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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2018.09.20 15:13

가말리엘의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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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5:33-42
강설날짜 2018-09-16

가말리엘의 권고(행5:33-42)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 탁월하거나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내가 거룩해서 선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고,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심과 갈망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들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열심히 복음의 증인 자로 생활할 수 있는지 기도와 찬송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그리고 나를 거룩하게 함으로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초대교회는 행2:42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성도가 되었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 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교회요, 성도요, 신자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생활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실제로 복음 증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라는 강설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요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순종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은 복음에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1차 감옥에 투옥되고, 그 후에도 2차 감옥에 투옥되고 있는 가운데 자신들을 심문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법정, 권력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도들의 신앙의 본질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을 예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같은 것입니다. 사도들의 복음 증거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상대명령”과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자”가 되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종교지도자들의 심문에서도 자신 있게 변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순종과 불순종 어느 것을 택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하나님께 불순종 하도록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기소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전함으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모습이니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심문을 당하고 사형을 당할 수 있는 가운데에서도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지팡이교회도 이런 신앙의 유산을 상속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사도들은 더 담대함으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고 증거 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너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하나님을 왜곡시켰고,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왜곡시키는 것은 신앙의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목숨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회개는 교회가 할 수 있는 순결과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의 특권은 복음의 증인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들만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제자입니까? 사도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내어 주신 성령을 소유한 백성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특히 가말리엘로부터 권고를 받습니다. 33절을 보시면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사도들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이 일의 증인이라는 사도들의 답변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복음을 듣고도 불순종한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면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기록함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의 변호하는 말을 들었지만 자신들의 말을 듣도록 강요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매우 분개하여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사도들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사람의 완악한 마음입니다.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애고자 한 것은 아마도 사두개인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34-35절을 보시면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가말리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산헤드린에 속한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유전을 체계화한 유명한 힐렐 학파의 원조인 ‘힐렐’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율법학자요 랍비로 오랫동안 율법 문제의 고문 격으로 공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스승이 가말리엘이기도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가말리엘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토라의 영광이 중단되었고 순결과 거룩이 죽었다”고 말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대인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가말리엘이 개입함으로 공회의 입장을 완전하게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가말리엘이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 감동한 것입니까?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을 시인하거나 그것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격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36-37절입니다.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가말리엘은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 운동은 언제나 무위로 돌아간다는 자신의 기본적인 논증을 위해 두 가지 예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예는 모두 실패한 운동이라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실패한 운동을 통하여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일도 실패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든 예는 ‘드다’입니다. 드다라는 인물은 오늘 본문에만 나오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갈릴리의 유다’로 갈릴리에서 세금에 대한 반란을 이끈 인물이었습니다. 갈릴리의 유다는 “만일 유대인들이 계속 로마에 세금을 바친다면 그들은 겁쟁이들이다”라고 함으로 백성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지만 결국 로마 총독 구레뇨에 의해 진압이 됩니다. 그러면서 그를 따랐던 추종자들은 모두 흩어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이런 예를 들어서 차분하게 논리를 말하면서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들이 옳고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대적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말이지만 왜 이런 변호를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38-39절이 중요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유대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제자들의 사상과 행동은 사람으로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지도자들이 속해 있는 유대교는 무너지지 않고 제자들의 사상과 행동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말리엘의 권고는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선포하며, 재림을 기다린다는 제자들을 처벌하고 싶어도 공회에서는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신 나간 바보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생각할 때 이번일도 두 가지 예처럼 대중운동으로 본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자신의 지혜와 지식으로 즉 세상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초대교회의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크신 일을 판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공회를 연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자신을 위한 종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가말리엘의 도움(?)으로 사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40-41절을 보시면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을 채찍질함으로써 자신들의 명령에 따를 것을 강요한 것입니다. 이전처럼 협박을 한 것이 아리라 육체에 손상을 가한 것입니다. 고전11:24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범법자들에게 주는 경고였습니다. 매를 맞다가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죄수를 발가벗겨 세 갈래의 소가죽으로 만든 채찍으로 채찍질함으로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자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겠다고 경고 한 것입니다. 이미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이것을 생각하면 복음의 증인 자에게 따르는 것은 세상의 인생역전과 같은 삶이 아니라 고난을 당함은 거의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필연적인 고난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고 지상의 사역에서 늘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삶으로 복음을 증거 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서신인 벧전을 보시면 “예수님을 위해 고난당함”에 대한 주제로 편지를 쓰는 것을 보면 고난은 나의 목숨을 살리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불순종하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차이는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오늘날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모든 종교는 같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유주의 신학자와 그들을 따르는 교단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비극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4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처럼 능욕을 당해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오히려 행6:1절의 말씀처럼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라고 기록하는 것을 보면 고난은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유대교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사수하고자 하나님을 왜곡하여 전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 사도들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고난과 능욕을 당하면서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복음이 증거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투옥되고, 채찍질 당하고, 위협과 협박을 당해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무엇을 했습니까? 죽을지언정 복음 사역을 위해 앞만 보고 간 사도였습니다. 사도들은 가말리엘이 말한 것처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영광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기독교는 배타적인 가르침과 비관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도님의 몸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도 아니고 비관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면 모든 종교는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요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도 행4:12절에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대함으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기적이 없지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사도들을 통하여 드러내시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과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한다는 이유로 협박과 채찍질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지팡이교회는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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