헤롯이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이복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입니다. 그 결혼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함으로 결국 목 베임을 당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있는 장소가 헤롯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바로 그 지역에서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죽이고자 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주신 율법을 장로들의 전통으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면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복음의 증인자로 최소한으로 생활해야할 도리를 가르치는 법입니다. 최소한으로 주어진 법을 많은 법으로 더 만들어서 자신들의 다스리는 수단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의미와 거리가 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전통을 생각하면 “아내가 음식을 망치기만 하더라도 남편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혼증서를 써 줌으로 재혼을 하는 속임수입니다. 더한 것은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하기만 해도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은 율법의 내용과 다른 것입니다. 이런 전통이 아마도 이슬람의 수니파의 관습이 된 것 같습니다. 여자를 마치 애완용 아니면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이 하셨던 말도 알고 있는 바리새인에게 4-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 확증있는 말로 창1:27절과 2:24절에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5절 마지막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읽지 못하였느냐”고 하심으로 너희들의 질문은 그 대답이 너무나 명백하다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이런 질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것으로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정하신 결혼의 원칙을 말씀하심으로 율법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라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부는 서로 둘이 아니라 일심동체로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함으로 엡5:22-33절에서 부부는 한 몸이라는 것을 잘 표현했습니다. 성경은 단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는 의미를 넘어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두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것을 기본과 근본으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확대하지 않고 잘 보살피듯이 부부는 서로 희생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된 인간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물보다 더 진하다는 의미로 피라고 합니다. 서로 끊을 수 없는 관계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아니한 두 남녀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은 바리새인은 곧바로 7절에서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하면서 반박합니다. 자신들의 전통은 모세의 율법과 같이 생각함으로 이혼증서를 써 주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함으로 예수님과 모세의 말이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 주게 되었는지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본래’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창조 때”에 말씀하신 의미를 생각하도록 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 준 것은 최대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다시 결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한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제목이기도 합니다. 왜 예수님은 ‘완악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까? 저도 여기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하셨던 말씀의 때는 타락하지 아니한 때입니다. 완악함의 상태가 아니라 창조의 선하심과 온전한 상태였습니다. 본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질적인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래 타락하지 아니할 때 부부는 이혼의 가능성이 없었지만 타락한 후 인간은 마음의 완악함으로 비정상적인 이혼을 초래한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혼은 죄가 들어옴으로 불가피한 것입니다. 서로가 한 몸이었지만 서로가 부인함으로 죄악을 범함으로 이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모세는 신24:1-4절에서 이혼에 합당한 사유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이혼증서의 의미와 다른 것입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 준 것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부패한 인간의 완악을 보면서 비정상적인 조치로 불가피하게 허락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혼과 재혼을 허용할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혼은 전적으로 죄악이며,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여기서 음행을 하면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한 몸이 된 부부가 절대로 음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음행이 이혼의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으로 예수님은 어떻게든 이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행은 한 몸을 둘로 나누고 더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이혼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인정하지 않고 정당한 사유가 없이 이혼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음행을 하면 간음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수니파처럼 바리새인들도 강하고, 큰 자의 편에서 약자를 보호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한 몸으로 생활하다가 이런 저런 흠을 잡아서 이혼을 해도 모세의 율법을 장로들의 전통으로 만들어서 합법화한 것은 모세의 의미와도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이혼이 많았지만 사소한 일로 이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라는 강설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한 몸 공동체인 부부는 서로가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자입니다. 그런데 힘으로 권력으로 약자와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이 식으면 더 이상 부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이혼은 불가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더 이상 시험하지 못하고 떠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말을 생각하면서 질문을 합니다. 10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냐고 하면서 완전한 이해를 얻고자 질문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율법과 장로들의 전통을 들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힘들었고 혼돈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결혼에 빠질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좋다고 질문한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11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사람이 독신이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타고난 독신이 누군가를 12절에서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세 부류가 있는 것으로, 선천적으로 그리고 후천적으로 마지막은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된 고자로 독신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결혼을 통해서 당신님의 섭리의 원칙을 유지하면서, 제자들이 차라리 결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말에 적절히 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 독신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한 자들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12b절을 보시면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대부분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하겠지만 독신은 특별한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통하여 사랑으로 관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오면서 사랑의 관계가 멀어졌지만 하나님은 다시 사랑의 관계로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이용하여 자신들만의 전통을 더 만들어서 이용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으로 정직하게 말씀을 보고, 듣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자신들을 위한 합리화롤 만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음이 완악함으로 이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인간의 마음을 알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증서를 써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처럼 모세도 약자를 보호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마음이 완악하여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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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전은덕 마19:1-12 2017-04-09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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