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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ㅣ1-5
강설날짜 2018-04-22

사도행전을 아십니까?(행1:1-5)

 

지팡이교회는 2년여 동안 마태복음 강설을 들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 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마무리하면서 요한복음에 대한 강설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글입니다. 마태복음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더욱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을 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존 맥아더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교회는 성경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문제는 성경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문화와 사회가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묻기보다, 먼저 예수가 교회를 향해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자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맥아더의 “주님 없는 복음”이라는 저서를 보면 오늘날 교회를 잘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세워져 가는지 알기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교회를 잘 알아야 하지만 어떠합니까? 교회가 교회를 모르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복음이 있어야 하지만 교회는 세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러합니까? 지팡이교회 성도님, 기독교는 복음을 증거 하는 종교입니다. 사복음서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고난이 왔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고자 배신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갈릴리에 먼저 가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행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죄인들을 부르러 오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복음서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을 통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교회의 이야기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어떻게 왔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지역에서만 예수님을 믿었지만, 어떻게 이방인이 믿게 되었는지를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었고, 선교를 어떻게 했는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 즉 바울 서신서에서 언급을 하고 있는 교회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탄생함으로 어떻게 직분 자가 세워져 가는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이면 당연히 한국사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교회이면 교회의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한 역사서입니다.

 

