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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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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1:19-30
강설날짜 2019-03-10

최초의 이방인 안디옥 교회(행11:19-30)

 

지팡이교회는 중세이후 카톨릭으로부터 참된 신앙 회복을 위한 즉 성경 말씀의 회복을 위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러가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카톨릭에서 종교개혁을 한 후 개신교회는 다음과 같은 유산을 남기었습니다. 자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번역을 했습니다. 자국어로 강설을 하고, 자국어로 찬송과 기도를 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성경과 강설 그리고 찬송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카톨릭은 라틴어를 사용함으로 언어를 모르면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개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자들이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종교개혁은 자국어로 신앙고백을 하도록 했고,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신자들이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제들만의 직분이었던 것을 목사와 장로와 집사직을 회복함으로 예배와 교회를 위해 섬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 즉 성경의 회복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신조 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따르는 교회가 지팡이교회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이 선물하여 준 것들을 다음 세대에도 이어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주일에 우리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한 내용”을 강설로 들었습니다.(행11:1-18) 그 본문은 베드로와 초대교회에 있어 최고 수위의 논쟁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한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 중에 일부 신자들은 베드로를 향해 정죄하는 비난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무할례자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가입니다. 여기에서 식사를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입니다. 초대교회가 막 탄생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지만 할례에 대한 선민의식이 있는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는 베드로는 친절하게 욥바에서 일어난 환상의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보여주신 것을 거절 하였습니다. 부정한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을 한 베드로에게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입니다.

 

바로 그 때에 고벨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잠시 머물고 있던 집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간 베드로는 강설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임했다고 증언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만 증언을 한 것이 아니라 함께 동행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친절하게 증언을 한 후 자신을 향해 정죄하는 그들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만약 내가 듣고 있다면 어떤 말을 하시고자 합니까? 베드로에게 정죄을 하면서 비난을 했던 자들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하면서 조용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강설로 듣고 있는 중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교회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왜 교회의 역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 위해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행1:8절에 근거하여 복음이 온누리에 전해질 수 있도록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방인 교회가 최초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지난 주 강설을 들어서 아시겠지만 베드로의 증언을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회는 알았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탄생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과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결국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외모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교회적 사명을 깨닫고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지고 있음을 베드로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박해와 순교는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지역으로 흩어져 살던 신자들에 의해 복음이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시면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로부터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안 독자들에게 사도행전의 저자는 스데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9절의 첫 시작을 ‘그 때에’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논쟁이 있은 후 이야기를 전환시키기고 있습니다. 좀 더 직역하여 생각하면 “한 편”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편은 과거의 일 즉 스데반의 사건을 회상하도록 하십니다. 그들이 읽고 있는 사도행전은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박해를 당해 이방 나라에까지 흩어져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결국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특히 안디옥 지역은 로마의 수리아 속주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라고 합니다. 인구는 50만명으로 추측을 하면 엄청난 도시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남양주시가 2년 전에 60만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대도시는 분명합니다.

 

