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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4ㅣ23-31
강설날짜 2017-11-26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은 택함을 받은 자도.....(마24:23-31)

지팡이교회는 지난 주일에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에 대한 강설을 들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그야말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자들과 타락한 세상을 향해서 당장이라도 심판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를 알도록 하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여러 가지 사건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세상의 종말 즉 심판이 온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세상의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기억 하십니까? 첫째는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라는 것이고, 둘째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입니다. 마지막에 될 일을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환난과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심으로 다니엘이 전한 메시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하심으로 병행본문인 눅21:20절에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심으로 그 날은 가장 힘든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하심으로 긴박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알면 속히 산으로 도망을 하라고 하시면서 겉옷을 가지러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겉옷을 가지러 가지 말라는 것은 매우 급하게 도망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의 슬픔에 대해서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하신 것은 슬픔의 탄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슬픔의 탄식은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이 그 만큼 잔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도망을 하는데 어려운 조건이 겨울과(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임)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유대인들은 안식일에 2,000규빗 즉 대체적으로 1km를 걷지 않는 것이 전통)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는 은혜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핍박과 고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혹독한 환난과 고난이 임할 것을 알려주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니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는 택하신 당신님의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지키시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절망할 지경에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단지 나에게 대단한 믿음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힘입어 감당할 뿐임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길을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서 2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여도 미혹도 당하지 말고 믿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미리 경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환난과 고난만 극치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에는 거짓과 미혹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욱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거짓으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면서 미혹하지만 속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로만 거짓과 미혹으로 유혹하는 것을 넘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 말씀은 바로 24절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무엇을 사용하여 미혹을 합니까? ‘큰 표적과 기사“입니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사탄과 그의 악한 세력이 한 일입니다. 사기꾼들은 가짜지만 정말로 진짜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기꾼에게 또한 사탄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사랑하지 아니함으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도적 같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인 지팡이교회는 표적과 기사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신비적인 놀라움으로 유혹을 하고, 그들의 말이 진실하다고 하는 증거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믿어야 하는 것이지, 성경에서 벗어난 것을 믿으면 위험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잠시 생각하면 이런 표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의 사자”요 “능력의 사도”라고 하면서 정신없이 맹종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면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구원을 얻고 싶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속이고자 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의 모든 재물을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선한 일에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5절의 말씀을 통해서 당부를 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하십니다. 다시 한 번 더 예수님께서는 ‘권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로 미혹하는 자들의 사역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권면의 당부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권면의 당부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26절에서는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자들을 속이기 위해서 ‘광야’와 ‘골방’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철학적이요, 신비적이요, 진리를 잘 전파한다고 하여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왜 광야와 골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서 권면을 하셨습니다. 광야는 잘 아시겠지만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직무를 수행한 장소이고,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천사들에게 이끌려 광야에 나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장소이기에 더 속이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초대교회를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하는 주장을 하면 넘어가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골방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광야가 공개된 장소라면 골방은 은밀한 장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골방의 의미는 밖에서는 도저히 볼 수도 없고 말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내부에 있는 방을 의미합니다. 즉 은사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장소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와 골방의 장소를 얘기 하면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그들을 따라 가지 말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빛이 되어라 하시지 숨어서 특별하게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27절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서 비밀리에 오시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적이고 가시적인 사건입니다. 광야와 골방에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십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는 번개를 사용하심으로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인다고 하심으로 하늘 전체를 가로지르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에 미혹된 사람들이 잘못된 종교에 전 재산을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상당히 난해 구절이기도 합니다. 앞의 내용과는 무관하거나 비약이 심한 것으로 보여 무슨 뜻으로 말씀하여 주셨는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심판이 무르익은 상황에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당시 로마의 군대를 독수리로 상징) 병행본문인 눅17:37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질문을 함으로 답변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노아의 방주, 롯의 때와 같다고 하심으로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라고 한 것입니다. 그 대답으로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을 가져오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시체를 먹는 새의 독수리를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의 재림에는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지만 심판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고, 참된 성도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장소가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오시는 것이고, 심판과 구원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님의 다시 오심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시면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날 환난 후에’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즉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특별한 환난이 닥친 후 그 즉시 주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특별한 환난보다는 여러 날에 걸쳐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될 환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원문을 좀 더 직역하여 보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즉시 그날들의 환난 뒤에 해가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달이 그것의 빛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별들이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로 ‘그날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 바로 일어날 하늘의 정조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마지막으로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묵시적인 표현들은 마지막 시대의 종말론적인 심판이 도래했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 즉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있을 때(마27:45) 일시적으로 본래적인 기능을 상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상상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씀아시면서 당신님만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 후에 즉시’라고 하심으로 갑작스럽고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하여 주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 후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신 후 30절에서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인다는 것은 마지막 시대의 완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때 주의 재림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7:13절을 인용하심으로 인자(예수님)이신 당신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행1:11절에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실 때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을 하면서 심판을 면하고자 하지만 늦은 것입니다. 후회를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모든 존재들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질서가 흔들리고 붕괴됨으로 두려움과 고통으로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늘 한결같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예언하여 주셨고, 당신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했지만 믿지 아니한 자들은 장례식에서의 통곡처럼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셨을 때와 분명히 다른 것은 다시 재림의 주로 오실 때는 온 세상의 주권자로서, 왕으로서 세상에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때 온 세상의 주권자요, 왕으로서 예수님은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 즉 성도를 모으십니다. 31절을 다 같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나팔소리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에서 종말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즉각적으로 알아듣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통곡이지만 예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통곡이 아닙니다.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택함 받은 자를 모으십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모든 나라들에서 영적인 추수를 함으로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을 당해도 택함을 받은 자로서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지팡이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온전하게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의 환난과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택함을 받은 우리는 감사함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앙 생활할 때 늘 용기와 희망을 얻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늘 소망하던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께 승리의 감사를 올려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면서 복음의 증인자로서 열심과 열정으로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삶이 늘 예배라고 했습니다. 삶이 예배인 우리를 보면서 세상에 속해 있지만 택함을 받은 자들이 참된 복음을 듣고 돌이킬 것입니다.

 

세상은 더욱 살기가 힘들어지고 있으며, 거짓으로 자신들이 그리스도라고 칭하면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면서 표적과 기사로 속일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택함을 받은 자라도 물귀신 작전을 사용해서도 속이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서 고난은 택함을 받은 자들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경고하여 주심으로 인내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재림의 시기는 모르지만 참된 믿음을 소유한 지팡이교회는 기쁨으로 기다리면서 주의 길을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노심초사 하지 마시고 내 마음과 걸음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주님께 맡기면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 날에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택함을 받은 우리에게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그 일을 위해서 힘을 쓰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고난은 나를 정금과 같이 연단하여 주심으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늘 주님만 바라보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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