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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6:14-30
강설날짜 2018-01-21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최후의 만찬)- 마26:14-30)

 

저 번 주일 지팡이교회는 “이 여인이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말씀을 누렸습니다. 그 말씀을 잠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한 여인인 마리아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를 자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모두 붓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생각을 해야 하지만, 그 반대로 분개하고 책망을 했습니다. 병행본문인 요12장을 생각하면 그 향유를 가지고 아주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못한 것을 계속해서 아쉬워하며 격분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한 행동을 목격하고 있는 ‘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제자의 입장도 맞는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면 고난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수난을 여러 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한 행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예수님께 질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 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행동에 대해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하심으로 당신님의 장례를 위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행동에 담긴 깊은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대한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위해서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줄 주 없는 사랑 중에 예수님께서 주신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복음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누리에 전하여 질 것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여인으로 향유를 붓은 행동은 복음에 대한 이해와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성육신으로 오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삼위 하나님께 영광과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을 통해서 살아있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 중에 가륫 유다가 배반을 하고 있습니다. 14-1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15.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저번 주 말씀은 마리아를 통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첫 시작은 정반대로 배신입니다. 그것도 재정을 감당하던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향유를 매우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판 가격은 ‘은 삼십’으로 그 당시 노동자의 4개월 월급이었습니다. 또한 출21:32절에 의하면 종(하인)을 받아 죽인 소의 주인이 내는 벌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적은 금액을 위해서 유다는 자신이 누구에게 접근해야 하는지 알고 있던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유다는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이름이 두드러지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면서 중심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제자들의 이름을 다 알지 못할 것이지만 가룟 유다는 알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도 잘 알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면서도 백성들의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던 중에 가룟 유다가 먼저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 후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얼마에 넘겨주면 좋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비로소 대제자장들을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종의 가격 즉 ‘은 삼십’으로 판 것을 생각하면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병행본문이 눅22:3절과 요13:2,27절을 보시면 사탄 즉 마귀가 들어가서 가룟 유대를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이 근거로 생각하면 유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은 삼십’에 넘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공생애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도 받았고, 이적과 기적도 직접 목격한 유다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한 번 고민해 보십시오. 사탄의 유혹은 그 만큼 큰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많은 고민과 회의 그리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아마도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장례를 준비를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을 하고, 온누리에 자신들이 왕처럼 분봉왕으로 통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부활을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왜 예수님을 믿는지 모르면 어쩌면 유다와 같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왜 믿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심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으로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사탄의 유혹, 인간의 결정과 책임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중대한 사건은 이런 복합적인 여러 이유 가운데 가룟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드디어 무교절 즉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17절을 보시면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유대인들은 목요일 낮에 양을 잡아 같은 날 저녁에 유월절에 식사를 하기 때문에 질문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출애굽의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 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18절에서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준비하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당신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모친이 마리아의 요구에도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4)라고 하셨지만 여기서는 직접 말씀하심으로 특별한 때를 강하게 의식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고 하심으로 종교지도자들과 피하기 위한 것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집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푸스에 의하여 유월절에는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양 255,600마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평균 10명이 한 마리의 양을 먹었다고 가정하면 250만 명의 사람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9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이 준비를 한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자세히 기록을 하지 않지만 병행본문인 막14:13-15, 눅22:8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성 안으로 가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남자를 만나서 그를 따라가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장소를 알려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남자가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것을 아주 예외적인 것임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식사를 할 준비다 다 되었을 때 20절을 보시면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 중에 한명이 당신님을 팔 것임을 선언하시는 것이 21절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질 것이며, 역할을 할 사람이 바로 제자들 중에 한 명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룟 유다를 지목하지 않고 ‘너희 중에 한 사람’이라는 말로 극적 긴장감을 주는 것입니다. 이미 제자들은 마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던 자들입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배신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엄청 놀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번 유월절 식사는 우울하고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놀라는 가운데 특히 유다는 더욱 놀랬을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면서 각자 마다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질문의 표현이 아니라 ‘결코 나는 아니지요?’ 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나는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에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심으로 심히 근심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단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있는 자 가 배반자라는 사실만을 말하십니다. 병행본문인 요13:26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빵을 찍어다가 유다에게 주면서 당신님의 떡(빵)을 받는 자가 배반자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24절에서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면서 당신님을 파는 자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고난의 길을 가거니와 메시야를 배반한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배반한 것에 대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배반자의 운명을 이야기하심으로 배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로운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의 비참한 운명을 내다보고는 그 영혼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신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악행을 저지른 유다는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면서 25절을 보시면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고 합니다. 마태는 ‘예수를 파는 유다’라고 지칭을 함으로 이미 그는 배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랍비’라고 호칭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랍비’라고 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마음에는 자신의 ‘내니이까’하면서도 다른 제자들처럼 부인하는 목소리에 합세를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의 계획을 아시고 ‘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유다의 질문을 받고 그것을 고백으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 유다에 대한 것을 자세히 기록을 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기록을 하십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요13:30절에서 유다가 음식을 먹던 중에 나간 것을 기록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의미를 특별하게 생각하시고 은혜의 자리에서 유다가 떠나게 하신 것은 뜻 없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시고, 은혜에 참여하는 진정한 조건이 무엇인지 알리고자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성찬은 오직 참된 믿음으로써만 참예할 수 있음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의 의도처럼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는 의미를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26절을 보시면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면서 당신님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유월절 떡을 먹음으로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먹음으로 구원을 누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실 당신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제자들에게 먹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초대하고 계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27-28절에서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포도주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당신님의 피 즉 언약의 피라하고 하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양의 피를 가지고 문설주에 바름으로 구원을 얻은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덮는 피가 더 이상 짐승의 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는 우리의 신령한 생명을 지탱하는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주의 몸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신령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신령한 생명의 양식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29절에서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대개 유월절 식사 중 포도주를 네 번 마신다고 합니다. 첫 번째 잔은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는 것이고, 두 번째 잔은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큰 재앙으로부터 구속하여 주신 것이고, 마지막 네 번째 잔은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임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마지막 잔을 마시지 아니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마시겠다는 의미는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오던 유월절은 그림자였지만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옛 시대를 초월하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종말론적인 은총의 나라,영광스러운 영생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 나라의 복은 예수님 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너회와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며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멀리서 가리키는 것을 바라볼 뿐이요 손으로 만져 볼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생생한 역사적 현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심으로써 이 중대한 사실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30절에서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고 하심으로 찬송으로 뜻 깊은 마지막 유월절을 마치신 후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간절히 부르짖기 위해, 범죄와 함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참 생명의 소망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은 혼신의 힘으로 아버지께 부르짖기 위해 감람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본래 난해한 말씀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해석이 낳은 논쟁과 분열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난해한 말씀으로 포함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1:23-2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재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회심 자들에게 자신이 이 기록을 구두로 직접 그들에게 전함으로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은혜롭고 복된 성만찬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몸이 상하고 찢김을 당하면서도 당신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참된 제자로서 주의 길을 잘 가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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