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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3:11-16
강설날짜 2018-07-01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0Mw8UzOEwI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가 강설하다(1)-행3:11-16

 

40년 이상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사람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지난 주 강설인 “두 사도가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 무슨 사건이?”라는 것을 떠 올려야 합니다. 당연히 기억할 것을 믿으면서 다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인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가 왜 강설(설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 시”(오후3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던 중에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을 본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최선의 길은 구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에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보았을 것입니다. 구걸하는 것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베드로처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40년 이상 앉은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앉은뱅이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베드로가 한 말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사람에게 과연 나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까? 그런데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베드로가 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귀가 즐겁고 기억이 오래갑니다. 그러다 보면 신비주의에만 관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 베드로는 강설(설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비적인 체험을 중요시 하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계시인 성경의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 시대처럼 앉은뱅이가 걸었다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베드로가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은 1절부터 26절까지 차분하게 읽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만 합니다.

 

구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간절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는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하면서 기대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서도 제사장, 율법교사, 부자, 유명한 유대교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마음으로는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두 제자로부터 들은 말은 “은과 금은 없어도”입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것이고, 구걸하는 나를 조롱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장 욕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놀라운 음성을 듣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후 제자들은 오른손을 잡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제자들은 예수님 이름으로 한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랬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곧바로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 소문이 날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기 위해서 몰려들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그 일에 대해서 강설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비주의를 행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이름을 높이 올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비한 체험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제자들은 계속해서 신비적인 것만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제자를 삼을 때 신비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택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제자를 우리는 “속사도”라고 합니다. 속사도는 자세하게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교회사에서는 이그나티우스(안디옥), 폴리갑(서머나), 유스티누스(로마), 키프리아누스(칼타고) 등이 복음을 전하다 심한 박해를 당하고 결국 순교를 당합니다. 이분들이 대표적 교회 지도자들이었고 속사도였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있기에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적을 통하여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땅끝까지 왜 ‘증인’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분부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나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전하기 위해 제자들을 감화하여 신적 권위를 성령께서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신비적인 일이 일어난 것을 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놀랬을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들이 있는 솔로몬의 행각으로 모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벽을 따라 열주가 늘어선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성전 안에서 행하고 있는 각종 의식을 지켜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또한 각종 모임과 토론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베드로는 12절에서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과 사도 요한이 개인적 권능과 경건으로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처럼 자신들을 ‘주목’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시선을 교정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3: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의 관심을 이제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이적과 기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차분하게 읽어 보시면 앉은뱅이 사건, 등장인물들, 성전 미문, 솔로몬의 행각 등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종교와 신앙” 그리고 “성전과 예수”의 대조를 그리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있는 곳은 성전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상징의 장소입니다. 또한 유대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성들이 많은 곳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앉은뱅이에 주목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제자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되는데 왜 앉은뱅이를 고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앉은뱅이는 구걸만 했지 은혜를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중요한 것입니까? 그 반대로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전에 기도하러 가지만 앉은뱅이에게 해 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복음입니까? 마치 구걸을 하는 앉은뱅이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십니까? 성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핵심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어떠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죄를 지은 후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성전으로 가야 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죄 지은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예물을 들고 성전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특히 제사장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판단만 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로마와 협력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어디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오늘날 일부분이지만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예배당은 부귀영화를 위해서 복을 빌어 주는 장소가 아닙니다. 종교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종교는 타락함으로 사람을 힘들게 하고 타락한 종교라는 것을 앉은뱅이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두 제자는 제사장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종교적인 직분도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그들에게 있는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본 예수님은 이적과 기적보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님의 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과거나 오늘날을 보시면 어디에 더 관심이 많습니까? 영혼구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육신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님이었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구원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종교와 신앙” 그리고 “성전과 예수”를 통하여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하라는 놀라운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13절에서 매우 중요한 진실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정치적인 선동가, 신성모독 자, 성전을 부인, 십자가에 죽은 사람 등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종교의 왜곡과 변질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직설적으로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즉 너희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아는 사람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이제는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음과 다른 것은 전적인 인간의 무능력을 전함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가능하여 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종교는 은혜로 구원을 받으라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즉 경건하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하고 경건의 노력을 하면 나를 미쁘게 여기사 구원하여 준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유대인의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지금 강설하려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이 신봉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그 문구를 이용해서 설명해 나갑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믿는 구약의 하나님,모세에게 당신님을 계시 하신 그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은 놀랬을 것이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죄를 지적할 때도 다른 어떤 죄보다도 민족주의적으로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한 것을 너희가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성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고, 회개를 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14-15절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복음의 큰 사실, 즉 나사렛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확연히 이야기 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끄집어 낸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 거룩하고 의로운 이’요 ‘생명의 주’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며 실족하여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불신앙을 부활신앙으로 반전시키고 있습니다. 강설을 전하고 있는 베드로요 요한이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던 자들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 때문에 당황하고 놀래면서 몰려든 유대인을 향해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장본인이 바로 너희 유대인이라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듣고 있는 그들의 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거룩하고 의로운 이’, 생명의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분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생명의 주’로서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며 그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 드로가 사도로서 자신의 본분과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밝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책임은 이처럼 예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생명의 주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신 생명의 창조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을 즉 성경에 있는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남은 자) 하나님으로 돌아와 영생을 얻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사도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님만 강조한 것입니다. 너희가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등의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은 사도들에게 시선이 집중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권능이 아니라 예수님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강조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배타적인 종교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만 전하였습니다. 나를 자랑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베드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겁쟁이요 배신자였지만, 은혜 받고, 변화 받은 제자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지워진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하여 주심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을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롬5:9절에서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강설에서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시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 곁에 온전한 사람으로 서 있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의 증인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확증적으로 16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유대인에게 결단하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처럼 예수님의 권세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삶의 불순종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당신들이 주목하여 보고 있는 앉은뱅이가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에 대한 답을 16절에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낫게 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결핍된 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는 울리는 소리라는 것을 고전13장을 통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 ‘주와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성도요 교회입니다. 나를 높이기 위해서 가증스러운 일들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으며 그 나라의 주권자가 오셨음을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능력을 주시는 것은 세상을 놀라게 하거나 능력 행하는 개인이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능력 행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방편이 되도록 하신 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요,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 목적과는 다르게 교회 성장의 얄팍한 수단이나 개인의 명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적인 것만 사용하는 것은 유혹의 위험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증거 하는 복음 사역을 위해 나타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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