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심판(부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by 전은덕 posted Jan 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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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5:31-46
강설날짜 2018-01-07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천국은~와 같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끝까지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사용하여 ‘충성됨’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님의 재림을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소망하면서 청지기적인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의 날까지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이 땅에 남아 있는 종들에게 맡기시고 당신님의 백성들인 청지기를 통하여 계속 이루어 가시고 있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충성된 종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각각 그 재능대로’ 즉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서 적절하게 종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분량대로 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청지기의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고유한 인격과 역할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누룩처럼 확장되기를 바라십니다.

 

지팡이교회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맡기셨다는 것을 아시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재능이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기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의 믿음의 분량대로 맡기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시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사역을 감당할 때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바로 주님의 재림으로 결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음성을 듣는 귀한 성도기 되기를 소망합니다. 영적인 긴상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믿음의 분량의 능력대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마25:31-46절을 사용하여 “마지막 심판”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오늘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강설로 두렵고 떨림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주의 길을 잘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서는 무화과 나무의 교훈,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처럼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마치 비유인 것처럼 목자, 양, 염소 등이 나열되지만, 오늘 말씀은 미래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임할 심판 날에 대한 묵시적 맛보기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마지막 시대를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에 대해서 심판자인 동시에 왕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 31절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하심으로 ‘자기 영광’ 가운데 오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심판의 보좌로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요5:27-29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심으로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 대한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기다면서 마지막 날에 종에 대한 결산이 무엇인지를 더 확실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 날 즉 마지막 심판에서는 모든 민족 즉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두 심판의 대상으로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32절을 보시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신자와 불신자를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심으로 진짜 최후의 심판이 있을 재판정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낮에는 같이 풀을 먹도록 구분 없이 하지만, 저녁에는 일교차가 큼으로 잠을 잘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양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그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즉 짐승만 들어갈 수 있는 문 울타리 위에 앉아 양쪽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양과 염소를 서로 각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을 들어서 신자와 불신자를 양과 염소로 말씀하심으로 마지막 심판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33절에서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명료성으로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나누심으로 오른편은 의로운 자리로 표현하고, 왼편은 악한 자 즉 심판의 대상자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있는 다섯 처녀와 달란트의 비유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의 재림에 오른편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염소의 문인 그곳에는 미련한 자들과 게으른 종이 들어감으로 영원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서는 여러 비유로 가르쳐 주졌지만 이제는 최종적으로 마지막 심판에 대한 명백한 말씀으로 가르치심으로 모든 민족이 대상자라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은 당신님의 영광 가운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으로 그 누구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못하게 될 것을 반영한 것입니다. 모든 자들이 부인하지 못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34절에서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십니다. 오른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으로 ‘복 받은 자들’이라고 하심으로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복’은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은(구원을 받은) 복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도 나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예비 된 나라의 상속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충성된 종으로 복음의 전도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35-36절을 보시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힘든 현실을 여기서는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됨, 헐벗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로 여섯 가지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을 나열한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힘들 때 가장 현실적으로 도움을 준 것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의인들은 37절에서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라고 하십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긍휼을 베푼 일들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당한 가난의 상징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38-39절에서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라고 하는 것은 그들은 사람들에게 한 일을 주님께 한 일이라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겸손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긴 것을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6:3-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것을 겸손히 지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나 혼자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대해서 엡4:15-16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하심으로 교회는 각 지체들로 통하여 당신님의 교회로 즉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로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사랑 안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 그리고 각 지체의 믿음의 분량대로 서로 섬길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것을 확신합니다.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참된 신앙의 생활을 한 ‘착하고 충성된 종’에 대해서 예수님은 39절에서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로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고, 헐벗고,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보는 것이 ‘내 형제에게 행한 것이 곧 네게 행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음성을 듣게 될 때 얼마나 기쁩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마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것을 떠 올리시면 더욱 은혜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내 몸 같이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성도입니다. 주님께서 청지기로 또한 복음의 증인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셨습니다. 풍성한 열매가 맺힐 수 있도록 ‘사랑 안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잘 감당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와 반대로 왼쪽편에 있는 불신자에 대해서 40절에서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옥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리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돌이키기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마무리 하고 있음으로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선언은 매우 강하고 직접적인 것입니다.

 

교회가 바르게 가기 위해서는 겸손한 자세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 안에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크냐’라고 다툼이 있었을 때 마18:4-5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임을 알리시기 위해서 가장 작은 자를 들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도의 바른 신앙은 묵묵히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언약의 열 가지 말씀(십계명) 중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입니다. 예수께서는 소외받고 궁핍하며 고통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당신님을 일치시킴으로 그들과 강한 연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서 성육신으로 오심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연약한 한계 아래 머무시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고뇌 그리고 섬기심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임금이신 예수님은 42-43절에서 그들이 저주를 받은 이유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른편에 있었던 신자들과 정반대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통곡을 하면서 주여 주여라고 하면서 우리가 언제 섬기지 아니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대의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한 일을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긍휼로 섬기지 아니한 것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작은 일부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악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자인 왼쪽편은 심판에 대한 음성을 듣자마다 44절에서 이렇게 반문을 합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저주의 판결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이웃에 대한 악행과 무관심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왕이 궁핍에 처했던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주님의 성도입니다. 그러면 어떤 신앙인의 자세로 제자의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호소를 들은 심판자이신 임금은 45절에서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40절과 대칭되는 말씀으로 여기서는 ‘내 형제 중에’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의 심판은 하나님의 형상을 무관심하게 대한 염소 즉 왼쪽편에 있던 자들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생략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만큼 심판은 여유가 없음을 묵시적으로 꾸짖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46절에서 최종판결을 내리십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영벌과 영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정리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벌과 영생은 독특하게도 영원하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영원한 것처럼, 지옥이라는 칭하는 그곳도 영원히 형벌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영적인 긴장 상태에 있는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하지만 늘 주님만 바라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증인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더욱 타락되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가짜 믿음으로 죄 짓는데 악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영원한 처소에 들어갈 날을 위해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잘 감당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심판은 양과 염소 즉 영벌과 영생으로 나눠지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하나님의 형상인 백성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돌봐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미래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현실 도피적이거나 개인주의적 신앙관이 형성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단지 미래적인 것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실에 와 있으며 또한 ‘아직’이라는 긴장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미래적인 요소만 아니라 현재적인 요소를 드러내심을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 그리고 오늘 말씀인 ‘마지막 심판’에서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종말 사상을 지워버리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추수를 통해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듯이 마지막 심판 날에 당신님의 백성과 사단의 자손을 가려내시고 그들을 심판에 처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바라본다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의 심판자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충성된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