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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3:1-12
강설날짜 2019-04-07

1차 선교 여행을 파송 받은 사울과 바나바(행13:1-12)

 

교회는 성경 말씀을 충실하게 믿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고자 하는 성도는 교회에서 사용해야 할 용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평신도, 대표기도, 축복기도, 성가대, 특별찬송 등입니다. 평신도란 용어는 1980년에 제자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하는 분들은 아마도 성도와 평신도로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것 같습니다. 성도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 평신도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으로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것 같습니다. 제자훈련은 “평신도 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평신도란 말을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입니까?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였던 “클레멘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성도와 구별하기 위해서 “일반백성”이라고 사용했습니다. 일반백성은 이방인을 뜻하는 것으로 교회요 성도인 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카톨릭에서 사제직과 교권의 강화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교회가 바른 용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과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구별될 수 있지만 교회 안에 있으면 모두 신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지팡이교회는 성도라는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형제와 자매가 된 공동체의 의미로 성도라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신자, 신도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외 바르지 못한 용어는 기회가 되면 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지팡이교회는 두 주전 “베드로 구출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강설로 들었습니다. 야고보의 순교를 알고 있는 교회요 신자들은 베드로도 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통해 베드로를 구출하신 것입니다. 구출함을 받은 베드로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집”에 와서 대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베드로의 목소리인줄 알고 영접하러 나왔다가 너무나 기뻐서 기도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있던 신자들은 로데와 함께 마중을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로데에게 한 말은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데는 힘을 다해 계속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던 신자들은 “그의 천사”라고 한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사람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출하신 베드로는 대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문을 열어 보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호천사가 아닌 그들이 그토록 기도하고 있던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손짓을 하여 조용하게 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 한 후 다른 지역으로 떠나갔습니다.

 

지난 주 강설은 “헤롯이 죽다”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정치를 위해 베드로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라진 것을 안 헤롯은 그곳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을(파수꾼) 사형에 처합니다. 그런 후 자신은 가이사랴로 떠나서 그곳에서 정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치를 하고 있던 중에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화를 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침소를 담당하고 있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헤롯과 화목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헤롯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화려한 옷을 입고 연설을 합니다. 헤롯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백성들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연설에 흡족하였습니다. 자신이 잘해서 영광을 얻은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벌레에 먹혀” 죽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헤롯을 죽게 하심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말씀이 흥왕하도록 하시고 신자들이 더하여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가는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행13장과 연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행13장부터 19장은 사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선교 여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사도행전의 서론인 1장을 알았고, 이어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그리고 사마리아로 전파되는 과정을 강설로 들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말씀대로(행1:8) 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땅 끝의 순서대로 복음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선교 여행을 떠나도록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누가 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바나바와 사울이 한 것입니까? 사도행전의 전체 흐름을 보시면 알 것입니다. 특히 행11:21절은 “주의 손이 함께하시는”이라고 하심으로 누가 하시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복음이 확산될 수 있도록 사울과(사도 바울) 바나바를 세우고 금식과 안수를 통하여 선교를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그 동안 사울이 변두리에서 머물러 있던 사역자라면 이제는 구원의 복음이 로마까지 이르도록 하심으로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한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이방인 최초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입니다.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인정하면서도 적극적으로는(?)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는 적극적으로 한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겠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입니다. 주도적 역할을 한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1절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초대교회를 이루기 위한 구별된 직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공인된 그들의 이름은 다섯 명입니다. 성령의 메시지를 전달한 분들은 다섯 명이었지만 금식하면서 성령의 말씀대로 파송 예배에 참석한 신자들은 안디옥 교회 모두였을 것입니다.

 

