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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8:15-20
강설날짜 2017-03-26

교회에 대한 권징의 말씀(마18:15-20)

 

구원을 받은 백성은 과연 내가 으뜸이고 최고라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죄인이 용서함을 받은 후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그리고 교회에 자랑할 수 있는 으뜸이고 최고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내가 으뜸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질문을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천국에서 누가 크리이까”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최고이고 으뜸이 되고자 할 때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고자 할 때 겸손으로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도 모르게 섬기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작은 자를 섬기기 위해서는 그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손과 발 그리고 눈을 찍어 버리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마음이 상하고 심한 것 같습니다. 과연 찍어 버려야만 하는 문자적인 의미입니까? 저번 주 강설을 잘 읽어 보십시오. 한 사람의 실족으로 한 사람의 죄악으로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양들은 교회로서 그 중에서 한 양이 실족하여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서 볼 때 목회자의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실족하여 교회에서 떠난 자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마음입니다. 오늘 지팡이교회에 주시는 강설의 제목은 “교회에 대한 권징의 말씀”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크냐고 할 때 큰 자는 공동체를 위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고,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실족한 지체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큰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냥 두고 보자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영원히 볼 수 없는 원수와 같은 자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실족한 사람을 마치 손과 발 그리고 눈으로 생각하면서 찍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동안 무엇을 들었습니까?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 아이의 특성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 아닙니까? 잃은 양을 찾는 것이 주님의 마음처럼 교회도 같은 마음 아닙니까? 주님이 용서하여 주시지 아니했다면 나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권징에 대한 말씀으로 천국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최고요 으뜸이라고 하는 자들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고 교회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교회의 표지입니다.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성도가 실족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고 실족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는 자가 되라는 것은 마치 성인군자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하면서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형제는 가족 공동체로서 다 같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형제로 태어난 관계입니다. 서로 큰 형도 있고 아우도 있습니다. 형과 아우를 연결하여 주는 것이 형제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이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서로 다르지만 같은 연결을 해주는 것이 형제입니다. 여기서 형제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 생활을 같이 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너는(교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예수님은 세 단계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15절에서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16절로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17절로 “ 교회에 말하고”하심으로 단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족하고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먼저는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우선적으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고”라는 본래 의미는 “빛을 비추다, 드러내다, 지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병행본문인 눅17:3절에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경고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더 엄밀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꾸짖고, 책망하라’는 강한 표현을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의도를 생각하면 죄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도 모르고, 죄인이 누가 누구를 권고할 수 있는가라고 나는, 우리는 생각할 것입니다. 과연 그런 의도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그 형제의 죄로 인하여 누룩처럼 교회 공동체에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냥 그 정도는 눈 감을 수 있는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고 하도록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15b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하십니다. 형제의 죄를 너가 가서 권고하고 드러내어 책망하고 꾸짖음으로 형제를 다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얻다’라고 하심으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업적인 의미로 시장에서 자주 사용한 단어입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함으로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 사용된 것을 가지고 오심으로 예수님은 죄를 범한 형제는 교회에서 실족하여 손실된 자였지만 교회의 형제가 가서 권고함으로 다시 얻는 의미로 교회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만날 때는 욕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권고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에게 갈 때는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서로 신뢰와 순종이 있었던 과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 신뢰할 수 없었던 과거는 가족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서 신뢰가 있는 공동체입니다. 권고를 함으로 죄를 범한 형제는 다시 신뢰와 순종의 회복의 관계가 됨으로 마치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처럼 다시 찾음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권고를 한다는 것은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 없는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싫어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참된 길을 갈 수 있도록 스스로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권고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이제 예수님은 16절에서 형제의 말을 듣지 아니할 때 어떻게 하라는 두 번째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형제로부터 권고를 들어도 죄를 범한 형제는 권고를 다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권고의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잘못을 지적하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면서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럴 때 권고를 한 형제는 겉으로는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분노하는 것이 사람이 아닙니까? 이럴 때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그 다음 권고의 단계로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일대 일로 권면을 해도 듣지 아니할 때 보다 형제가 늘어난 것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사랑하는 완곡한 표현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권고보다 한두 명이 더 사랑으로 이야기함으로 회개하게 하여 다시 얻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왜 한두 명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신19:15절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법적인 유효성을 보장하는 증인의 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고 하심으로 사건의 모든 내용에 대해서 증인으로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족한 형제에게 사랑으로 권고하는 것은 그 형제 자신의 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족한 형제가 자신의 죄는 없다고 할 때 증인의 역할을 함으로 정확하게 하는 것이고 혹시나 그 형제의 말이 올바를 수도 있다는 것을 한두 사람이 함께 함으로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권고의 말을 듣지 아니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마지막의 단계로서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실족한 형제를 위해서 모든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헛수고가 되었을 때 유일한 방법으로 교회에 말하고 그 말도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하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날로 생각하면 불신자로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소유하지 아니한 가짜 신앙인으로 불신자라로 출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으라고 하면서 여기서는 출교라니요. 죄를 범한 형제를 그대로 두면 마치 누룩처럼 퍼짐으로 공동체의 신앙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에 악영향이 미치면 교회의 순수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검찰과 형사와 다릅니다. 그리고 감옥도 없습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교회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불신자처럼 출교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으로 그 형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불신자입니다.

