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제물을 먹을까? 말까?

by 전은덕 posted Nov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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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8:1-13
강설날짜 2023-11-12
우상 제물을 먹을까? 말까?

 

성경은 구약시대이든 신약시대이든 오늘날에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함으로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합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면 구원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고 구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참된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있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자 했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주의 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오셨을 때 성경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어떠합니까?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사실상 같습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결국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음을 전해도 결국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통해 복음을 들어도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삶을 생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을 위해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한결같이 구원받은 백성을 통해 일하십니다. 지팡이 교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기에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누리는 교회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며 “우상 제물을 먹을까? 말까?”라는 말씀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간단합니다.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먹지 말아야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큰 위반이 된다면 피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오늘 말씀을 통해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보다 초대 교회 즉 고린도 교회 지역에서 우상 제물은 큰 문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답을 해야 했습니다. 저도 우상 제물에 대한 의미를 모를 때에는 먹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것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선입관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도 구약의 말씀을 잘 알기 때문에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논쟁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논쟁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에도 논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방인으로 인해 우상 제물이 모든 생활에서 넘쳐 있었습니다. 우상이 많았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도 많았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이방인들은 친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우상이 있는 신전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신전에서 먹고 남은 것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상 제물은 논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잔치하고 남은 것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것으로 친구들은 집에서 먹기도 하였지만, 시장에서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모르고 구매할 때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신자들은 죄를 범한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있습니다. 지식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식만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 교만합니다. 사람은 이웃을 생각하기보다 자기가 존중받기를 원하며 높아지기 좋아합니다. 이와 반대로 사랑이 있는 사람은 이웃을 존중하며 덕을 세웁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까? “지식은 교만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으로 인해 교만했습니다. 교만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서로 우쭐한 지식을 이야기하며 우상 제물에 대한 논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식보다 덕을 세우는 사랑을 이야기하며 우상 제물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식과 사랑을 이야기하며 고린도 교회의 지식이 불완전함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2절을 보시면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입니다. 사람의 지식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지식이든 진리이든 과연 온전합니까? 그런데 온전한 진리와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는 지식과 진리는 덕을 세우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통해 이웃을 사랑합니다. 세상과 다른 지식이며 진리입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지식으로 교회는 사랑을 품으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이 무엇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참된 복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부는 자기들이 습득한 지식으로 인해 우상 제물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것 같지만 사랑이 없으므로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들은 아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알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입니다. 사랑의 성격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랑의 성격을 단면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사랑은 지식과 다르다는 것을 알도록 하십니다. 사랑은 받는 것입니까? 오히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요 중에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이웃에게 알려지도록 합니다. 사랑과 반대로 지식은 얻는 것입니다. 지식은 전달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지식만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는 애정이 넘치는 지식으로 복음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치를 전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인정하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구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 교회처럼 우상 제물로 인해 신자 간에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을 넘어선 사랑이 필요한데도 논쟁하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우상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입니다. 우상의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우상 제물을 먹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직설적이면서도 단호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우상 제물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신들이 많은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이 만들어 낸 가짜 신입니다. 가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가짜 신에게 음식을 바친다고 해서 신비한 결과가 있습니까? 우상은 허무입니다. 허무한 것은 바쳐진 음식이 어떻게 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음식은 음식일 뿐입니다. 그러니 허무한 것에 우상 제물을 바칠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허무하지 않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상은 신성이 없습니다. 오직 신성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가짜 신을 만들며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5절을 보시면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의 특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다수성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신이 있지만 단지 불리는 존재입니다. 많은 주, 많은 신은 불리는 존재이지만 결국 사람이 만들어 놓은 허무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우상에게 경배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단지 마음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우상에게 음식을 차려주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은 온전하지 않으므로 우상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참된 신이신 주가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우상 제물을 이야기하다가 사도 바울은 참된 신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합니다. 6절을 보시면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입니다. 유일신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이런저런 신들을 섬기지만, 오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상에게 높은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라는 의미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다면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하는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신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상 제물에 바쳐진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음식입니다. 가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은 아무런 죄도 능력도 없습니다. 단지 음식은 음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지식으로 인해 우상 제물을 오해합니다.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사도 바울은 7절에서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다면 관습에 따라 가짜 신을 믿으며 우상 제물을 먹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지식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연약한 믿음 때문입니다.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우상 제물이 마법의 효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교회는 성경을 바르게 전달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지식이 자유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으면 양심이 언약합니다. 양심이 연약하면 사람은 타락할 수 있는 마음이 됩니다. 자기 행동에 자유로움이 없으므로 죄를 범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사람에게 유익합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습니다. 8절을 보시면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입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하나님께 가까이에 서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상이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는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과거의 지식을 완벽히 제거하지 못한 신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지식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으로부터 얻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식과 구원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어서 사도 바울은 “조심하라”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9절을 보시면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우상 제물을 먹는 자는 자유로움이 있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절제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절제는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자들이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꺼린다면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정죄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 바른 지식이 있을 수 있도록 교회는 성경으로 지식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 우상 제물 먹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믿음이 있는 자도 사랑의 덕을 세우기 위해 먹지 않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10절에서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높고 낮은 신자가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신자는 믿음이 약한 신자를 돌보며 섬겨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음식에 대한 것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논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 많았습니다. 그로 인해 신전에서 사용했던 음식을 집에 가져와 먹기도 했지만 시장에서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인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도 믿음이 있는 신자가 신전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한 자가 우상 제물이 복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생각하며 먹을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우상이 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상도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는 신자는 신앙생활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는 약한 신자가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약한 자들이 영원한 멸망의 지름길로 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구한 신자들을 귀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으로 비천한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확실하게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사랑을 교회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예수님처럼 할 수 없지만,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형제를 구원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형제를 구원하지 않고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에게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은 결국 영원한 형벌 즉 지옥으로 가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리의 양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교회도 같아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동정의 관계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서로 협력하며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시험에 들도록 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음식으로 인해 실족하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고 하십니까? 1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을까? 말까?라는 마무리로 교회 안에서 보잘것없는 신자라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처럼 사도 바울은 신자를 실족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오히려 지식과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지식과 사랑을 대두함으로 고린도 교회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우상 제물로 인해 어려움이 있는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은 사랑을 통해 한 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을 좋아할 때 지식만을 주고자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도록 합니다. 사랑은 전달되는 것이며 상대방에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른 지식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우상 제물에 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있는 성도도 있지만, 믿음이 약한 성도도 있습니다. 약한 성도는 고린도 교회처럼 우상 제물을 먹음으로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저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 외에 신이 없으므로 우상 제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상은 아무런 힘도 없으며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의 뜻대로 해 달라는 소원성취를 위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유일신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고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도록 합니다. 우상 제물을 통해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있도록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서로의 마음을 존중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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