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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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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7:1-10
강설날짜 2018-10-07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02CsnaJJNdc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1(행7:1-10)

 

지팡이교회는 지난주일 “스데반의 활동과 거짓 증인 자들”이라는 강설을 들었습니다. 스데반은 베드로와 같은 사도도 아니었고, 나중에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과 같은 신분도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은 지팡이교회 성도처럼 봉사의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사도도 아니었지만 사도들의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된 거룩한 증인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함으로 우리가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는지 잘 안내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직 스데반은 외적인 기도보다 오직 마음을 토설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거짓 증인자들’에게 담대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중요한 것임을 스데반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 충만함으로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함으로 사도들처럼 복음의 증인자로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으로부터 고발과 위증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자유민”들(디아스포라)과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자유민들은 여러 지역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지상대명령”을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과 사도들이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지는 것을 보면서 더욱 전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말씀으로 점점 왕성하여 성장할 때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고 하면서, ‘모세를 모독’했고,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거짓 증인 자를 세운 것입니다. 거짓된 논쟁으로 스데반은 어떻게 됩니까?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데리고 왔습니다. 바로 그 때에 스데반의 모습은 마치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모습처럼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하면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닮은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거짓 증인 자들’에게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나아가야 할 교회를 생각함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의 강설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영광스러운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도 공회에서 당신님의 정체를 밝히신 것처럼, 스데반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 함으로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 잘 이행하는 사람이 본분입니다.

 

거짓 증인 자들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 왔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다’라고 했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지만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라고 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는 죄목으로 피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제사장은 고소한 내용에 대해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알기 위해서는 7장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6장과 함께 읽을 때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산상수훈과 같은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기 때문에 마5-7장이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지만 스데반은 대체적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여튼 스데반의 강설과 순교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지역으로 퍼지게 하는 파급력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스데반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초점을 아브라함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시면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하면서 긴 강설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은 55절에서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강설의 끝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데서 시작을 하고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도달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알리고자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훨씬 떨어져 있는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가 결코 유대인들의 땅이나 성전에 한정될 수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강설을 하면서 유대인의 역사를 개관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교회도 역사를 잘 이해할 때 하나님의 작정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역사의 책이요, 사실들의 책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통해 역사를 알도록 하는 것이고, 사실을 이야기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증거 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거짓 증인 자들에 의해 공회에 서 있다는 것이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음을 직감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조적으로 ‘부형들이여’라고 하는 것은 부드럽고 예의 바른 부름이며,같은 민족이요 같은 조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라고 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3절에서 하나님은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든 이삭, 야곱, 모세 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은 자식도 없는 가운데 ‘네 고향과 친적을 떠나’ 어디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일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보이지 아니하는 땅으로 당신님의 인도함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은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보이는 것에 많이 집착을 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보이지 아니하는 땅 즉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을 보면 성경은 왜 나그네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4절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약속의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하란’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란이 가져다주는 세상적인 문화와 부유한 삶에 마음이 현혹되기 쉬웠을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향한 나그네의 삶이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과 문화 등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함께 하심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 구원의 서정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땅을 생각할 때 지리적 영역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은 다만 ‘약속’의 땅으로 존재할 뿐 결코 그의 소유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비록 막벨라 지역 무덤에 매장되었지만 실로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유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보이지 아니하는 가운데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통해 많은 후손이 나왔으며, 그들은 사백 년 동안 애굽의 종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출애굽을 통해 가나안 땅에 정착 하도록 하는 것을 보면 놀라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6절에서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창15장 특히 13-14절과 출3:12절과 결합하여 등장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이 7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종살이 한 것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랜 노예 생활 뒤에 후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것을 아브라함이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섭리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님을 드러내셨으며 어떻게 장차 다가올 참된 예배 장소를 약속하셨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외형적인 표시를 위해 “할례”를 행하게 함으로 언약을 맺습니다. 그것을 8절에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아브라함과 언약으로 맺은 할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그리고 역사 속에서 당신님의 백성을 돌보시는 은혜를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믿는 것이고,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고백하는 의식 행위입니다. 또한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꼭 할례를 받아야만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할례는 순종 하겠다는 고백의 행위이지 결코 구원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육체의 할례를 구원받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으나,언약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면서 마음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을 51절에서 이렇게 스데반은 강설하고 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롬5:25-29절에서 순종이 없으면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온누리에 전해야 하지만 할례를 받은 것으로만 자랑하는 것은 참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적인 마음의 할례 즉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천 번, 그 이상을 해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할례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속에 임하여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2:13절에서 “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고 하심으로 새 언약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선민이라고 하면서 육체의 할례를 구원받는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만 언약의 자손이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마음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스데반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치도록 강설하고 있는 중입니다. 계속해서 스데반은 9-10절에서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고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공포스러운 사건들을 일깨워주는 것들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알도록 한 것입니다. 요셉은 시기를 당하여 애굽에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요셉에게 지혜를 주시고 바로 앞에서 은총을 받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팔았다는 것을 이야기함으로 형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했는지 지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전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스데반은 노예로 팔아 버린 요셉이,오히려 형들의 구세주로 다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구원하실 메시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요셉을 통하여 계속 이루어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을 의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주님이 우리 곁에 계서서 하나님께 기도할 힘을 주실 줄 믿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스데반처럼 신앙 생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동행하고, 요셉과 동행한 것처럼 지금 나와도 함께 동행 하십니다. 동행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언약으로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억지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자 하면 멸망이지만, 나 자신을 포기 하고 오직 예수님을 의지할 때 참된 구원이 있습니다. 마음을 찢는 고통과 상심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기 위해 그리고 요셉이 형들에게 버림을 받을 때 마음을 찢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또한 스데반도 자신의 목숨이 하나임을 알면서도 담대함으로 강설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앞날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면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것은 세상의 실상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요셉도 그리고 스데반도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삶입니까?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참여하면서 마음을 찢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3주 정도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라는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스데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들으시면서 주의 길을 잘 가시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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