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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7:11-16
강설날짜 2018-10-14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iM5si2amYRk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2(행7:11-16)

 

저는 모태신앙으로 어릴 적부터 교회당 안에 있는 사택에서 자랐습니다. 시골교회를 떠나면서 남양주에 정착을 했습니다. 당연히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교회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교회란 건물로만 생각을 하면서 열심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열심이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믿음의 선배님들을 보시면 자신의 열심에서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누가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님 교회가 무엇입니까? 아마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이라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 뜻은 세상 “밖으로 불러내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을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한 것처럼 그들 스스로 해방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사탄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는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함을 받은 공동체로서 신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세상적인 기관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건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십자가가 있어서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택하신 백성이 교회요 성도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이 교회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몇 주 동안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특히 스데반에 대한 기록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스데반 그리고 사도들도 우리와 같은 성도로서 교회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충실한 일꾼으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는 성도였습니다. 스데반은 같은 동포인 “자유민들”과 분쟁이 일어나면서 그들은 거짓 변론자들을 세웠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공회에 서게 됩니다.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은 긴 강설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의 땅은 아브라함이 본적도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본향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생활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도 나그네와 같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심으로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나그네와 같은 여행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함으로 어떤 말씀을 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할례”를 통해 늘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보호하여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할례를 보면서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순종하겠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한 후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스데반은 요셉이 형들로인해 팔려간 것을 지적함으로 예수님께서도 부형들로부터(유대인)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강설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너희 이스라엘을 위해 아브라함과 요셉에게 약속한 땅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과 승천하시어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주인이요 상속자요 자손이라고 하면서 열방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너희들이(이스라엘) 복음의 증인 자로 참여하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스데반은 야곱의 지손들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원인을 간략하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애굽과 가나안 땅 어느 지역이든 기근이 있어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공회에서 강설을 통해 변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도 기근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요셉를 통해 총리가 되게 하시고, 식량을 저장해 두었기 때문에 야곱의 자손들을 애굽에 보내어 식량을 구하고자 했다는 것을 12절에서는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분이라면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양식을 구하러 온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인 줄 모르고 함정에 빠집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모른 체하면서 청지기를 통해 약식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두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형들에게 은잔을 훔쳐 가고자 했다고 누명을 씌웁니다. 형제들은 억울하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가나안의 정탐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요셉은 가나안에 있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형들의 정직함을 즘명하기 위하여 베냐민을 데니고 오라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한 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사실을 누가 알게 된 것인지를 13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출과 축복은 아이러니하게도 가나안 땅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요셉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야곱의 가족들은 15절을 보시면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라고 기록하는 것은 조상들이 애굽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이 받았으나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소망하면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애굽에서 죽었고,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16절을 보시면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여기서 자유주의 학자들은 성경의 기록이 이상하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은 오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막벨라 동굴(헤브론)에 묻히었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세겜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겜에서의 땅 거래는 야곱과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이 이 거래에 아브라함의 이름을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야곱이 세겜에서 땅을 구입한 것(창 33:18-19, 수24:32)과 아브라함이 헤브론 막벨라 동굴을 구입한 것(창23:16)을 혼동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이 그 당시 긴장된 상황 속에서 잠시 착오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분은 칼빈 선생님이십니다. 스데반이 그때 죽음 직전의 급박한 압력을 은연중에 받았으므로 아마 야곱이 세겜 땅을 산 것과 요셉이 그 땅에 장사되어진 비슷한 두 사건을 요약 단축해서 말한 것이라고 벤겔 학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본 구절은 본서 저자인 누가의 실수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마도 스데반의 강설 내용이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을 누가가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창세기의 기록과 여호수아서의 기록을 혼동하여 잘못 기술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어떤 견해를 취하더라도 본문의 불일치는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위해 당신님의 특별한 계시를 통해 이루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스데반은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사악함과 요셉의 의로움을 대조함으로 공회에서 변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리고 믿음의 조상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도록 하기 위한 강설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형제들은 악한 자들이며, 후손들도 조상과 별 다를 바 없이 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것을 지키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시기와 인신매매를 저질렀어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강설은 의인이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변함없이 그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고난을 당한 것처럼 스데반도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자신(스데반)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믿을 수 있는 것은 같은 형제인 유대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믿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스데반이 구원을 얻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런 음성을 듣는 공회와 변론자들은 스데반의 강설을 이해 못하고 돌로 죽이고자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죽을 수 있는 현실에서도 그리고 실제적으로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도요 교회인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고, 역사적인 사실 그 교회사를 통해 누구든지 귀를 기울여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강설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책과 위대한 글들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한 기독교, 그리스도가 없는 강설을 들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께서는 모교회에 당신의 강설에는 그리스도가 없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에게 글을 보내었지만 결국 그 분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분이다보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사회적인 이슈만 들어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성경적인 강설이 아니라 믿습니다. 재미는 있을지언정 사람을 살리는 강설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사회적인 이슈가 아니라 잘 알고 있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강설도, 예수님의 강설도,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아도 성경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강설이라 저는 믿습니다. 스데반이 믿음의 조상들을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것은 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강설이 사람의 마음을 못 움직이고,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바르게 전해야 하는 것이 강설입니다.

 

공회 앞에서 스데반의 강설은 신분과 직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지팡이교회이든, 언약교회이든, 안디옥교회이든, 신약교회에서 신앙 생활했던 믿음의 선배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 고백하는 모든 자들은 성도의 ‘신분’입니다. 그러면 직분은 무엇입니까? 스데반은 신앙고백하는 ‘신분’이었습니다. 직분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 직분만 말하고 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입니다. 한국교회만 독특하게 있는 권사, 서리집사, 권찰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교회를 세워가기 위한 목적으로 신자들에게 주신 것이 ‘직분’입니다. 직분은 교회와 이웃을 섬기기 위한 것이지 군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경적인 강설을 전할 때 그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일을 감당할 때 그 직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직분 자를 따로 세우신 이유는 신자들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스데반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들은 지팡이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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