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44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4:13-21
강설날짜 2016-11-06

지팡이교회는 저번 주에 들은 강설을 기억하시고 있습니까? 아마도 최순실의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저번 주 말씀의 내용을 기억한다면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지팡이교회를 믿습니다. 최순실의 사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기를 원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헤롯은 예수님께서 말씀과 이적을 행하신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환생을 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헤롯은 혹시나 하면서도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한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 헤롯은 불길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을 그의 제자들에게서 듣고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시고 동북쪽에 있는 벳새다 들의 한적한 곳에 도착을 합니다. (참고로 헤롯은 나중에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처형해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에 강한 부담을 느낀 빌라도는 관할 지역을 담당하는 분봉왕 헤롯에게 예수님을 보내게 됩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만나 기뻐 하지만, 말씀에 대한 관심보다 이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벳새다에 가셨다는 것을 들은 사람들을 행동을 1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님께서 헤롯이 만나고자 할 때 벳새다로 간 이유는 잠시 동안 피하시면서 휴식을 취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헤롯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휴식을 취하고자 했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은 걸어서 이동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보다 빨리 도착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더 시간이 걸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예수님 만날 때 참으로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13장에서 여러 개의 비유를 통해서 그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벳새다 들에서 오천 명에게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마태복음서와 같은 요한복음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렇게 요약하시고 있습니다. 요6:2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육의 양식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7절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로 하시면서 ‘생명의 떡’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인자’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마태복음에서 다루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벳새다의 지형을 알기 위해서는 요6: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참고 도서를 보면 거기는 훤한 들판이고 그 뒤가 산이라고 합니다. 그 산의 모퉁이에 작은 동산에 예수님이 앉으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이 모인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막6: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 같았습니다. 여기서 유심히 볼 단어를 보시면 ‘불쌍히 여기사’입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할 때에만 ‘불쌍히 여기사’를 사용 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면서 사랑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찾아온 자들은 자신의 병든 육신을 주께 내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절망적인 육신의 모습과 마음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기쁨으로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주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볼 때 저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도 좋지만, 오천 명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고민을 하고 고민을 한 후 15절을 보시면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예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듣고 싶어서 저녁이 되도록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 식사가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할 때는 감당할 수 없는 식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피해서 잠깐이라도 휴식을 얻고자 하지만 여기에 와서도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백성을 돌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시면서 당신님의 절실한 휴식을 미루시고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볼 때는 이정도면 됩니다. 여기는 빈들이고 양식도 구할 수 없는 곳이고 이미 해도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서 양식을 사 먹도록 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당연하고, 실용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 같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의외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제자들에게는 오천 명을 먹일 만한 음식도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동문서답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요6:6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곧바로 빌립은 7절에서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한 데나니온이 한 사람의 하루의 노동의 대가입니다. 예수님은 어쩌자는 것입니까? 제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황당한 것입니다. 만약 나라면 예수님 ‘농담도 너무하십니다’라고 하면서 마음으로 욕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이 얼마나 먼 것인지 알게 하시는 것이고, 제자들을 시험하여 훈련하심으로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그리고 요6:8-9절을 보시면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제자들이 생각할 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오천 명을 먹일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짧은 거리를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기 적합한 음식이 ‘떡과 물고기’였습니다. ‘떡’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전병과 같은 것으로 밀개떡 같은 것으로 보리떡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양을 좀 더 생각하면 냄비에다 부친 것같이 납작하고 둥그런 것입니다. 이런 모양의 떡이 다섯 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아마도 소금에 절여서 구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들이 볼 때에도 이것으로는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양이 안 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18절에서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19절에서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앉히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넘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앉히시다’는 것은 유대인이 연회를 베풀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눕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음식을 베푸시는 잔치를 연상하도록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하십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 이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식사를 하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도(축사)를 하는 관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쳔 명을 먹이기 위해서 복을 비는 기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무리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도록 음식을 만들 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적의 과정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에 그리고 기적에 관심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하느냐입니다. 헤롯은 말씀보다 기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을 염려하심으로 기적을 통해서 배불리 먹게 하시고 있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깊은 비밀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직접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해결해 보고자 노력을 합니다. 그 결과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 물고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노력을 했지만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문제를 특히 지금 너희에게 필요한 양식은 빈들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에게 이런 기적을 행하고 있는 바로 내가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이 바로 나와 함께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 예수님만 있다면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요6:1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죄악이 잘 드러난 것입니다. 임금으로 추대를 한 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과 같이 그리고 병자를 고쳐 주신 놀라운 기적처럼 예수님의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온누리에 이상적인 국가를 이스라엘 땅에 만들어서 계속하여 행복을 누리도록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오심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심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이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심을 드러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에 대해서 요6:26절을 다시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왜 오늘 예배를 하고 있습니까? 최순실처럼 많은 돈을 내면서 복을 빌기 위한 것입니까? 혹시나 좋은 일이 생길까 하는 기대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하게 요6:27-29절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지금 너희는 육의 양식을 요구하나 더 중요한 것은 영생하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인자’이신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지팡이교회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굶주린 영혼들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의로 즉 영의 양식으로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영의 양식을 나누어 주면서 섬길 수 있도록 올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하면서 이것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그러십니까? 하면서 따질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교회는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지팡이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은 작은 일부터 합시다.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지고 온 것이 바로 떡과 물고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좌절 같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감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축사를 하시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믿고 승리합시다.

