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47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1:1-18
강설날짜 2019-03-03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한 내용(행11:1-18)

 

엡4:11절을 보시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목회자인 저는 강설을 하고자 합니다. 강설을 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목사와 교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목사와 교사가 다른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을 살려서 보면 그리고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목사 즉 교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교사처럼 잘 가르치는 봉사의 섬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분들은 설교 즉 강설을 그럴싸하게 하고자 포장을 합니다. 성경의 본문을 악용하여 개그맨처럼 강설을 하는 것은 참으로 신자들을 어두운 그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도 강설을 잘 하려고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 말에 동의를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목사는 강설을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목사는 강설을 잘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강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성경의 본문을 있는 그래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설을 그럴싸하게 마치 선물 포장지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봉사의 섬김을 위해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무조건 강설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강설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강설을 연설자처럼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한 것을 우리는 강설로 들었습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은 목사 즉 교사가 신자들을 위해 풍성한 말씀의 양식을 마치 요리를 하듯이 잘 준비하듯이 공급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서로 섬김의 마음과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성장하는 지름길이라 믿습니다. 말씀을 잘 전하는지 지식적으로 듣지 마시고 고넬료와 같은 마음으로 들었으면 합니다. 강설자는 교사로서 마음을 다해 요지부동으로 변하지 않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화도 날 것이고,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고, 온유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전하시는 강설을 들음으로 서로 은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 강설을 요약하기 보다는 오늘 본문을 통해 행10장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행11장은 특히 서두는 행10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지역에서 전한 복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교회에 보고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에게도 같은 구원이 있다는 베드로의 증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회심에 대한 이야기 하면 대체적으로 사도 바울 즉 사울을 생각합니다. 사울의 회심에 관한 구절은 31개로 행9:1-31절입니다. 하지만 고넬료의 회심 즉 이방인에 관한 구원을 전하기 위해 쓰여진 구절은 66개입니다. 행10장 1절부터 행11:18절까지입니다. 이런 숫자를 비교하면 고넬료는 로마 장교이면서 이방인으로 그에게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초대교회에게 전도의 분수령을(이방인)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기초를 놓은 분은 스데반이지만 이제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에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임한 성령은 베드로의 일부 유대인들만의 사건이었지만 베드로가 행11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를 하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입니다. 행10장은 행11장을 위한 본론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결론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로부터 모든 내용을 들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섭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신약성경에서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논쟁하는 것 중에 최고의 수위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특히 원수인 고넬료에게 전한 것과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것은 아마도 유대교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이방인이 먼저 해야 할 것은 유대교로 개종을 하면서 할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할례파라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한 대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부분의 형제들이 소문을 듣고 베드로에게 정면으로 비난을 한 것입니다. 2절에서 ‘할례자들이 비난’했다는 것은 단순한 말로 제기한 것이 아니라 정죄의 의도로 비난을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 선교에 관한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특히 누가는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행15:5절을 보아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그들은 우월감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과거의 유대교와 같은 선민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큰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은 우리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큰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하여튼 비난을 하고 있는 신자들은 막연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할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난을 하는 자들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베드로가 변명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넬료의 집에 며칠 머물면서 함께 식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식사를 한 것 가지고 정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 절 이후 계속된 베드로의 변론 내용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죄하면서 비난을 한 것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는 유대교처럼 선민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삭개오를(눅19장) 기록 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도 무리들이 반발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치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 당장 욕설과 저주를 할 수 있지만 베드로는 4절에서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차분한 마음으로 정죄하는 비난을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마음이고 목사와 성도의 마음이 되어야 하기도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욥바 피장의 집에서 기도하다가 본 환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고넬료의 사건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행11:5-14절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새로운 사실이나 설명의 부연 없이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사건이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5-7절을 보시면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행10장을 통해 강설로 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이야기를 함으로 우리에게는 어쩌면 지루할 수 있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5절은 베드로가 평소처럼 기도하던 중에 광주리가 드리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10장에서 나오지 않는 ‘내 앞에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생생하고 자세한 설명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환상은 하나님께서 친히 베드로 자신에게 주신 계시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보면서 ‘주목하여 보니’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환상 즉 그것을 향해 내가 주목한 후에 나는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꿈처럼 사라지는 환상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광주리 안의 신기한 물체를 계속 바라보면서 그 속에 어떤 짐승들이 있는지 보았고, 더 자세히 주시하니 그 안에는 불결한 짐승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광주리 안을 자세히 보고 있던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는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 8절을 보시면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베드로는 유대교인들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듣고 있던 자들 특히 정죄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한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고 베드로처럼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을 잘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합니까? 정중히 거절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람이 ‘사도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도긴개긴”입니다. 한 번만 거절을 한 것이 아니라 세 번 했음을 아실 것입니다(10절). 이것을 보면 이방인에 대한 초대교회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예배당에 백인이 오면 ‘잘 오셨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숙자와 흑인이 오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누구나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편견과 오만은 이처럼 교회를 힘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온누리에 전해질 수 있도록 사도 베드로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 즉 초대교회가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후 하나님께서는 9-10절에서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입니다. 세 번에 걸쳐 베드로는 유대교인들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하지 아니하면서 이방인의 구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주인으로서 부정한 짐승이라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들을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방인이라고 구원 받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구원에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부정을 한다면 사탄에 속한 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듣고 있던 자들 특히 정죄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한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고 베드로처럼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그 의미를 완전히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뜻을 안 베드로는 순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날에도 환상만 보여 달라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하신 복음의 메시지의 참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환상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한 후 베드로는 세 사람이 집에 도착한 것을 11절에게 말합니다.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이제는 환상의 의미에서 고넬료에 관한 말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두 사건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본 후 그리고 자신을 초청하러 온 세 사람과 보낸 밤을 기록하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많은 대화를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기 전에 12절을 보시면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후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즉 베드로와 여섯 명이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증인을 위해 베드로만 가도록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여섯 명은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함께 가기 전에 아마도 예루살렘에서부터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여섯 형제를 데리고 간 것은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도록 하기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세 사람은 욥바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에게 13-14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제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말한 것은 자신이 본 하나님에 관한 환상 이였습니다. 고넬료의 요청은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임을 확인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고넬료를 택하여 구원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 초대교회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선교의 문이 온누리에 전하여질 수 있도록 행1:8절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고넬료만 구원을 얻으면 나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구원의 삶을 위해 지팡이교회는 현재에도 종말론적인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백성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말씀의 강설을 듣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또한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 복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15절에서 오순절과 같은 성령 임재가 이방인에게도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오순절에 임한 것과 같이 성령은 고넬료와 함께 있던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같은 것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똑같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해 할례를 받은 적도 없이 구원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행10:44-46절을 통해 들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권속들에게 강설를 할 때 임하셨고 그들은 모두 방언을 하며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강설이 유창한 연설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갑작스레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하신 것입니까? 베드로입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은사운동을 하는 자들은 자신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신자들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16절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베드로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정죄의 비난을 하는 자들을 위해 오직 한 가지 사실 곧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행10장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세례로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행1:5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오순절 사건과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증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의 강림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인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정죄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물세례가 죄를 씻는다는 윤리적인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는 세례이며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의 세례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이 고전12:13절에서 말하기도 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을 정죄하면서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17절에서 도전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말을 유심히 보면 누가 이 사건을 일으켰는가를 생각도록 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은 베드로의 모든 정황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나의 확신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생각하도록 하는 질문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새 생명을 얻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좁은 길이라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가기를 소망합니다.

