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처럼 고린도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by 전은덕 posted Jul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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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4:14-21
강설날짜 2023-07-09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diH5iQcD2Wo

사도 바울처럼 고린도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고전4:14-21)

 

오늘도 한결같이 지난주 강설을 다시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은 “그리스도의 일꾼과 충성된 사역자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사역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의 교회를 위해 충성한 사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인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같은 마음으로 영적 섬김의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성도의 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당을 만들며 사역자들을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판단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람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사람을 속인다면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판단하시며 마지막 심판대에서 결론을 내십니다. 그러니 주의 길을 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주의 은혜만 바라보며 사역했습니다. 사도 바울만 본을 보인 것이 아니라 아볼로도 같았습니다. 서로 교회를 위한 마음으로 사역한 일꾼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좋은 사역자들이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도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받지 아니한 것까지 자랑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왕 노릇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라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왕이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된 일꾼으로서 사역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약하고 비천하며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꾼과 충성된 사역자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 것이라 믿습니다.

 

지난주 강설을 다시 기억해 본 지팡이 교회는 오늘 “사도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강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비판과 판단을 하기 위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바른길로 권면하며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친숙한 관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말하듯이 권면하는 것임을 고린도 교회에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잘 알기에 바른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입니다.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충고의 권면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심각하고 교만한 자들이었지만, 그러함에도 사도 바울은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위한 권면을 했습니다.

 

인생에서 스승은 많습니다. 그 많은 스승 중에 사도 바울과 같은 분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승 중에 아버지와 같은 분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교만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15절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에서 스승은 많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5절에서 말씀하시는 “스승”은 어떤 분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문맥을 보면서 그리고 원어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승이라고 할 수 없는 지위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스승은 많지만 과연 좋은 스승은 많습니까? 오늘날 많은 목회자가 있지만 일부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도 있습니다. 특히 이단은 더합니다. 성경을 왜곡하며 자신이 신이라고 하니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이런 분들을 스승이라고 생각하며 따르는 분들이 있다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여튼 사도 바울은 친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전도를 통해 자녀를 얻은 영적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몽학선생”과 같은 자들을 좋아했습니다. 누가 더 실력이 있는가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잘난척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 안에서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사도로서 고린도 교회를 낳은 자녀와 같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도구였습니다. 사도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사용해야 합니까? 당연히 복음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씀 없이 자녀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신갑주 즉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일꾼입니다. 또한 복음 안에서 고린도 교회를 낳은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교회의 설립자이지만 사도 바울은 권리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아버지로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수 있도록 아낌없이 주는 스승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그들을 “교회의 기둥과 터”라고 합니다. 사도들이 교회의 밑바탕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낳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며 권면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바른길로 양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둥과 터 위에 직분 자들을 세워 당신님의 교회를 일구십니다. 곡식은 농부 없이 자랄 수 없는 것처럼 교회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꾼 즉 자녀를 통해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학문과 지혜와 은사 등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1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을 모델로 생각하며 모방하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자신 있는 모습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자주 사용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교주와 같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을 신처럼 모시라는 것입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교회를 위한 삶입니다. 교회를 위한 헌신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씀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야기하며 누구를 위한 삶인지 바르게 알라는 의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예수님을 직접 뵌 적이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도록 했습니다. 바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지난주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는 복음의 사명 자였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사람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자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이야기한 후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다고 합니다. 17절을 보시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제자이면서 아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을 알게 하도록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보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낳은 아들의 모습의 삶의 생활이 무엇인지 디모데를 통해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 아니라 디모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도록 합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전도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야 했습니다. 자신이 가야 했지만, 돌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복음으로 낳은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만큼 디모데도 말씀으로 무장된 전신갑주를 입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쉽게도 디모데가 고린도 지역에서 사역한 글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7절을 통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교회를 위해 가르치던 말씀입니다. 이것을 디모데는 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처럼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전하는 사역자는 다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말씀은 한결같이 같습니다. 하여튼, 고린도 교회는 디모데를 통해 사도 바울이 전했던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복음을 회피하면 결국 교회는 무너집니다. 우리 교회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복음이 없다면 죽은 교회입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승리하지 못하면 고린도 교회처럼 예배당을 유적지로만 볼 수 있습니다. 유적지가 아니라 살아 숨을 쉬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교회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잘 양육 받은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염려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하면서 걱정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18절을 보시면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쓴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무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거짓 선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어떤 존재인지 알도록 합니다. 교회 안에서 알곡가 가라지가 존재합니다. 알곡은 말씀의 의미를 알지만, 가라지는 자신이 원하는 말씀만 좋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습니다. 이런 자들은 디모데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참된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사전에 디모데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디모데와 같은 존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면서도 사도 바울은 주님께 간청합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복음 안에서 낳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시면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당장이라도 고린도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자기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면서도 고린도 교회도 그러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제3차 전도 여행하는 에베소 지역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을 확인하며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사람의 말로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호화스러운 말과 믿을 만한 추리로 전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세워가는 일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세상에서 대기업 회장처럼 생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시며 생활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은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으로 생활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4: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자신감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과거의 삶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으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은 선택하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방문하는 것이 좋은지 너희는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시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대처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함으로 사도 바울은 위엄있는 모습으로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면에는 강함도 있지만 온유한 마음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어떠한 것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바울의 권면을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내가 고린도 교회와 같다면 어떤 선택을 하고 싶습니까?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는 사랑하는 자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권면하고자 했습니다. 친자식으로 낳은 자녀는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낳은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보다 돌이키게 함으로 참된 길을 걷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스승을 넘어 영적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이기에 영적으로 인도할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이 세상의 아버지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영적 아버지입니다. 영적 아버지이기에 사랑하는 디모데를 먼저 고린도 교회에 편지했습니다. 영적으로 낳은 자녀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돌보겠다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능력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공이 능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런 것이 능력입니까? 능력은 하나님께서 함께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에게 왜 한 달란트의 능력을 주셨습니까?라고 대들면 안 됩니다. 각 사람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능력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을 때 믿고 순종했습니다.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 알기에 사도 바울은 자기를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교회를 위한 일꾼으로 헌신한 사도였습니다. 먼저 디모데를 보낸 후 나중에 교회에 가서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선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전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교회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참된 길이며 영원한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참된 은혜를 주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꾼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누구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도 사도 바울처럼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로서 서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로 든든히 세워져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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