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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7:54-60
강설날짜 2018-11-11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행7:54-60)

 

오늘은 지난 주일에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을 마무리하다.”라는 강설을 생각해 보기 전, 경북대학교 김중락 교수님의 글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명백한 한국어: 정말로 걱정입니다>

목사는 사제(제사장)가 아니라 교사(선생)이다.

목사는 자신이 사제가 아님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모든 사람이 사제임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사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스스로 죄 고백을 할 수 있는 사제임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목사는 먼저 배운 성도, 즉 선생이다.

그러니 성도는 목사를 사제로서가 아니라 선생으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500년이 지났는데 아직 '만인사제주의'에 이견을 제시하는 성직주의자들이 있다니 한국교회 정말로 걱정입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뿌리에 도끼를 들이대는 이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김중락 교수님의 글을 보면서 한국교회에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현실의 목회를 보면 목회자의 영향력 즉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모든 일에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스데반은 사도들과 성도의 교제를 하면서 교회의 일꾼에 충실했습니다. 사도가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주의 일꾼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목사는 종교개혁을 하기전 사제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목사사제주의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를 잘 읽어보십시오. 목사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장로교가 신앙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를 보십시오. 그리고 개혁교회가 공인한 신앙고백서를 보아도 목사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벧전2:9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목사이든, 집사이든, 신자이든 성도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교에서는 “만인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만인제사장은 구원론에서 평등한 구원의 초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도 그들이 탁월하거나 거룩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성도도 탁월하거나 거룩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평등한 구원의 초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처럼 충실하게 일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특별한 행위와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하심으로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생각하면서 거룩한 공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강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한 강설을 통해 교회가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에 있어서 예배당이 중요하듯이 출애굽을 한 유대인들에게 “성막”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닌 의미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만들었고, 그곳 “두 돌판”에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십계명) 보관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한 후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다윗은 하나님께 성전을 짓도록 요구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성전을 짓도록 허락을 받지만 완전한 건축은 솔로몬이 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전에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고 전능하신 분이신데 성전이 건축됨으로 그 안에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모형일 뿐입니다. 성전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당신님께서는 요2:19절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만 알아도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이든 성전이든 그 안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처럼 집이 필요한 피조물이 아니라 신 그자체입니다. 스데반은 공회와 거짓 증인 자들이 알 수 있도록 이사야가 말한 예언을 가지고 와 인용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라고 함으로 성막도 성전도 영원히 지속되도록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말입니다.

 