 

 

교훈과 적용

 

1.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 온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적인 양식인 말씀과 육적인 양식을 먹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믿습니까?

 

 

 

2. 주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면서 모든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면 나를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간단한 것부터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을 왜 제자들을 시험하신 것입니까?

 

 

 

 

4.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지만 정착 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배도하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의 경주로 승리해야 합니다. 늘 승리할 수 있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성경의 말씀을 읽고, 찬송도 하면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5. 오늘의 말씀을 잘 간략하게 정리하여 기록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324 가이오게 삼박자 축복을 말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길을 잘 가라는 것이다. 전은덕 359
323 고소당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다 전은덕 행24:10-19 2020-04-19 363
322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때의 주님의 반응(마12:14-21절) 전은덕 마12:14-21절 2016-08-21 616
321 예수님과 바알세불 나의 선택은? 전은덕 마12:22-37 2016-08-28 711
320 외식하는 자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거부함 전은덕 마12:38-45 2016-09-11 581
319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은 누구인가? 전은덕 마12:46-50 2016-09-18 647
318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전은덕 마13:1-9 2016-09-25 894
31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풀이 전은덕 마13:10-23 2016-10-02 563
316 제8항 본질에서는 한 분이지만 삼위로 구별되는 하나님 전은덕 신6:4-5 2016-10-09 521
315 가라지, 겨자씨, 누룩의 비유 전은덕 마13:24-43 2016-10-09 707
314 보화, 진주, 그물 비유 전은덕 마13:44-50 2016-10-16 639
313 비유들의 결론과 예수님을 배척함 전은덕 마13:51-58 2016-10-23 512
312 세례 요한의 죽음 전은덕 마14:1-12 2016-10-30 491
» 왜 오천 명을 먹이셨을까? 전은덕 마14:13-21 2016-11-06 448
310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과 게네사렛에서 병자를 고치심 전은덕 마14:22-36 2016-11-13 591
309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현실을 바라보라 전은덕 슥1:1-6 2016-11-20 708
308 장로들의 전통1 전은덕 2016-11-27 687
307 장로들의 전통2 전은덕 마15:1-20 2016-12-04 680
306 예수님의 오심은? 전은덕 요3:1-18 2016-12-25 441
305 신앙, 믿음과 행함(전장원 목사) 전은덕 약1:17-27 2017-01-01 46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