계속해서 20-21절을 보시면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명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초대교회의 전도를 보면 무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최초의 이방인 안디옥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설립과 창립에 대한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혼돈하여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립은 처음으로 세우는 것이고 설립은 처음이 아니고 새로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를 창립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외의 교회는 모두가 설립이라고 하는 것이 바른 용어입니다. 신자들은 “주님의 교회”라고 하지 전은덕, 옥한음, 오정현 등의 목사의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른 용어를 사용함으로 주님의 교회를 잘 세워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대한 섭립의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 20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 중에 ‘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섭립하는데 있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구브로와 구레네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안디옥에 도착하여 선교를 감당함으로 이방인 최초의 교회가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출신지입니다.(눅23:26)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방인 지역의 최초의 교회는 피부색이 함께 공존하는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자국의 언어가 있었지만 공통어로 헬라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21절을 보시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입니다. 복음의 전도는 내가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함께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할 때 우리 목사님의 강설이 최고입니다. 우리 예배당이 크고 지역 사회에 봉사를 많이 합니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20b절을 보시면 ‘주 예수를 전파하니’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전한 것은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을 전하고자 생각하십니까?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난 복음의 사역의 결과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합니까? 특히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기도 하였습니다. 22절을 보시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이방인 전도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에도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사마리아의 선교에 대한 것을 확인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도 사도들이 아니라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나바를 보낸 것입니까? 구브로는 바나바의 출신지였고, 헬라어를 잘 구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행4:36절을 강설로 들었지만 바나바는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고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이방인 출신으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경건과 권위로 확고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회심 자들에게 권위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다. 그 역할을 바나바가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후 안디옥에 도착해 보니 아주 기뻐했습니다. 왜 그런지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21절에서 언급된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21절에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들어오는 것이 ‘주의 손’ 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나바는 흔들림 없는 마음 즉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잘 가라는 것입니다. 주의 길을 가는 신자들은 늘 ‘주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내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이어야 하는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23절에 대한 정당화를 위해 바나바를 24절에서 어떻게 표현합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가는 바나바를 스데반을 묘사한 것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행6:5) 이렇게 기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가 바나바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알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함께 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더욱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안디옥 교회는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이지 군주적 지도자처럼 절대 권력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목사 즉 교사”이며 착한 사람이요 성령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섬김의 봉사직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만 열심히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의 신자들인 우리는 서로서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담당하는 목회자였습니다. 신자들은 주 안에서 성장하는 교회로서 바나바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25-26절을 보시면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입니다. 바나바는 자신과 함께 동역을 할 사역자가 필요 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사울이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다소에 가서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자신보다 성경에 유능한 것을 알기 때문에 사울을 선택한 것입니다. 누구보다 사울을 잘 알기에 신자들을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1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 같이 목회를 하고자 데리고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나바는 혼자 안디옥 교회를 이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방인의 부름을 받은 사울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세상 사람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요 추종을 한다는 의미를 붙여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는 행11:26절, 26:28절, 벧전4:16절 세 번 등장할 뿐입니다. 누가는 그리스도인과 같은 의미로 신자들, 제자들, 형제들, 구원받는 사람, 도를 쫓는 사람, 성도, 믿는 사람들 등으로 사용을 합니다. 하여튼 세상 사람으로부터 듣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종교 즉 기독교로 등장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조롱을 하고자 한 말보다는 아마도 칭찬하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팡이교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하는 말로 듣고 싶습니까? 아니면 칭찬하는 의미로 듣고 싶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보면 가슴이 찡하기도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하는 가운데 27절을 보시면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라고 기록합니다. 신약 교회에서 즉 초대교회에서 처음으로 선지자라는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왔지만 파송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선지자들은 떠돌아다니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세 번 더 선지자가 등장을 합니다. 그들의 역할은 성령께서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일들을 말하며, 덕을 세우고 격려하는 사역을 감당 했다고 추측을 합니다. 성경에 관해 가르치고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예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롬12:6, 고전12:10) 참고로 선지자들은 헤롯의 박해 또는 구제의 헌금을 모으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선지자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의 직분이 있습니다.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면서 선지자들은 점점 사라지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도록 한 것입니다.

 

28절을 보시면 선지자들은 무엇에 기초하여 예언을 한 것입니까?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선지자 중에 “아가보”는 ‘성령으로 말하되’를 생각하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한 것입니다. 그들이 안디옥에 와서 전한 말은 ‘큰 흉년이 들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예언 한 대로 로마 총독 클라우디오 시대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기원후 45-47년경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특별히 심한 기근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지자 아가보의 말대로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 교회가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교회가 한 것을 보면 오늘날 교회의 활동에 중요한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29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입니다. 큰 흉년은 유대이든 어디이든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인 교회에 어려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때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도 힘들지만 예루살렘에서 신앙생활하는 교회를 위해 구제금을 보낸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부조’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번역을 원어로 생각하면 “봉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근으로 안디옥 교회도 어려움을 당하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섬김의 봉사로 돕고자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기업과 같은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언제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조적인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마음으로 구제에 동참을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동참을 한 것입니까? ‘각각 그 힘대로’ 한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당 건축을 한다고 하면서 통장을 돌리고, 집을 담보로 잡혀 은행의 돈을 빌려 하라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각각 그 힘대로 모은 구제의 헌상을 어떻게 합니까?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의 역할을 하고 있는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 장로에게 보냈습니다. 왜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입니까? 최초의 이방인 안디옥 교회의 대표성이 바나바와 사울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봉사의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장로들에게 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보내는 구제의 헌상에서 신약의 교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장로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로라는 의미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생각하는 장로의 의미와 교회의 장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장로’ 는지역의 정신적,행정적 지도자 등의 여러 역할을 감당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신약교회의 장로는 목회 임무를 수행하며(벤전5:14, 약5:14) 가르치며 권면하는 일도 감당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후 그 교회의 대표자로 장로를 선출하여 세웠습니다. 그리고 장로를 사도들에게도 적용되기도 했습니다.(벨전5:1, 요이1:1, 요삼1:1)

 

이처럼 안디옥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바나바를 보내어 준 것입니다. 영적인 빛을 안디옥 교회가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빛을 통해 안디옥 교회는 든든한 신자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안디옥 교회와 같은 신실한 교회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교회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할 때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인지 그리스도인인지 모르게 생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성경을 가지고 나 이런 사람이요 하면서 예배당에 오지만, 평소에는 가치관과 생활하는 방식이 세상 사람들과 같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바나바에 의해 성경의 말씀을 알았습니다. 성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주님을 위한 모든 날이 헌신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신자들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요 추종을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성경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사울은 사역과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된 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든든하게 성숙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고, 성령이 충만’ 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살아 숨 쉬는 성도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그들이 우리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전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명령하신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팡이 교회는 주 안에서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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