성막과 성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너희와 언제나 함께 하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순종과 신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요 성전입니다.(고전3:16) 우리도 스데반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 대한 역사적인 것을 말한 스데반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강한 책망을 합니다. 이런 용기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회 앞에서 너희들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는 것입니다. 현대판으로 말하면 판사와 검사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놀라운 책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랑할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들은 참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순종이 아닌 멸시와 천대 그리고 십자가에 죽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직설적으로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라고 함으로 너희들이 누구인가를 추궁하면서 회개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이 고발한 나는 율법을 준수한 자라는 것으로 긴 강설을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너희들은 율법을 주신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나는 믿음으로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스데반의 긴 강설을 4주 동안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우리만 들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과 자유민들도 들었습니다. 스데반의 최후진술을 들었던 그들은 회개하기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오늘은 참된 일꾼이었던 스데반의 최후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분이라면 스데반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순교일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면서 가장 위대한 일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순교를 당할 것을 각오하면서 담대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율법과 성전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이런 스데반을 예수님께서도 신실한 종으로 심판대 앞에서 변호하여 주시고 시인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님께서 변호하여 주시고, 시인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스데반으로부터 긴 강설을 들은 자들은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을 했습니까? 스데반으로부터 강한 책망을 들은 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를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함으로 스데반이 말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회개를 강조하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참 구주로 믿음으로 고백하도록 전하는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소식을 들으면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공회에 모였던 자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더욱 완악하여 짐으로 그들의 반응은 ‘이를 갈면서’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던 공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때에 스데반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55절을 보시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당신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마지막 순교를 아시기 때문에 그가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누가는 공회에 모인 자들과 스데반을 대조함으로 그들의 완악함과 성령 충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한 것이라 믿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완악한 자들이었지만 스데반에게 믿음을 주시고 일꾼이 되게 한 것을 생각하면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 아실 줄 믿습니다. 지팡이교회가 가는 길을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안위하여 주는 것처럼 스데반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공회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스데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편에 서신 것을 스데반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하고 시인함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의 법정에서는 정죄를 당하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예수님께서 변호하시고 시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훗날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공회에 모인 자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한 것 같지만 스데반은 성공과 세상적인 형통을 위한 믿음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성공한 사람으로 주님과 동행을 하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대함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공회 앞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강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회개하기 보다그들은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으로 오히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56절을 보시면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늘을 웅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고, 순교를 앞두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이 지금 어떠한 일을 당할 것을 아시고 너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눅12:8절을 보시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께서는 고난 받는 스데반을 하늘의 법정 앞에서 옹호해 주며 또한 순교 당할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와 반대로 악한 자들은 어떠한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57절을 보시면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스데반의 증거에 대한 강렬한 저항은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귀를 막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제히 스데반에게 마치 돌격 앞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강설로 들은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 즉 빌라도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공회에서 스데반에 대한 사형 집행은 불법입니다. 공회는 로마법에 따른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 죽이고자 하는 것을 보면 스데반의 강설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강설이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회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은 것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가 절정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합법적인 절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을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58절을 보시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어디입니까? 성 밖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레24:14절을 보시면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를 보시면 그들이 머물고 있던 장소에서 진영 밖으로 즉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아가서 죽이라는 구약의 법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마치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가신 거리와 스데반이 공회에서 성 밖으로 이동한 거리를 보면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을 그냥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예수님처럼 학대를 하면서 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끌고 가면서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한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강퍅함으로 분노가 가라앉기 보다는 너를 반드시 죽이리라고 하면서 간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강설을 들으면서 오히려 증오와 적개심으로 끌고 가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성 밖으로 나아와서는 스데반을 돌로 치고 있는 가운데 어떠한 행동을 합니까? 돌로 치는 자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묵시적으로 스데반을 죽이도록 승인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 시민을 이용하는 것은 사악한 자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돌과 무기 등으로 맞으면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됩니까? 자신을 보호하고자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보시면 그것도 돌로 맞고 있는 가운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59절을 보시면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시인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우편에서 자기를 맞이하려고 서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님을 하나님께 부탁한 것처럼 스데반도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죽으시면서 우리를 위해 용서와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스데반도 사도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희생정신을 알기 때문에 스데반도 사랑의 정신이 그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인생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60절을 보시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처럼 스데반도 용서를 위한 기도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된 일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돌로 죽이도록 한 배후 즉 사울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 위대한 사도요, 제자요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저도 스데반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저도 연약한 목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스데반하면 최초의 순교자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장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최초의 순교자이니 너희들도 순교자가 되어라가 아닐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생활에서 복음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보이는 성전과 신약의 예배당 안에 매여 있지 않고 신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이 확장되는 전환기에 발생한 것으로 그의 증거는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있던 복음을 이제는 땅끝까지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에게 ‘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회는 강퍅한 마음으로 돌로 치지만, 스데반은 정반대로 평안과 고요하다는 의미로 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감당하고 부활을 소망하면서 편안한 잠을 청하면서 주님께서 자신을 낙원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 행복을 비전으로 둔 자가 아니라 이미 죄를 이긴 행복자로서 자신이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행복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믿음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나를 자랑하기보다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의 긴 강설과 순교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고 구약의 종교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역사적인 믿음의 조상과 율법 그리고 성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 알고 있던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나 임재하시고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을 스데반의 순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핵심 증거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듣고 어떠한 반응을 합니까? 이런 현실 속에서 스데반이 보여준 믿음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며 죽음의 자리에서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살아 있을 때만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도 스데반은 우리에게 마치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신자들이 받는 박해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케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3장에서 주의 종이 당하는 박해가 많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한 구원 사역이라는 것처럼 스데반도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제는 온누리로 확장될 것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세상에서 죄악에 항거하거나 동화되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고백 하는 성도라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시대적인 환경에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핍박받을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안 후 참된 제자가 됨으로 이처럼 스데반이 참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로 양육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양육 받음으로 스데반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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