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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1:7-15
강설날짜 2021-12-19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7-15)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기도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신자들만 아니라 세상 사람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알 정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우리는 간략하게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기도문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전에 말씀하여 주신 기도에 대한 것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전에 마6: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입니다. 여기서 반복적인 단어가 무엇입니까? “말라”입니다. 주님께서는 “하지 말라”고 하심으로 경고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돋보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이방인처럼 기도하면서 자신을 돋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처럼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데 사람은 외식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하든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의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기도가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언부언하는 이유는 어떻게 하든 하나님께 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언부언하며 반복하는 기도를 통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곳에서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처럼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며 중언부언하지 아니하며 마음을 담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에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본 우리는 지난주 강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제자들만 파송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였습니다. 이 질문은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하시는 대답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은 헤롯으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있는 가운데 자신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역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의구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하도록 함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만큼 사역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듣고 보는 것”을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듣고 보는 것”을 이야기하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겉모습의 사역에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참뜻을 알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참뜻을 깨달으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연결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다 돌아간 후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중 방금 읽어본 말씀을 먼저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반복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차분한 마음으로 강설을 들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무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세례 요한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무리는 마음을 집중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질문하신 것을 알기에 무리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싶었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통해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줏대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자 너희들이 광야로 나간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무엇을 보려고 그곳에 갔는가?입니다. 요단강에서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자 간 것인가?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까? 마치 갈대처럼 줏대 없이 흔들리는 무리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광야에 갈대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광야에서 부드러운 옷을 입고 있는 왕궁의 사람들을 보러 간 것입니까? 이런 자들을 보러 간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설적으로 세례 요한을 보러 간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은 왕국에서 생활하며 아름답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양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털옷과 가죽띠를 띠고 광야에서 오실 메시야를 전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은 부귀와 영화와 같은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준비하는 선지자로 확고한 메시지와 도덕성을 지니며 생활했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세례 요한과 왕국에서 생활하는 자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질문하신 것에 대한 답을 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입니다. 광야에 간 이유는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오실 메시야를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옳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광야에서 털옷을 입고 오실 메시야를 들으며 소망을 품고 있었다. 이런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광야에서 메시지를 전한 세례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준비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최후의 심판 주로 오실 구세주를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리에게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10절에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그러면 이 말씀은 어디에서 인용한 것입니까? 출20:2절과 말3:1절을 결합해 인용했습니다. 특히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선지자를 보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친히 임하심으로 구약에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때가 차므로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으로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알도록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감당하는 사역자였습니다. 메시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구별된 사람으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짐승의 옷 등을 입고 사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이야기하여 주심으로 내가 바로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독특한 지위와 역할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는 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를 공식처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매우 중요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자가 낳은 자녀 중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사역자가 된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할 수 있는 독특한 선지자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사람이 없었지만, 오직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소개했습니다. 참으로 영광중에 영광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고 하시면서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옛 시대에 속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못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다는 것인가? 참으로 난해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구약시대보다 신약시대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더 크다는 뜻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1절에 대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12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여 주셨습니까?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입니다. 이 말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의도로 말씀하여 주셨는지 완벽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문맥을 고려하여 생각하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세워져 나가지만, 마귀에게 속한 자들에 의해 무력으로 방해받으리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때마다 마귀는 더 악랄하게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 있게 올수록 악한 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연결하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는 현실과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악랄하게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퍼지며 하나님 나라의 극치는 더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믿음의 선배님들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악한 세력으로부터 알곡이 넘어지지 않도록 교회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생활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 즉 메시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13절과 14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 시대를 끝내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오심으로 구약 시대를 마무리하는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옛 시대와 새 시대를 전환해 주는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잘 알 수 있도록 구약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세례 요한이 그 시대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을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은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라는 의미는 “만일 너희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9절과 10절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말라기에서 말한 엘리야로 즉 세례 요한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 예언된 선지자가 세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는 자도 있었지만, 대체로 듣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한 것처럼 하늘로부터 다시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했지만, 엘리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대로 외형적인 모습으로 엘리야가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와 같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라기에서 말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을 마무리하신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처음으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결론을 맺으실 때 그리고 비유로 설명하실 때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당신님의 말씀이 중요함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귀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팡이 교회는 귀 있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귀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믿음과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과거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귀를 막고자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귀 있는 자로서 행복한 성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전환점에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선지자로서 율법의 시대에 속하여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준비하는 선지자로서 구약 시대를 마무리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새 시대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맞아들이도록 하는 사역자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세례 요한은 참여하였지만,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한 사역자였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신 메시야의 길을 전하며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역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큰 사람입니다. 이 영광을 알며 세상 속에서 인내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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