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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4:15-22
강설날짜 2017-11-19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마24:15-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 안에서 많은 것을 말씀하신 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마지막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 안에서의 가르침이 끝난 후 제자들은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전한 메시지를 알기 때문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앉아 있을 때 제자들은 두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라는 것이고 둘째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후 “재난의 시작”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자신들을 그리스도라 하면서 미혹하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 기근과 지진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심도 없이 거짓말로 미혹하는 것이고, 전쟁과 기근과 지진으로 점점 평화는 사라지면서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의 시대에서 신앙의 생활을 하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신앙의 자세를 알려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재난의 시작”이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좀 어렵지만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이렇습니다. 출산 전에 느끼는 고통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출산을 앞두고 진통을 하는 것은 아기가 출생할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은 주의 재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모가 진통이 왔다고 해서 바로 지금 아기를 출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의 시대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출산을 앞둔 산모처럼 진통을 당하지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의 길을 잘 가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해산의 고통과 같은 진통을 당한다는 것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핍박과 미움을 당하지만 승리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생활하는 당신님의 백성에게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심으로 산모의 진통은 당신님의 제자들이 겪게 될 핍박과 미움 그리고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서로 실족하도록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도 많아지고,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강설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에 JTBC에서는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앵커브리핑에서 "교회는 미국서 기업이 되었고 한국에선…"이라고 하는 뉴스를 보고 있습니다. 이 일로 더 많은 사람이 핍박과 고통을 당할 것이고 사랑이 식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복음은 증거 될 것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복음의 은혜가 강력하게 증명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제자는 끝까지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출산을 앞 둔 산모의 진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모의 진통과 같은 시대에서 새 새명을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합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심으로 ‘세상’은 ‘사람이 거주하는 영역’을 말씀하여 주심으로 환난과 핍박을 준다 할지라도 흔들리거나 요동치지 말고 복음을 증거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박득훈 목사는 "슬프고도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비극을 과거이든 오늘이든 미래에도 볼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교회란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런데 명성을 따라가고자 하는 자들의 탐욕이 넘침으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손석희 아나운서의 미국 상원의 채플 목사였던 리처드 핼버슨 목사의 말을 인용하여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지팡이교회는 김재환 감독이 만든 영화 ”쿼바디스“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기억이 남는 것은 "교회는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철학도 아니요, 제도도 아니요, 문화도 아니요, 기업과 대기업이 아닌 교회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가짜 목회자와 성도 등에 의해서 ‘강도의 소굴’이 되고 있습니다.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린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를 더욱 잘 알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오늘 본문 15절에서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눈에 띄게 신중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질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러므로’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만 보아서는 좀 어려운 말씀이지만 병행본문인 눅21:20절을 보시면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누가는 좀 더 풀어서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의 입장에서는 이방인을 위한 글이기 때문에 그들이 알 수 있는 언어로 사용하지만 마태는 유대인에게 증거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단9:26-27절을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니엘의 예언이 주전 167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시리아의 통치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포위하고, 성전의 제단을 없애고 그 곳에 제우스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시대를 잘 알 수 있도록 유대인들이 역사로 경험한 것으로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이야기하시면서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셨습니다. 주의를 하시면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신속하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시면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어디로 가라고 하십니까?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과거의 일을 기억한다면 산으로 도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전 66-70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100만 명을 학살을 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에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펠라 산으로 도망하여 피신을 한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양우리를 만들고 자기 집을 지었던  ‘숙곳’ 이라고 추정하는 곳이기도 하면서, 숲에서 질 좋은 재목들을 생산하여 이집트군대의 병거 재료를 생산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장소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알면 속히 산으로 도망을 하라고 하시면서 17-18절에서는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이 닥칠 때 집에 속한 물건들을 가지러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 만큼 긴박한 현실로 집 안으로 들어갈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물건을 소지한다고 해도 오히려 도망치는 데 방해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 매우 급하게 도망쳐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밭이나 들에 나가서 일을 할 때 겉옷을 벗어 놓고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긴박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고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9절을 보시면 이해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시는 것은 태중에 아이를 가졌거나 젖먹이는 아이가 있어서 피하고자 하지만 여의치 않는 여인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할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임신한 여인과 젖 먹이는 아이가 있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슬픔의 탄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매우 긴박하게 도망치기에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임신한 여인들은 적들의 공격을 당하여 죽임을 당했으며, 어린아이들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죽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님의 백성들이 당해야 할 고통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은 그 만큼 잔혹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20절에서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도망을 하는데 어려운 조건이 겨울과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이라고 하심으로 빠르게 도망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겨울이라는 계절과 안식일은 도망치기에 불편한 상황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의 겨울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겨울은 춥고 눈이 내리지만 이스라엘은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입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도망 칠 때 계곡 물이 불어남으로 건너가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2,000규빗 즉 대체적으로 1km를 걷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이토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빨리 도망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인 지팡이교회 성도님,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당할 핍박과 고난이 도대체 얼마나 심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시면서 여러 상황을 나열 하신 것에 대한 극치에 대한 설명을 보여준 것입니다. 본 절을 좀더 번역을 하면 “왜냐하면 그때에 큰 환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것이 일어난 일이 없고 후에도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우리말 번역본에는 원문으로는 ‘왜냐하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 에도 없으리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성도에게는 누가 있습니까?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22절을 보시면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를 보호 하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환난과 고난을 면하게 하여 주시는 것을 넘어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13절의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니라”는 말씀을 의지하십시다. 우리에게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은 더욱 나를 연단하시는 것이고, 정금과 같은 순결한 거룩한 신부로 영광을 올려 드리기 위한 것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팡이교회는 마지막 시대인 “이미”와 “아직”인 사이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심판주로서 오심니다. 우리는 그 중간에 종말의 시대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환난과 고난을 즐거워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극심한 어려움과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하거나 자신만 환난과 고난을 당함으로 하나님께서 보호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선지자가 누구였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따르는 선지자인 450명과 싸워서 승리를 했지만, 이세벨 왕비가 자신의 몸을 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왕상19:18절에서 이렇게 위로와 격려를 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아멘

 

이 세상에서 정권을 가진 자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엘리야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는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한 사랑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큰 환난이 닥쳐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두렵고 떨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그럴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더욱 사모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본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환난과 고난은 세상을 향한 복음의 메시지가 전달됨으로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있는 남은 자를 통해서 증거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가 더욱 다가오면 올수록 환난과 고통은 감하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조롱과 비방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십시오.

 

저는 오늘 80년대에 복음송가로 잘 알려진 가사로 마무리를 하고자 합니다. 그 때의 신앙을 생각을 하면서 주의 길을 잘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2집입니다. “오늘 내게 한 영혼 보내 주시옵소서, 죄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매이는 자에게, 오늘 내게 한 영혼 보내 주시옵소서, 갈 바 몰라 방황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아무도 사랑 않고 관심도 없는 그들에게 날 이끄사 전할 말 주소서, 오늘 내게 한 영혼 보내 주시옵소서, 죄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매이는 자에게, 오늘 나를 진리로 인도하여 주소서, 말씀 따라 순종하며 늘 살게 하소서, 아무도 원치 않고 행치도 않는 주님 말씀 순종하여 이 몸 바칩니다“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는 바로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심판이 아직 멀다’고 말한다. 누가 심판 날이 아직 멀다고 네게 말했는가? 심판 날이 참으로 멀다고 할지라도, 너 자신의 심판 날이 아직 멀다고 할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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