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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7:14-21
강설날짜 2017-02-26

예수님께서 변화산 사건에서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을 저는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모두 사라지는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보여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의 광채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곳에서 육체를 입은 모습으로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의 광채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예수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같이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지를 말해 준 것을 다시 보고 들음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시기전 엘리야가 와서 주의 길을 준비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팡이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의 길에 함께 하는 성도라 믿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감당하면서 순종과 복종하는 기도를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한 모습으로 가야합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가실 때 비웃음과 죽음의 고통이 있었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승리가 있었음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승리는 교회를 창설하여 세우심으로 ‘존귀와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상급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합시다. 오늘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후 ‘귀신 들린 아이의 고치심에 나타난 제자의 모습과 나’라는 강설로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풍성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와 보시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 14절 보다 병행본문을 먼저 보는 것이 오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더 유익할 것입니다. 막9:14절은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더욱 교활하고 악한 방법이 더 치닫고 있는 가운데 오늘은 서기관들이 남은 제자들과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과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잘못을 잡아내서 유대교 사상과 가르침에 어긋나면 공격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궁지에 몰리게 함으로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가의 길을 가시는 것처럼 지팡이교회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더욱 험난하고 고난의 길임을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아있던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변론을 하고 있는 중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내려오시면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만 본 것이 아니라 마9:15절은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온 무리들도 예수님을 보고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위해야 합니다. 구약의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랐던 것처럼(출24:29), 예수님의 신적인 광채가 남아있던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해석 같지만 위험한 것은 언제나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 9절에서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평상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대할 때, 종교지도자들과 다른 거룩한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그렇다고 위의 해석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오늘 본문 14절을 보시면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자신의 아이가 고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무릎을 꿇어 엎드려 고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들어 있는 아들의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15절입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고 하면서 ‘주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주여’라고 사용하여 신적인(하나님의 아들) ‘주’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주’라고 부름으로 연약한 나의 아들을 의롭고, 존경을 받고 있는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주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실 것을 믿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병에 걸려 있는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예수님을 ‘주’라고 하면서 간질에 걸린 것을 설명합니다.

 