 

죄를 범하고 실족한 형제가 돌아올 수 있도록 교회에 주어진 권징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필수적이라고 해서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는 개인이 그런 후에는 한두 명이 그 다음으로는 교회에 말함으로 돌이키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랑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늘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반갑게 영접하여 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늘 예수님은 마음을 열어두시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아시리라 믿습니다. 요3:1-21절에서는 니고데모는 유대의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킨 지도자였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등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아니하면 불신자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회개를 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출교를 시킴으로 교회의 권위가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을 들으면 어디선가 들은 것 같습니다. 기억하시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후 마16:19절에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차이점은 오늘 본문은 “너희”라고 하면서 복수로 쓰지만 16장에서는 단수로 쓰고 있습니다. 단수에서 복수로 사용하는 것은 이미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위가 앞으로 확장된 교회로 세워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교회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수하면 안 됩니다. 무엇입니까? 교회는 구원 받은 백성의 모임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지팡이교회 성도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심으로 세우신 신성한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의 결정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심으로 정죄와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에 주어진 권징입니다. 권징은 보이는 방법으로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 한다는 것은 잃은 양을 찾은 것처럼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결정된 것이 사실이지만, 땅의 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권징을 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다해야 합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 교회가 이런 권징을 내려야 할 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너희가 어떻게 하고자 기도하면서 정할 경우 하나님께서 너희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회의로서 권징을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구하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고 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올바른 권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의 결정과 시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 될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에 이어서 20절을 보시면 교회의 권위에 대한 강조도 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고 서로 합하여 기도를 하면 특별히 많은 관심을 보이시고 들어 주신다는 의미로 생각할 것입니다. 기도는 한 사람이 하든 두 사람 이상이 하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의도는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중입니까? 권징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권징과 실족한 형제를 찾는 문맥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되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유효 증인의 수가 확보된 상태에서 권징을 할 것을 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희와 내가 함께 있겠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의 결정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신성한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 당신님께서 결정하시는 권징이 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권징은 단지 사람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권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가 혹시 권징을 해야 할 때가 있다면 꼭 기억하고 진정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권징 사역에 대해 하나님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15-17절에서 기록하게 하심으로 너희는 깊이 생각하면서 죄를 범한 형제를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찾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권징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을 경우 출교를 당한 형제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권징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 밖으로 출교를 시키는 것은 엡2:2절을 보시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출교를 시킨다는 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게 주는 것으로 사탄에게 내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 무조건 구원 받은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성도가 구원을 받은 참 백성입니다.

 

오늘 말씀과 연결하여 갈6:1-3절의 하나님의 말씀도 들으십시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권고와 권징을 할 때는 너도 똑같이 범죄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겸손하고 온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잃은 자를 다시 찾을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있는 교회입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 한 마리의 양이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 다시 찾음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한 사람이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천국의 종이 울리는 큰 잔치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기관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할 때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그 아들을 거듭 입을 맞추면서 영접하는 것처럼 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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