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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6:31-40
강설날짜 2019-08-11

감옥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 그리고 구원...(행16:31-40)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으로 보내심으로 우리를(그리스도인)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교회를 섬기도록 했습니다. 교회가 성경의 말씀대로 생활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고 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나는 어떻게 답하고 싶습니까?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사람의 말을 믿을지언정,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아니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팡이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며 오늘도 은헤의 방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순종하며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당신님의 몸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정체성을 알고 힘을 다해 협력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오늘날도 같은 정신으로 교회를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하면 마치 바퀴벌레를 박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을 내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교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사도 바울 혼자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함입니다. 그리고 교회로부터의 기도와 후원, 같은 마음으로 사역을 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은 함께 하시며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여 주신 것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위해 아시아에서만 전하여졌던 복음을 성령께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통해 유럽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럽의 첫 열매인 루디아를 얻었습니다. 복음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귀신들린 여종을 고침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강설로 듣기 전 지난주 강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쳤으면 사람들과 주인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황금알을 낳는 것과 같은 여종이 이제는 돈벌이가 되지 않을 것을 염려한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관원들 즉 상관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보다 오히려 고발한 것입니다. 고소의 내용은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인들은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하면서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사도 바울과 일행은 전도 여행을 한 것입니다.

 

고발을 당하면 과연 그런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을 확인도 안 하고 무리는 함께 고발합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매가 아니라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가혹한 매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가운데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고난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매질을 당한 바울을 바로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신분 즉 로마인이라는 것을 확인도 않고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감옥이 아니라 땅을 파서 만든 어두운 땅굴에 가둔 것입니다. 간수들은 상관들의 명령에 따라 바울과 실라를 가두었습니다. 무거운 쇠사슬을 이용하여 도망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사건을 알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간수가 볼 때 미친놈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극적인 반전을 가지고 왔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린 것입니다. 자물쇠로 그들을 가둘 수 없는 것처럼 복음도 같은 것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지옥의 문으로 유혹해도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을 가둘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을 무시한 간수는 그들이 도망한 것으로 생각하여 자결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했다면 간수는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여 살려달라고 해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간수에게 바울은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한 것입니다. 자결을 선택하고자 하였던 간수는 등불을 이용하여 바울과 실라가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들이 있는가를 확인한 간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했습니다. 감옥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잘 알고 있는 간수는 바울과 실라에게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늘 강설은 “감옥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 그리고 구원”입니다. 감옥에서 놀라운 사건을 체험한 간수는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구원입니다. 간수는 지금까지 생활해 오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간수는 초대 교회 복음 증거한 분들이 전한 메시지의 대주제인 구원을 질문한 것입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주어야 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도 교회를 통해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간수가 질문함으로 구원의 열쇠를 찾은 것처럼 오늘날도 같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도록 감옥 안에서 기도와 찬송을 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을 얻은 것이 아니라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할 수 있는 위치와 인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간수에게 구원의 열쇠가 무엇인가를 질문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열쇠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31절을 보시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였습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가짜입니다. 구원의 열쇠는 간단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으면 됩니다. 빌립보 감옥의 사건은 왜 예수님을 믿는가를 잘 대변하여 주고 있습니다. 간수와 바울을 통해 구원의 열쇠가 누구인가를 하나님께서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간수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가장의 구원이 가족 구성원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너만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해 가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만 구원을 받으면 가족은 모두 자동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간수의 믿음이 자동으로 가족에게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간수가 바울을 통해 믿었던 것처럼, 가족도 간수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간수는 한 집의 가장이기 때문에 가족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이처럼 큰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 사람이 참된 신앙의 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더 큰 위력으로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로부터 구원의 열쇠를 들은 간수는 무엇을 합니까? 32절입니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쉽게 읽고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간수의 노력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간수는 감옥과 아주 가까운 장소에 집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라 간수의 책임이 막중했습니다. 죄수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죄수를 안전하게 지키어야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안전하게 보호를 하며 자신의 집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바울을 집에 데리고 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간수는 처형을 당해야 합니다. 하여튼 간수는 복음의 진수를 알고 가족에게 구원의 열쇠를 전했습니다. 간수는 무엇으로 가족을 구원했습니까? 바로 ‘주의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31절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간수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전함으로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열쇠를 전한 간수는 33절에서 무엇을 합니까?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밤중에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매질을 당한 자리를 씻어 주었습니다. 간수는 사망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상처를 씻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의 이런 행동은 믿음의 첫 증거로서 전날 매질한 것을 사죄하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와 그 가족들이 바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복음의 힘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간수의 집안은 세례만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34절을 보시면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간수와 바울은 함께 식사했습니다. 아마도 바울과 실라가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절망에서 간수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주님을 통해 얻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열쇠는 이처럼 사람에게 행복을 줍니다.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바울처럼 구원의 열쇠 즉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간수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므로 ‘기뻐’했습니다. 단순히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깊은 영적 기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행복의 느낌이 아닌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의 영적 행복을 누립니다.

