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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9:20-25
강설날짜 2019-01-06

회심한 바울이 다메섹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행9:20-25)

 

2018년 새 해를 시작한 것도 마치 어제인 것 같은데 한해가 지나고, 2019년 새 해 첫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트로트 가사처럼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하면서 인생은 지금부터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전도서를 보면, 인생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헤벨(허무)"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세상에서의 삶은 허무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삶은 허무가 아닌 은혜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삶의 예배를 주님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영광입니다. 이런 은혜를 품고 있는 것이 지팡이교회 성도입니다. 우리 교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진 신자들은 모두 성도로서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교회 즉 거룩한 공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복음의 증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새 해가 되면 사람들은 덕담을 합니다. 특히 올 해는 기해년 황금돼지의 해라고 합니다. 세상적인 “띠”로 즉 12간지 동물 띠 순서로 운세를 맞추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올 해가 황금돼지해라 그런지 축하그림을 보내어 주시는 분들을 보면 “부자돼지(되지)”, “꽃길만 걷게 돼지(되지)”, “하는 일 모두 잘 돼지(되지)”,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게 돼지(되지)”, “잘~돼지(되지)” 등 돼지라는 말을 인용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해를 시작함으로 소원을 비는 말과 덕담으로 하는 것 같지만 모든 날이 주의 날임을 아는 신자들은 조심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덕담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좋은 말인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황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세속적인 욕망을 담은 말로 들리지 아니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면서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예배를 하는 성도라면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사는 영적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올 해도 지난해와 같이 사도행전을 강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행9:10-19절을 사용하여 “아나니아를 만난 사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실 줄 믿으면서 다시 생각 해 보겠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면서 그곳에 빨리 도착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을 잡아서 이스라엘로 데리고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울은 즉각적으로 “땅에 엎드러져” 있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만 박해하는 것 같습니까? 사울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열정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사울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울처럼 잘못된 신앙생활을 한다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상상할 수 없는 빛과 음성을 들은 후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손에 끌러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사흘 동안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가운데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면서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회개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던 중에, 주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아나니아처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 제자요 성도로서 신뢰하면서 교제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것을 들은 후 계속해서 회개를 하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늘 기도를 해야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함으로 주 안에서 늘 신뢰와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으로부터 음성을 듣는 가운데 사울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진행될 것임을 아나니아에게 확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해서 여러 사람에게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니아의 입장이라고 해도 이런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사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신 이유를 15절에서 말씀하여 주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울의 삶을 보시면 우리도 잘 알듯이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 오직 복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사명자이기도 했습니다. 사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사울과 비슷한 로마식 이름인 바울로 개명을 한 후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니라”고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처럼 사울도 알면서 복음을 위해 묵묵히 감당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사도 바울의 증거에 감사해야 하는 성도일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은 아나니아는 순종함으로 사울을 찾아가서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를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 후 세례를 받고, 그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던 상태에서 음식을 먹음으로 강건하여 졌습니다.

 

오늘은 “회심한 바울이 다메섹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인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강건하게 되었고,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충만해 졌습니다. 그러면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동안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제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신되어 짐으로 변화된 사울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 함으로 고난 받기 시작 한 것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무조건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고난을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하면서 당하는 고난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것에서 20절을 보시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저주를 받아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체포 영장을 받아 신자들을 고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던 다메섹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이단자로 여겼으며, 모두 유대교에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려 왔던 메시야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회당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유대인이 잘 모이는 장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전한 것입니다. 사울이 초기에 복음을 전하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지만,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중에 가장 고귀한 영광입니다.