왜 성령께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안디옥 교회를 택한 것인지 궁금하지 아니하십니까? 그 이유는 행11:19-30절에서 언급되었던 안디옥 교회가 새로운 배경으로 등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는 오늘 본문에서 여러 명의 선지자와 교사들이 언급되는 것을 생각할 때 많이 성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 최초의 교회에 직분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 성령께서 이방인 전도를 위해 준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네게르는 ‘검다’라는 뜻으로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같은 아프리카 출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교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나엔은 ‘위로자’라는 뜻처럼 신자들을 잘 섬기는 바나바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젖동생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유년기부터 함께 양육된 명문가로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처럼 한결같이 출신성분과 인종적인 배경이 다른 사람들로 모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선교를 감당하도록 준비시킨 교회요, 복음의 전초지로 만드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섯 명 중에 바나바와 사울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준비된 안디옥 교회에 성령께서는 무엇을 하도록 하십니까? ‘주를 섬겨 금식’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교회 내외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이 금식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고난을 악랄하게 당해도 금식을 명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들이 금식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본문에서는 성령께서 금식하도록 명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섯 명중에 선교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두 사람을 임명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날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성령께서는 두 사람 즉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도록 하십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주님을 섬기고 금식하고 있던 신자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께서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하도록 택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을 위해 두 사람을 세우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상태로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늘 함께 하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세우시고 알아서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도록 하십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탁월한 지도자인 두 사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검증을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의 권위 아래 그들이 임명받도록 하심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선교는 아무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프로그램이나 건물과 재산 등이 아니라 사람으로 구성된 신자들이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두 사람을 따로 세우게 하신 후 안디옥 교회는 기도하고 안수하여 파송한 것입니다. 여기서 안수를 하도록 한 것은 파송한 주체가 누구인가입니다. 성령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방 선교를 위하여 교회가 땅 끝까지 전해야 할 신자들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발견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목회자만, 선교사만 일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부르심에 순종한 바나바와 사울은 먼저 어디로 갔습니까? 4절을 보시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여기서 두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교 여행은 두 사람이 알아서 계획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먼저 간 곳은 실루기아로 안디옥으로부터 27킬로미터 거리에 있습니다.(지팡이교회당으로부터 상봉동과 대성리 정도의 거리로 생각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배를 타고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에 간 것입니다. 구브로는 안디옥으로부터 96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입니다. 지팡이교회당으로부터 춘천보다 좀 먼 거리입니다. 첫 선교의 사역지로 성령께서는 구브로로 가게 하셨습니다.

 

구브로는 주전 22년에 로마 원로원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서부터 로마 총독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곳의 가장 중심도시인 살라미에 도착을 합니다. 5절을 보시면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이곳은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로 많이 거주하고 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잘 읽어 보시면 바나바와 사울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부터 극심한 방해와 거부를 당하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구원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사도적인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살라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도 여러 곳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두 사람에게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도록 요한 마가를 조력자로 함께 동행 하도록 했습니다. 요한 마가는 바나바의 사촌으로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동행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은 살라미에서 복음을 전한 후 반대편 도시인 바보에 도착을 합니다. 6절을 보시면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바로 그곳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바예수’입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로 마술사이기도 합니다. 바예수는 유대인이면서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이지만 마술사였습니다. 8절에서는 그의 본명은 ‘엘루마’입니다. 엘루마는 마술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의 마술은 이교도와 유대인 모두가 질병을 고치고 육신적 복이나 저주를 가져오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며 저주와 귀신을 막을 목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미래를 예언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를 보호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레20:6) 처벌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바예수를 만나게 된 동기를 7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마술사인 바예수가 우연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총독 서기오 바울의 관저에서 보수를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총독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술사는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을 위해 사람을 속였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를 거짓 선지자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총독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바나바와 사울을 초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총독을 바예수는 어떻게 하고자 합니까? 8절을 보시면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자신과 총독과의 이익 관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전하는 바나바와 사울을 당연히 싫어했을 것입니다. 총독이 복음을 수용하면 자신의 권력과 마술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9절을 보시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라고 하심으로 총독이 복음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마술사인 바예수는 더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가는 처음으로 사울을 바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사울을 바울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름이 시사 한 대로 기독교적인 이름이 아니라 로마식 이름입니다.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사울은 유대인 이름이고 바울은 사울과 가장 비슷한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울은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도록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사울이 바나바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먼저 등장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바나바가 큰 역할을 했다면 여기서부터는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술사인 바예수로부터 심한 방해를 당해도 즉각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 바울은 마술사의 반역 행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바예수는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이 있지만, 바울은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마술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총독과 그 지역에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을 믿지 못하도록 함으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바예수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책망한 것입니다. 책망과 동시에 바울은 11절에서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 즉시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예수는 자신을 돌보아줄 사람을 찾아 헤맨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선지자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갈 길을 지시해 주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혼자서 걸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지금 자신의 힘을 누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것을 12절에서 어떻게 표현을 합니까?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입니다. 총독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술사인 바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종합적인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은 예수님을 닮은 능력 있는 사역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은 바울이 최초로 행한 이적이기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고 있는 주의 일을 훼방하고 악행을 하는 거짓 선지자의 비참한 말로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최초의 안디옥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오늘 본문을 통해 잘 드러난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를 감당하도록 하신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은혜이기도 합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뛰어난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출신 성분이 달랐지만 하나 된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피부색도 달랐고, 일반 백성과 귀족도 있었지만 계급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안디옥 교회는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늘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후원을 받는 바울과 바나바는 영적인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복음으로 승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복음이 증거 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바울과 바나바처럼 늘 깨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싸움에 무지하지 않도록 안디옥 교회처럼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사적 의미에서 바울의 선교 여행은 중요하고 막중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 예루살렘과 사도 중심적인 유대교적 기독교에서 땅 끝까지 전해지도록 하는 분기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하지만 성경은 모든 사역의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하나님께서 그 사역의 도구로서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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