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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6:5-12
강설날짜 2017-01-15

지팡이교회는 지난 주에 “표적을 구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심”으로 강설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 ‘메시야’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까?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것은 그들은 평소 좋은 사이도 아니고 서로 교리적으로 달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앙숙, 원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 외에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 했습니다. 그것이 경건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후 세계와 부활 그리고 천사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사두개인은 장로들의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율법’만 인정합니다. 이처럼 분명하게 서로 다른 신앙관이었지만, 말씀을 통해서 보면 서로 하나로 연합하여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은, 예수님 당신이 ‘메시야’이시면 지금까지 해 오신 모든 사역의 기적, 이적 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인 권위의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예수님은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흠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대해서 2-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자연의 현상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여기서만 ‘시대의 표적’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각 시대별로 나타나는 징조가 아니라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사역을 해 오시신 모든 증거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고, 특히 이방인들이 고백한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적을 본 후에는 마15:31절에서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분명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4절에서 말씀하심으로 그들이 원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 선지자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 후 다시 살아나서 적군이고 원수라고 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처럼 당신님께서 이제 남은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3일 동안 있은 후 부활하심으로 신적인 표적을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당신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시대의 표적들을 마감하고 궁극적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 그 이상의 표적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에도 다른 표적들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지 마시고, 오직 성경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잘 가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바르게 가고자 하는 성도님, 이제 우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소망하면서, 그리고 나에게 적용을 잘 하기를 바라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5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라고 합니다. 어디로 가신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마가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벳새다(막8:22)로 기록하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여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여행을 하면 식당이 많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식당이 별로 없었으므로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다툼을 하면서 심각하게 대화를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예수님은 떡을 소재로 삼아 제자들에서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깊이 묵상하면서 읊조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서로 의논하면서 ‘누룩’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떡’을 챙기지 못한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하며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알고 있는 예수님은 8절에서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그 뒤의 말씀에는 ‘오병이어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하시면서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6절의 말씀 중에서 왜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까? 제자들은 ‘누룩’이라는 말을 들고 떡이 떠올렸을 것입니다. 떡은 여행을 할 때나, 누구든지 배가 고픈 생활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지난주에 우리가 배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것에 대한 의미를 그들도 이해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누룩’은 좋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유해한 가르침이 주는 영향력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교훈은 영적으로 매우 위협적이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방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가르침을 누룩으로 비유하신 것은 밀가루 반죽 안에서 보이지 않게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퍼지는 것처럼 그들의 가르침은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키는 악한 교훈입니다. 만일 영혼이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먹을 경우 생명을 잃거나 심각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팡이교회는 ‘주의하라’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꿰뚫어 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말로는 ‘주의하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말씀보다 누구를 더 좋아하십니까? 어느 목사는 신비적인 은사가 많아요 그 분에게 가면 놀라운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성경을 사모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누룩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도 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떡에 대한 관심만 있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룩’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서 떡을 사면 안 되는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붙들고 있는 떡장수를 생각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떡인 말씀을 얻어먹으면서, 변질된 양식을 먹지 맙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은 좋은 것 같으나 변질된 음식과 같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누룩’입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면서 영혼을 죽이는 변질된 교훈과 독을 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이고 영적인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와 그 당시의 시대가 무엇이 다릅니까? 광화문 근처에서 대형 십자가로 그들의 마음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것인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8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고 하면서 제자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특히 마6:30, 8:26, 14:31절을 보시면 대체적으로 세상의 일로 염려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병이어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먹여주시고 입혀주심을 믿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을 제자들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떡’을 생각하면서 먹을 것을 위해 걱정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현실의 모습일 것입니다. 마태는 아주 짧게 기록을 했지만 병행 본문인 막8:18절은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상세하게 기록을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같이 생각하면서 질타를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질타나 책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깨달음을 위한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호소는 9-10절을 보시면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알지 못하는가? 제자들이 떡에 대하여 염려한 것은 믿음이 부족함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말씀보다 떡에 관심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이나 우리나 도찐개찐입니다. 왜 이적과 표적을 한 이유는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행한 표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 행한 표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두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을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건을 통해서 아주 적은 양식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바구니에 남았는가를 떠 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시기 위해서 10-12절에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 그들의 실수도, 지팡이교회의 성도의 실수도 아시면서 경고의 메시지와 같이 주의라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믿음이 튼튼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과 미래에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가르침을 받았고 기적을 보았지만 흔들렸습니다. 우리들도 같을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은 영적인 소경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말씀을 통해서 늘 먹음으로 늘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를 사랑과 긍휼 그리고 자비로 인도하여 주신 주님은, 재산도 없는 사람이지만 목회를 하도록 하시고, 두 아들을 주심으로 먹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지금도 주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생활을 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의 길을 가도록 하십니다.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으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맛 보기 생활을 하면서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에서 종말의 시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시대를 생활하는 우리를 향해서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들은 누룩을 떡으로 생각을 했지만 이제야 누룩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그들만의 인간의 전통에 집착을 했고, 사두개인들은 율법만 생각을 하면서 부활을 부정한 잘못된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뜻을 분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세상의 누룩과 기독교와 이단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믿음이 작은 자들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연약하다고 실망하지 마시고, 누룩을 조심하면서 주의 길을 갑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지금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어떠합니까? 한 박자 아니 두 박자 늦게 알았다고 합시다. 우리도 같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영적인 양식을 먹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만 바라보았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그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부활도 부정하면서 의를 이루려 했습니다. 마음의 성결보다는 외적인 외형에 성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고 연기하는 배우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배우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만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요 성도인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의 교제를 하면서 누룩을 주의해 가면서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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