 

사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21절을 보시면 황당했을 것입니다. 저런 사람이 개과천선을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회당에서 증거 하지만 다메섹에 온 목적이 우리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에게로 끌고 가기 위한 조작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사울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볼 때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사울은 완전히 변화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회심시키고 아나니아와의 사건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아마도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들은 합당한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회심을 한 성도는 과거의 잘못을 더 이상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 삶의 예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하는 예배만 중요시 하고 흩어져서 하는 예배를 중요시 하지 않는다면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삶의 예배를 통해 변화된 성도로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울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복음을 증거 하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22절을 보시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그럴수록 힘을 더 얻어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증거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당황하는 것입니다. 마치 히틀러가 변화되어 복음을 유대인에게 증거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울에게 며칠 사이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사울은 즉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공적으로 증거 하는 능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이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 하면 할수록 유대인들은 당황하고 놀랄지 몰라도 사울 자신은 갈수록 영적으로 더욱더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팡이교회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무엇을 하고자 합니까? 23절을 보시면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여기서 유대인은 모든 유대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단축된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의 논증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틀렸다면 그들은 사울을 논리적으로 공격했을 것이고 결박하여 법정에 세우고자 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고자 공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참된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어두움을 사랑하고 자기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또다시 자기들의 죄악을 숨기려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공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악 된 모습입니다. 공개적인 토론으로 사울의 입장을 들어 보기보다는 폭력으로 해결 하고자 하는 것은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십계명) 어기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러 날이 지나매’는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삼 년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만 전한 것이 아니라 갈1:17-18절을 보시면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를 생각하면 삼 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랫동안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울이 갔던 아라비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라 사해 남쪽 나바테아 왕국을 말하는 아라비아입니다.

 

우리도 사울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사울은 회심을 한 후 자신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죽이기로 공모한 이야기를 사울도 알게 됩니다. 24절을 보시면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기 때문에 성령은 사울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섭리요 작정입니다. 사울은 과거 스데반을 죽이기로 생각한 것처럼 이제는 자신이 유대인의 제거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죽이다’는 동사는 행8:1절에서 ‘죽이다’라는 동사와 똑같은 것으로 바울은 스데반과 같은 인물이 된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도망할 수 없도록 유대인들은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잡아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샅샅이 성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주도면밀하게 사울을 죽이고자 계속 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을 주도면밀하게 죽이기로 공모를 했을지라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통치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그들의 손에 맡기지 않으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고백을 하는 신자들은 항상 계획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늘 모든 것을 기도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신뢰하는 것이고 교제를 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사울을 참된 그릇으로 부르신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사역을 위해 어떻게 하십니까? 25절을 보시면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아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고, 또한 아무런 서신도 기록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 성을 주야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탈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한 밤중에 어른이 들어갈 수 있는 광주리를 사용하여 성벽으로 내려서 탈출하도록 했습니다. 사울은 복음을 증거 함으로 고난의 시작을 한 것이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 감당함으로 참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여러 번 계획하였지만, 때가 되지 않아 예수님을 잡아 죽일 수 없었던 것처럼, 사울도 같은 것입니다. 사울 역시 유대인들을 죽이려는 공모에서,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메섹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 선택한 사울이 참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울만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교회 성도도 당신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예비 하시면서 주님께서 계신 낙원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항상 담대하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예배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옆의 그림은 사울이 광주리를 타고 내려갔다는 장소로 알려진 성벽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회심하였습니다. 아나니아도 사울을 믿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직가라는 곳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은 후 안수를 통하여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보지 못하던 눈이 보이게 되고, 먹기고 하고 마시기도 하면서 몸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울은 즉시로 복음을다메섹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회심한 신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울의 증거를 듣던 유대인들은 매우 큰 혼란을 겪으면서 그를 죽이기로 공모를 한 것입니다. 마메섹으로 와서 핍박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울이 오히려 복음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감사하면서 십자가를 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일꾼인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참된 그릇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고난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열 두 사도와 그 후 신실한 신자들을 보아도 고난은 영광이었습니다. 사울이 회심한 후 다메섹에서 한 것은 복음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에게 돌아온 것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공모였습니다. 이러한 사역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안락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으로 헌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헌신된 성도입니다. 한 번 헌신은 영원한 헌신입니다. 사도 바울의 헌신은 매 해 첫날 그리고 부활주일, 성탄절 그리고 특별한 날 헌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헌신된 몸으로서 모든 날이 충실한 삶의 예배였습니다. 지팡이교회도 사울처럼(사도 바울) 헌신된 성도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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