유일한 역사서를 통해서 지팡이교회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과 예언이 어떻게 열매를 맺히고 있는지를 알기 소망합니다. 초대교회의 열매를 통하여 오늘날의 신앙인도 같은 열매 맺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이 빛을 감당하지 아니하는 교회, 주님이 없는 교회, 세상에 물든 교회, 노아의 방주처럼 예배당 안에 있으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교회의 현실에서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부탁드립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고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처럼 열매 맺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서 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함으로 믿음이 더욱 든든해지리라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아직’이라는 개념을 아는 지팡이교회는 더욱 든든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장래에 구원만 생각하면서 물질적인 복만 생각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행위적인 삶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순종의 삶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열매를 맺는 복음의 증인 자가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지팡이교회 성도님, 왜 사도행전이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차라리 교회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영어 성경을 보면 사도행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Acts”로 되어 있습니다. 액츠를 번역하면 “행동들”, “사역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한자로 “행전”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라고 붙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개역성경은 성령이 주신 사역을 ‘사도들’이 행동한 것이라고 하여 사도행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열한 사도 그리고 ‘맛디아’와 바울 사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이라고 하기 보다는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장의 처음 부분은 사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서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부활하신 후 이 땅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합니다. 그러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은 아무런 사역을 안 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계속하여 하고 있다고 하여 사도행전이라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차라리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함께 계속해서 사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들 중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바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빌립과 스데반이 소개되고 있고, 행16:4절 이후부터는 ‘사도’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사도행전에 대한 중재자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팡이교회는 사도행전(성령행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면서 읽고 묵상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교훈적인 행실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아십시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와 괴수 중에 괴수라고 하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참 사랑을 안 후에는 땅의 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품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삼위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28장이 마무리됨으로 그것이 끝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가 계속적으로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고 제자들을 증인으로 무장시켜서 복음의 사역자로 쓰임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공생애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땅 끝까지 이르러 사역자로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들의 마음을 알면서 복음을 감당하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참하는 회심 자를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이란 의미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 왜 데오빌로에게 글을 쓴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쓴 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당연히 누가복음이 떠오를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매우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24장의 긴 이야기입니다. 긴 이야기를 사도행전은 1절과 2절로 간략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긴 이야기를 단 두 줄로 정리할 수 있는가 입니다. 저라면 1장 정도로 기록함으로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가장 중요한 것을 예수님의 오심과 당신님의 사역과 승천하신일입니다. 그러면 그것만 중요한 것입니까? 성경 66권 모두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을 강설로 듣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오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심으로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분만 편식을 하지 마시고 성경을 모두 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눅1:1-2절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고 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사도행전도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과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함으로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먼저 쓴 글’이라고 함으로 누가복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을 반복적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제자들에게 어떤 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반복해서 가르치듯이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승천하신 이후에도 우리의 “임마누엘”로 임재하여 성령을 통하여 우리 중에 행하시며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과 같이 또한 사도행전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지금도 행하시고 있다는 확신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행하시고 가르치심으로 당신님께서 시작하신 것들을 성취하실 때까지, 구원 역사를 위한 행하심과 가르치심의 역사를 졸지도 주무시지고 않으면서 함께 동행 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 자로서 복음 전도의 사명과 가르침의 사역을 감당 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교회는 이 세상의 물질과 권력을 위해서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나의 구원자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독생자로 오시었고,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방해로 중단되거나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도록 사도행전 1절 끝에는 ‘시작하심부터’라고 하는 것이고, 2절 중간에는 ‘명하시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명하시고’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교회를 통하여 사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명령만 하는 주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사명을 받아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받은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죽음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제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주님의 제자로서 장성한 분량대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데오빌로에게 글을 씀으로 예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통하여 복음의 핵심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예수님 즉 당신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계속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3절에서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당님신의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메신저요 메시지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을 함께 하심으로 위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사도행전에서도 1:3, 8:12, 14:22, 19:8, 28:23, 28:31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처음과 끝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마1:23절에서 “임마누엘‘이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28:20절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처럼 임마누엘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대명령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사도행전은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지팡이교회 성도님,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보내시어 함께 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상대명령을 위임했으니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에서 손을 떼고 제자들에게 모든 일을 부탁하는 뉘앙스가 아니라 함께 하심으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이 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하나님이 일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시키는 신이 아니라 당신님께서 일하심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서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공생애에서 가르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면서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하신일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당신님의 백성을 통해서 사랑과 성결 그리고 증인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림과 통치 그리고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3절에서 확실하게 총정리로 마무리한 후 4절에서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당부를 데오빌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눅24:49절을 보시면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공통점은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즉 약속하신 것이 우리는 성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40일 동안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약속은 성령의 임재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계승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사역은 제자로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주님의 날까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과 통치를 이어갈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도록 하시는 것은 패배와 절망, 상처와 한의 자리에 성령이 임재는 더욱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시고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단지 사람을 통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뚝심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된 제자들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제자들은 모두 위임을 받을 존재였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확실한 부활을 증명했듯이, 당신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임을 성령의 임재를 통해 제자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안 후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은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누가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변화된 성도의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론을 배웠고 산상수훈을 통해서 특히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강설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40일 동안에도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여 결국 예수님을 사형했습니다. 제자들도 공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를 들었지만 오해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고자 배신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마6:9-10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망한 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오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의미를 아는 제자들은 주님이 오셔서 하신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국가)의 세 가지 구성 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나라(국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국민과 주권은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영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눅17:20-21절에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우리 각자의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라고 하심으로 현재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눅11:20에서 예수님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 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는 곧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나 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는 과거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완전히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현재 역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임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임했고 현재 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교회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임할 그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 하는 삶이 갖는 또 다른 차원으로,종말적인 나라의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주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바리새인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약속된 메시야의 오심을 통해 시작되었고, 현재적이고 발전하는 실재로서 왕의 귀환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5절에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오해를 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성령만 받으면 능력있는 증인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초대교회의 직분자들이 세울 때도 어떠합니까? 제자들은 3년 동안 교육을 받았고, 직분자들도 그 동안 교회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서도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역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철저한 교육과 준비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성령 받기에 열 내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생애 동안 준비과정을 거친 후에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예루살렘에 있어야 하는지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가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을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때가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한 대로 지금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례를 주시면 성도는 성령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즉 신자들의 공동체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세상 적으로 볼 때는 연약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성장하기 위해서 교묘한 수를 사용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사역을 감당해서도 위험합니다. 우리에게 힘주시는 대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 때를 위해서 준비되어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존 맥아더가 말하는 대로 “주님이 없는 복음”이 아니라 ‘주님이 있는 교회’로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아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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