‘간질’은 신약성경에서 오직 여기서만 나오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17절은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리고 25절은 “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라고 하심으로 그 아이는 벙어리와 말 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간질’이라고 한 것입니까? 간질과 같은 증상은 잠시 의식을 잃고 발작하는 외부적 증상이 간질과 유사한 것으로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아 괴롭히는 영적 차원의 질병인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을 번역할 때 ‘간질’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원어상으로 마태복음에는 문자적으로 ‘달빛에 홀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정신이상 증세가 달의 차고 기우는 현상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것이라는 많은 나라의 민간 신앙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 아이가 귀신에 들리는 것은 큰 어려움과 고통을 수반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고하기전에 귀신에 들린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 주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은 병을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더욱 간절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라고 고백을 하면서 애절한 표현을 다 한 것입니다. 왜 주여라고 고백한 것입니까? 제자들이 자신의 아들을 고쳐 달라고 했지만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로인아여 예수님이 오는 것을 보고 ‘주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10:1절에서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하셨고 그런 후 8절을 보시면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무심코 말로 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눅10:17절을 보시면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귀신을 몰아내는 일들을 제자들도 경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제자들에게 위임된 권세를 사용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아들을 고쳐야 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오늘날 헌금을 많이 해야 고칠 수 있다고 하면서 고치지 못하면 기도가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모욕하는 것이고 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소리를 들으면서 귀신을 쫒아내지 못하는 암울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17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고 하시면서 탄식과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탄식과 책망은 엉뚱한 말씀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식과 책망에는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고칠 수 있는 권세를 받고도 고치지 못하는 신앙의 믿음과 신뢰가 많이 약해진 것에 대한 탄식과 책망으로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멀리서 소문을 듣고 왔지만 헛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심으로 제자들만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과 오늘날의 모든 세대에도 같은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꼭 필요한 자리에서 발휘되지 않고 있는 것과 완고한 종교지도자들처럼 한 무리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능력과 권세를 위임 받은 것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충분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이 변론하고 있는 장소에 왔다는 것은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기쁨과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변론을 하던 내용을 파악한 예수님은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이렇게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네가 믿은 내용이 거짓이나 헛된 것이 아니라, 나는 능히 악한 영들에게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권세와 능력을 가진 자이니 네가 이 믿음을 붙잡는다면 귀신을 쫓아내는 일뿐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다 가능하다”고 일깨우신 것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을 보고 실망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예수님을 보고 간절한 믿음으로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주신 능력과 권세를 사용해야 하지만 우리와 같은 연약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연약한 제자들에게 당신님의 권세가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여 주십니다. 18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성경에서 모든 병은 귀신으로 인한 것임을 말하지 아니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귀신으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그 아이를 향해서 예수님은 당신님의 능력과 권세로 메시야이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위임하여 주신 능력과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귀신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귀신도, 간질처럼 정신을 잃고 바닥에 누워 뒹굴는 귀신도 위임 받은 능력과 권세로 꾸짖으면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를 실제로 고치심으로 능력과 권세가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믿고 신뢰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의 능력으로 귀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막9:26-27절에서는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귀신은 소리를 지르면서 경련을 일으키고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서게 하심으로 당신님의 권세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았던 제자들은 19절을 보시면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능력과 권세를 주신 것을 점점 희미하게 잊어가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과 권세를 선물로 생각하면서 마치 정신적인 재산인 것같이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점점 더 희미해지었는데 오늘 귀신 들린 아이가 왔을 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듯이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지만 정작 기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서기관들에게는 빌미가 되었을 것이고 그로인하여 변론을 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아이가 왔을 때에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물리쳐야 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제자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과연 제자입니까? 제자의 믿음은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간구하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20절에서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심으로 ‘너희 믿음이 작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부연 설명은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가장 작은 ‘겨자씨’를 통해서 ‘가장 작은 믿음’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제자들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 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와 달리 마가는 막9: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여 주신 요지를 각각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귀신이 나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를 하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세라는 것임을 알려 주심으로 제자들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참 생명의 축복에 이르고자 하는 성도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고, 나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랑과 긍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연약하여 서기관들에게 변론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귀신을 내쫓는 것을 생각하면서, 종교지도자들이 과거에 그랬듯이 귀신의 왕 바알세블을 빙자하여 쫓아냈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예수님도 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앞두시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뜻대로 기도를 하시지 않고 늘 하나님의 뜻대로 합당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의 바른 자세는 ‘내 뜻대로 이루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앙을 보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럴수록 지팡이교회는 ‘겨자씨와 같은 믿음’으로 믿음이 연약하더라도 도와달라고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믿음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성도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하여 보겠습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을 인정하십니까? 사도신경을 사용하여 고백하는 것을 진실로 믿습니까? 신앙의 생활을 하면서 양심이 나를 찌를 때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시기를 좋아하십니까? 하루에 기도를 어느 정도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생활하고자 노력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오늘 본문을 귀신 들린 병을 고치는데에만 관심이 있게 전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탄식하신 소리를 들으십시오.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향해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통하여 나를 되돌아보십시오.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존재입니까? 회개할 때 회개할 수 있는 것이 겨자씨와 같은 믿음 아닐까? 합니다.

 

 

 

교훈과 적용

 

1. 귀신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귀신에 걸린 아이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알고 그의 성향과 공격성을 알아서 미리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2. 마10:1절과 8절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고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3. 지팡이교회는 늘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말씀을 늘 묵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묵상과 기도를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기를 바랍니까?

 

 

4. 나는 늘 영적으로 깨어서 사탄을 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권세가 무엇인지 확인하여 주시기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5. 제지들은 예수님께 함께 있을 때, 자신들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6. 막9: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리라”는 말씀을 묵상하여 보십시오.

 

 

7. 오늘의 말씀을 잘 정리하여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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