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희롱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by 전은덕 posted Mar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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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7:27-44
강설날짜 2018-03-18

“빌라도의 재판이 의미하는 예수님의 판결”이라는 강설의 의미를 기억 하십니까?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번 주일 말씀의 본문을 기억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심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한 후 결박하여 끌고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요18:41a절을 보시면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 가지로 고소를 합니다. 눅23:2절은 구체적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기억을 하고 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즉 정치범으로 고소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는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라고 한 것을 보면 풀어주고자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산헤드린 공회의 집요한 고소에 재판관으로서의 양심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풀어주든 사형을 시키든 진퇴양난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면서 통치하는 방법으로 명절이면 그들이 원하는 죄인을 방면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 아니면 바라바를 선택하는 기로에 있었지만 주저 없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라바로소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거세게 반발하는 백성들의 선택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자신은 무고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빌라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지만 손을 씻는 것은 무책임한 양심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과 같은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빌라도가 선고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가리고 온갖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재판에서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민란이 무서워서 결국 양심을 속였습니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하여 은혜의 강설을 누리지만 더 구체적인 재판의 과정은 요한복음이 더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법정에서도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세상 죄를 지고 어린양처럼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오늘은 마27:27-44절 말씀을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희롱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라는 강설로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27-29절을 보시면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요 성도인 나는 어떠한 마음이 듭니까?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온 군대’를(300-600명) 모아 고문을 합니다. 군인으로부터 조롱과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군병들은 로마 군인도 있지만 유대 주변의 나라에서 선발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왔을 때, 당연히 반유대적인 감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는 사람은 조롱과 멸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군인들이 입는 홍포를 두르게 했습니다. 왕이 쓰는 금면류관이 아닌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갈대를 손에 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갈대를 들도록 하는 것은 왕의 권력과 통치를 의미하는 지팡이(홀)를 빗댄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를 갖추면서 무릎을 꿇고 희롱을 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거짓으로 평안을 말하였지만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참 평안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가져다 줄 메시야로 그들 앞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1:20절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희롱 하면서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30-31절을 보시면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님을 형식적으로 왕처럼 예를 갖추면서 희롱을 하면서 침 뱉고, 갈대로 머리를 치고, 예수님의 옷을 입히면서 처형지로 출발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옷을 입히는 것은 죄수의 옷을 벗기지 아니한다는 당시의 관행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형지로 가야하는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32절을 보시면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군인으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서 심문을 당하셨기 때문에 골고다까지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눈에 띤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레네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한 것입니다. 구레네 사람인 시몬은(막15:21) 유대인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온 것입니다. 그는 구레네가 의미하는 것처럼 북 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사람입니다. 막15:21절 말씀과 롬16:31절의 말씀으로 유추하면 시몬의 아들들이 교회 안에서 유명한 인물로 축복 받은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은 알렉산더 루포의 아비라고 기록을 하고, 로마서를 기록하는 바울은 루포에 대해서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하는 것을 보면 추측이지만 초대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연하게 십자가를 진 시몬은 자신의 가정을 구원하는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골고다까지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당시에 십자가의 처형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수는 가로로 된 나무를 지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모양 중에서 가로의 나무를 가지고 자신이 처형을 당할 곳에 도착하면 세로로 된 기둥은 이미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33절을 보시면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처형장소인 골고다에 도착한 것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아람어입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마도 처형을 많이 하는 장소이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아담의 해골”이 묻혀 있다고 주장을 하지만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장소는 오늘날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 성 바깥이었다는 것입니다. 해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골고다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예수님을 죽음의 장소로 인도함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활로 승리하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군인이 예수님을 못 박기 전에 하는 행동이 있었습니다. 36절을 보시면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포도주를 제공하는 관습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마취제로 마시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맛보신 후 마시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거절을 한 것입니까? ‘쓸개 탄 포도주’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쓴 맛을 내는 약초(?)를 사용함으로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동정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위해서 희롱을 당하시면 서도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조롱을 합니까? 35-36절을 보시면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것도 입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 않아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제자들이 와서 훔쳐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27:54절에서는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시고 많은 이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고백을 합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지만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37절을 보시면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렇게 하는 것도 당시의 관행으로 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복음서마다 “유대인의 왕”으로 기록함으로 로마 황제를 거역한 반역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세상에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고발한 죄목이지만, 역설적이게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병행본문인 요19:19-20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는 히브리어,로마어,헬라어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죄 패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알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대제사장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는 것을 거세게 반발하였습니다. 요19:21절을 보시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도록 요구 한 것은 무기력하게 고난과 수모를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가 자신들의 왕이라는 것은 스스로에게 모독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은 빌라도는 22절에서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하면서 빌라도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아니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고 쓴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진퇴양난에서 빌라도는 민란을 두려워한 마음을 드러낸 글이라 생각됩니다.

 

십가형을 당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을 당하실 때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38절을 보시면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과 함께 처형하기로 결정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강도와 함께 처형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과 동일한 죄인의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모든 것을 버림받은 가장 낮은 신분이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죄를 지니고 있는지 죄패를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행동을 합니까? 39-40절을 보시면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머리를 흔드는 것은 조롱과 모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있으면서 어떻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는 것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성전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성전의 의미를 아는 목회자도 성공을 하기 위해서 속이는 것은 저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성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지팡이교회 홈이지를 보십시오. http://reformch.org/board/5440 마24:1-2절의 말씀을 사용하여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예언하다”라는 강설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2:21절에서 분명하게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었지만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는 조롱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온누리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님의 몸을 완전한 제사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제사와 성막을 허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참 성전을 짓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는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하지만,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 성전의 의미를 모르는 그들은 41-42절에서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무지해서 그렇다하더라도 가장 성경의 말씀을 잘 아는 그것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죄 사함의 은혜가 베풀어지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복음의 증인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계속해서 43-44절을 보시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들은 조롱하는 것을 마무리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언급하면서 조롱을 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지금은 골고다 언덕에서도 동일하게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이면 당장 내려와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롱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당신을 구원하지 않느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만 조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는 두 강도도 같이 욕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눅23:39-43절을 생각하면 두 강도 중에 한 명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무죄함을 알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려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지금 조롱을 당하시만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서 그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리라”고 하심으로 그 강도는 은총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면서 가시는 길은 험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그의 마음마저 희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진실만을 말해도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이처럼 그들은 사악하게도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대로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십자가의 처형을 더 구체적으로 기록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마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생략 하면서 당신님께서 당하시는 조롱과 멸시에 구체적으로 기록을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유대인의 왕”, “성전을 짓는 자”,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의 아들”로 기록을 합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사건을 잘 알고 유대인들에게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낸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 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에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강도가 고백을 했던 것처럼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마치 종교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눅23:34절에서 군인으로부터 조롱을 당하실 때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고 하시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희롱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는 의미를 기억하기를 소망하면서 강설을 마무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