 

정죄를 하면서 비난을 했던 자들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자들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생각했던 장애물이 무너진 것입니다. 자신들이 더 이상 대적을 하면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된 마음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을 동일한 백성으로 그리고 동일한 성령 세례를 받은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초대 교회 안에서 하나 된 일치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고넬료에게 임한 성령 사건은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부정에서 초대교회는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베드로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세례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특별한 은혜라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확실한 해명을 받은 교회는 비로소 새롭게 교회의 사명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의미를 이해함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베드로의 변론에도 행15장에서 다시 재현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타락은 우주 전체의 질서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었고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범죄자인 나를 화목할 수 있도록 고넬료를 통해 성령 임재가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결과는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구원으로 초대를 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화평을 누리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증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섭리적 주권 안에서 하신 것임을 예루살렘 교회는 인정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한 것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다음 주에 이방인 지역에 탄생한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324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그리고 베스도 청문회에 선 바울 전은덕 행25:13-27 2020-05-10 1975
323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을 행한 베드로 전은덕 행9:32-42 2019-01-20 1644
322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의 뜻을 아는가? 전은덕 마5:3-4 2021-02-14 1153
321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의 결과 전은덕 행19:32-41 2019-10-27 1153
320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전은덕 마9:1-8 2021-09-26 1100
319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아십니까? 전은덕 마21:33-46 2017-07-23 1067
318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한 은혜 전은덕 마20:1-16 2017-05-21 1054
317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 전은덕 행7:54-60 2018-11-11 1033
316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재판받는 바울 전은덕 행25:1-12 2020-05-03 932
315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범죄의 심각성(마18:5-14) 전은덕 마18:5-14 2017-03-19 924
314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바울2 전은덕 행19:8-19 2019-10-06 907
313 사두개인들의 시험- 부활 논쟁 전은덕 마22:23-33 2017-09-03 898
31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전은덕 마13:1-9 2016-09-25 894
31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전은덕 마16:5-12 2017-01-15 872
310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의미? 전은덕 행4:32-37 2018-08-05 803
309 귀신 들린 아이의 고치심에 나타난 제자의 모습과 나(마17:14-21) 전은덕 마17:14-21 2017-02-26 797
308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친 후 실라와 함께 바울이 옥에 갇히다 전은덕 행16:16-19 2019-07-28 787
307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부제: 마게도냐인의 환상) 전은덕 행16:6-10 2019-07-14 781
306 바울을 고소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 그리고 더둘로 전은덕 행24:1-9 2020-04-12 765
305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 전은덕 행9:1-9 2018-12-09 76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