 

간수에게 구원의 은총이 있었던 다음 날 바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35절을 보시면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입니다. 즉 ‘석방하라’입니다. 본문에는 왜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추측하면 간수가 감옥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감옥 안에서 일어난 지진에 대한 놀라운 일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매질을 당한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서 힘든 경험을 한 것으로 알고 방면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는 직접적인 지식이 없을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사실 자체만을 기록하고 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섭리 안에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구절인 36절을 보시면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간수는 상관들의 명령에 따르면서 ‘평안히 가라’고 합니다. 상관의 명령을 넘어선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참된 속마음입니다. 간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울을 통해 회심했기 때문에 평안히 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의미심장한 말을 37절에서 말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입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이 고발한 것은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로마인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금 빌립보 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의 열쇠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복음을 전할 때 방해물이 생기지 않도록 상관들의 해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상관들과 주인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도록 함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로마인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임을 처음부터 밝히지 아니했을까?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매질을 당할 때 했을 것입니다. 무리의 함성 때문에 상관들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부하들이 상관들에게 보고합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38절을 보시면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입니다. 로마법은 타당한 재판 절차를 통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로마 시민권자에게 처벌을 가하거나 투옥을 할 수 없습니다. 로마인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법입니다. 로마 시민은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대로 가하는 태형을 피할 수 있었고 만일 형이 선고되었다면 가이사에게 항소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취한 행위는 심각한 위법 행위였고 이것이 상부 기관에 보고되면 충분한 문책 사유가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두려워한 상관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공개적으로 교정을 했습니다. 39절을 보시면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정식으로 사과하고 상관들이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이곳을 떠나도록 요구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난 주인들과 무리들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빌립보 성의 치안을 방해할 잠재적인 불안을 두려워함으로 바울과 실라에게 떠나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상관들로부터 인사를 받은 후 감옥에서 나온 바울과 실라는 어디로 갔습니까? 40절을 보시면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루디아 집으로 간 것은 그 집을 통해 복음이 빌립보 성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신자들의 보호와 그들의 고난을 예방하려는 목적을 지닌 바울의 의도적인 행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누가는 초기 기독교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처음 교회는 가정 중심에서 확장되어 오늘날과 같은 예배당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을 추방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을 가졌는지 알 수 없으나, 바울 일행이 빌립보를 떠난 것은 꼭 상관들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사역을 완수하여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또 다른 장소에서 그들의 사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유럽에서 마지막 로마로 들어가 온 세상에 구원의 열쇠가 전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 세상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때 기도와 찬송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음으로 마음이 평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이런 고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면 우리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입니다. 감옥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참되게 믿는 신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바울만 그 기쁨을 안 것입니까? 간수도 그 기쁨을 알았습니다. 구원의 열쇠가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만 구원받아야 된다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중요 했기 때문에 함께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질을 당하고 감옥 안에서 갇혀 있는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찬송과 기도를 함으로 감옥 안에서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구원은 빌립보 성으로 퍼지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어디를 가든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흔적 즉 구원의 열쇠를 전합니까? 바울이 당한 고난은 역전이 되어 빌립보 성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간수의 가정만 구원을 얻도록 한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간수만 잘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만 열심히 해서는 안 됩니다. 간수와 루디아가 있었던 것처럼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증인 자다운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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