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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0:1-16
강설날짜 2017-05-21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한 은혜(마20:1-16)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리고 고난을 즐거워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는 지팡이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성도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을 부인하고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시면서 천국을 유업’으로 얻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반대로 부자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면서 자신은 자신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 청년에 대해서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부자청년은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을 했지만, 삭개오는 자신을 부인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는 성도로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나를 따르라”는 의미를 부자청년을 통해서 잘 배웠을 것을 믿습니다.

 

부자청년이 자신의 재물과 선행을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청년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자신의 것을 부인하면서 오직 나를 따를 수 있도록 자신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할 때 예수님은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 다른 말씀을 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들어서 부자청년과 제자들과의 이야기에 대한 심오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도원의 비유라고 흔히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주기도문)에서 “대개”라는 표현을 아실 것입니다. 큰 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뜻이 우리가 읽은 1절에서 마19장과 연결하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에서는 생략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비유의 말씀을 바르게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포도원의 비유만 읽기보다는 19장과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앞 단락과의 연관성 속에서 읽을 때 이해하기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당신님께서 가르쳐 오신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들어서 메시야가 다스리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집주인과 고용된 품꾼을 이용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이른 아침’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대체적으로 일을 시킬 때는 아침 여섯 시부터 저녁 여섯시 즉 하루 12시간 품꾼을 고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과 우리들과 시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대식으로 하면 제0시는 우리에게는 오전 6시이고, 제1시는 7시, 제6시는 12시가 됩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아침 일찍 품꾼을 고용하여 저녁 6시까지 즉 해가 지는 일몰까지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1절은 이른 아침, 3절은 제3시(오전9시), 5절은 제육시(오전12시)와 제구시(오후3시) 마지막으로 6절은 제십일시(오후5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용된 품꾼의 노동비는 각각 다르게 지급되어야 합니다. 10절을 보시면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모두 하루 품꾼의 노동비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집주인은 2절에서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그 당시 하루의 노동비 ‘한 데나니온’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누구나 서로 공감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하루의 적당한 대가의 노동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일했을 것입니다.

 

포도원의 일은 대체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집주인은 다시 3-4절을 보시면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심으로 일꾼을 뽑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인력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쉽게 품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는 집주인은 5절에서도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을 보시면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제0시와 제3시, 제6시, 제9시와 다르게 제11시의 품꾼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품꾼의 노동비에 대한 협상이 없습니다. 그 전에 온 제3시 품꾼에게는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고 하셨지만 정확한 액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처음 온 품꾼과 맨 마지막으로 포도원에 들어와서 그것도 한 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노동비를 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시간만 일하고 같은 노동비를 받도록 한 것에 관심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루의 노동비가 중요했다면 각각 다른 노동비를 지불해야 합니다. 일을 하기 전 미리 노동 비용을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의 품꾼 이야기를 하심으로 노동의 대가로 주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품꾼으로 고용된 사람은 내가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주인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은혜를 베푸신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신 우리는 먼저 믿은 성도도 있고 나중에 믿은 성도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환대 받지도 못하고, 일꾼으로 써주지 아니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집주인)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제11시에 들어간 사람은 인력시장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일 것입니다. 노동도 체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분은 노동을 할 수 있는 힘이 약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즉 예수님은 거저주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품꾼들은 모두 집주인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11절을 보시면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먼저 온 사람은 나중 온 사람부터 월급을 어떻게 주었는지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자신들이 더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을 했지만 다 똑같이 받은 것을 알고 집주인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노동의 착취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제11시에 온 사람과 비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아야 합니다. 인력시장에는 오늘 일하지만 다음날에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특히 제11시에 온 사람은 더욱 힘들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온 사람들은 집주인의 의도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배려하지 못하는 것은 집주인의 참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시기심과 이기심만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집주인은 13절에서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마도 집주인은 품꾼의 대표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친구여’라고 하십니다. 당시나 오늘의 시대나 이런 표현은 놀라운 것입니다. 아마도 집주인은 사려 깊은 어조로 품꾼을 친구라고 부르면서 나는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이라는 정당한 월급을 주기로 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도 은혜로 주어진 나라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온 사람이나 나중에 온 사람이나 모두 부족한 사람이지만 집주인은 포도원에 들어가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게 함으로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먼저 주님을 믿은 성도나 나중에 믿은 성도나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 가기 위해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나 나중에 온 사람이나 모두 죄인이지만 값없이 은혜를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교회 안에서 나는 큰 자라고 하는 것보다 모두 같은 주님을 믿으면서 하나 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온 품꾼은 집주인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삭개오처럼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집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자청년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선을 통하여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믿기만 하면 되지만, 부자 청년은 다르게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비유를 통해서 은혜로 주어진 나라라는 것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를 모르는 품꾼에게 집주인은 14절에서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오직 자신이 일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이것이 ‘내 뜻이니라’고 하십니다. 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값없이 주는 것이 바로 나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자신이 행한 일을 두고 15절에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너희들도 제11시에 온 사람과 마찬 가지로 하루의 대가를 받기에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19장의 마무리의 의미를 다시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을 다시 16절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심으로 19장의 마무리와 순서를 다르게 하여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이와같이’라고 하심으로 포도원의 비유는 결국 16절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순서를 다르게 한 것일까? 강조를 위한 것으로 먼저라고 생각을 하면서 자부하던 사람도 나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된 사람이나 나중 된 사람’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온전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이른 아침부터 일한 품꾼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신 말씀처럼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부자청년처럼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일한 품꾼처럼 자신의 영생을 선행과 노력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주님을 악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하신 주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부인하면서 고난과 사랑의 길을 걷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의 일부분은 포도원 비유를 노동의 대가 즉 선행으로 생각합니다. 영생은 내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일하기 전에 이미 얻은 것입니다. 그것도 값없이 주심으로 영생을 얻은 후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된 것입니다. 포도원의 품꾼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한 대가로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얻고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면서 아마도 이런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초기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들어온 제자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이든 초기의 성도도 있고 나중에 온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 공통점은 주 안에서 하나의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고 다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이른 아침부터 일한 품꾼처럼 다투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하시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잘 생각하여 보십시오. 포도원에서 일한 품꾼을 보십시오. 먼저 와서 일한 사람과 나중에 와서 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주인은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이라고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든 한 시간 일한 사람이든 다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할 중요한 각오를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모두 공평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아침부터 일하든지 한 시간 일하든지 오직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지팡이교회는 나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단지 지식적으로만 듣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기록한 것처럼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당 안에서만 성도인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을 믿는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미 제자가 된 성도에게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귀가 있으면 오늘의 말씀을 마음으로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제자 된 지팡이교회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의 마음으로 남보다 많이 일하면서 결국은 큰 보상을 해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선행과 봉사를 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라고 하면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닌 것입니다.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를 소유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낮은 자로서 섬김으로 봉사하여 주셨습니다.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진정한 섬김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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