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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6:36-46
강설날짜 2018-02-04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마26:36-46)

삶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아주 큰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님의 백성인 유대인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당신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넘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만 배신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유다나 그 외 제자들도 근본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도 배반 할 것을 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심으로 당신님의 수난을 보면서 스스로 실족하여 배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약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이 흩어진다고 하셨지만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심으로 당신님의 제자들을 다시 세우시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특별한 장소로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곳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출발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을 해야 하지만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심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자신 넘치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제자들도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배신을 한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시험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연단하고 든든한 바위처럼 견고히 세우시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된 구원자로 고백한다는 것은 사람의 힘이나 능력 그리고 지혜와 지식 등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여 주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신앙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러 간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두렵고 심각한 십자가의 시험을 함께 격고 있는 과정을 잘 소개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십자가에 대한 고난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여러 번 당신님의 수난을 통하여 죽음을 당하고 부활할 것을 말하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가 바로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감당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가 귀신에 들렸을 때 막9:29절에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당신님의 죽음을 앞두고도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신뢰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마음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예수님만 간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간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사역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곳”을 뜻하는 장소로 감람나무에서 기름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님께서 임박한 고난을 알면서도 땀을 피 방울 같이 쏟으시며 십자가 시험의 마지막 순간을 겪으신 장소가 기름을 짜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 오시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좀 떨어진 것은 당신님의 마음을 꺼내 보이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는 장소로 고난과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이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하게 세 명의 제자들을 어떻게 하시고 있습니까? 37절을 보시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들은 예수님이 늘 가까이 데리고 다니신 제자들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습니다. 왜 더 가까이 데리고 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장 가까운 제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약간의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특히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와서 간청을 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잔을 기꺼이 마시겠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마20:20) 이런 점을 생각하면 십자가의 잔 즉 죽음의 잔을 마시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적으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에게 보이는 얼굴의 모습은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기록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이시라는 것으로 잠시 후 당할 고난과 죽음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께서는 38절에서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을 생각하면 십자가의 고통은 이미 이 때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죽음의 고통이 그처럼 두렵고 떨림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체면도 버리면서 보여주신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가장 무서운 것이고 막상 그 죽음 앞에 서면 자신의 마음이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신성으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성으로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의한 불안과 고뇌에 찬 고통은 신성도 순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39절에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면서 성부 하나님에게 온전한 정직함과 복종 속에서 당신님의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는 것은 아주 간절한 기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미 시작된 십자가의 고난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확고히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의 본보기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기도를 마치시고 세 명의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40절을 보시면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여전히 제자들은 실패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제자들을 책망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제자들을 책망한 것 보다는 제자들에게 닥칠 시험이 무섭고 심각함을 일깨우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나중에 시험과 실패를 겪은 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는 것은 십자가의 시험의 심각성을 일깨우신 것이기도 하고 사랑이 담긴 말씀임을 기억하도록 하신 배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41절을 보시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지만 그는 예수님과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에게 닥친 십자가의 고통은 전혀 동참하지 못한 채 연약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을 아십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심으로 칼과 뭉치를 가지고 오는 성전 경비들과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장로들의 사적인 경호원들로 구성된 앞날의 모습에서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또한 우리를 견고하게 하지 않으시면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앞에 있는 시험을 마음으로는 이기고자 하지만 실제적으로 육의 몸은 약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육신의 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하는 길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기를 부탁드립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43절에서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어떻게 보면 동일한 기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기도를 계속해서 했다고 해서 중언부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가 그만큼 중대하고 심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장 절망스러울 때 많은 기도보다 ‘주여’라는 고백 속에 자신의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반복하여 기도해야 하는 절박하고 힘든 시험이었다는 것을 잘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과 완전한 순종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마6:5-13절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그 중에서 10절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말씀은 오늘 본문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와 표현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이 기도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예수님의 절대적인 순복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도울 정도로 힘겨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까지 되었다”고 함으로써 끈질긴 사력을 다하는 기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계속하면 할수록 더욱 힘을 얻고 확신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시험이 온다 할지라도 기도의 힘은 이처럼 큰 것입니다. 내가 시험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할 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잘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43절을 보시면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제자들은 눈이 피곤함으로 인해 다시 잠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제자들은 육신의 피곤함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육체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난을 이기시고 마침내는 승리하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것이 사랑 중에 이런 사랑이 없는 아가페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남기어 두시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4-45절입니다.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예수님은 어려운 상황을 앞두고도 충분히 기도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워도 제자들의 눈꺼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하셨던 일들을 알지 못한 채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의 진정한 사역의 의미를 안 후에는 “사도”라는 표현처럼 귀한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심으로 단순한 잠이 아니라 평안과 안식의 잠을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승리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무거운 짐과 고난과 환난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심으로 평안으로 인도하시고 쉼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인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46절에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심으로 당신님께서 붙잡힐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위기 속에서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하시면서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당신님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함께 가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 안에는 제자들도 나중에는 승리함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복음의 증인 자로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은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아도 성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통제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 하면서 수양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눈꺼풀이 내려오더라도 어려움과 위험 가운데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성령께서 함께 동행 하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시는 마음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만일 적군이 대군을 몰고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때에 잠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적군을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위로요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담대하게 사탄이 올무를 놓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서 승리하시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록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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