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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신6:4-5
강설날짜 2016-10-09

제8항 본질에서는 한 분이지만 삼위로 구별되는 하나님(부제: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지만, 세 위격으로 구별되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본질상 오직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분은 단 하나의 본질이시고, 그 본질 안에서 세 위격이 있는데, 비공유적 속성에 따라 정말로, 진실로, 영원히 구별되신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성부는 보이는 모든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원인과 근원과 시작이십니다. 성자는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영원한 능력과 권능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구별에 의해서 셋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위격적 존재이며, 각각의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지만 이 세 위격이 오직 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고, 이와 같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심이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별된 위격은 나누어지거나 혼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는 우리의 살과 피를 취하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그러하시고, 다만 성자께서만 우리의 살과 피를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 없이 계신 적이 없으시고, 성령 없이도 계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는 하나이시고 동일하시고 본질 안에서 이 세 위격이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되시거나 나중 되신 분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세 위격 모두 진리와 능력과 선하심과 긍휼하심에 있어서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사도신경을 사용하여 우리의 믿음을 세상 사람들과 한 분이신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사도신경의 구조을 보시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입니다. 둘째는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救贖)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聖化)에 관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을 사용하여 믿음의 선배님들은 삼위이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기록상으로 볼 때, 약 380년경에 밀라노 감독 암브로스(339~397)가 로마감독 시리키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최초로 언급됩니다. 그 전에도 사도신경을 사용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로부터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믿음의 선배님들은 사도신경을 만들어서 사용하게 된 이유를 아십니까? 학자 분들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는 이단들을 반대하기 위함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도신경 혹은 사도신조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구별하기 위한 증표 혹은 표지를 의미합니다. 군사적인 심벌이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하나의 증표를 뜻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교회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은 교회와 그 회원들을 온갖 다양한 이단들과 구별해 주는 간결한 요약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뜻합니다. 다른 하나는 세례 시에 신앙고백을 위함입니다. 즉 세례식과 관련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안에서 세례를 베풀기 전에 교회에서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는 의미로 가르쳤으며, 세례를 받는 사람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을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는 벨기에 신앙고백서에서 그러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본질상 오직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8주일에서 배웠던 것을 기억합시다. “삼위일체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삼위(三位) 즉 세 분으로 계신데 곧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1+1+1하면 3이라고 하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하면 어린아이처럼 세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교회에서는 논리적으로 가르치고자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사실로 선포하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세 분이시만, 동시에 한 분이시다”하고 가르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만, 십자가에서 달리신 분은 성부도 아니고 성신도 아니고 성자 하나님이시며, 성자를 보내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성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세 분이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그 사이에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본질은 하나이지만, 이 본질이 구현되어 있는 위격은 셋이라는 사실입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삼위일체를 믿습니까?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나옵니까? 아시겠지만,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만들어 낸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이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한분이라고 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상황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그만 이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지팡이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여 주신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이든 중세교회이든 오늘날의 시대에도 삼위일체에 대해서 부인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수록 지팡이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믿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도 성경을 꾸준히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사용하여 고백하는 그 당시 네델란드 지역의 도시인 벨직(벨기에) 사람들은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그리고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가르치고 강설을 하였습니다. 그 근거를 구약의 성경에서 찾으면 신6: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2:5절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면서 디모데에게 전하여 준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직접 ‘지상대명령’이라고 하는 마28:19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동등하게 같이 열거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 하나님이 계시는 방식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이든, 신약의 교회이든 하나님은 동일하시게 삼위일체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6:5절에서 말씀하신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마귀는 다른 복음으로, 오늘 오전 강설에서도 들으신 것처럼 좋은 씨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감으로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믿음의 생활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귀와도 힘든 싸움을 해야 하는데도, 이단들과도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은 더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 예를 들면 양자설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했다는 주장입니다. 마치 말씀이 성전 안에 있는 것처럼, 말씀이 예수 안에 거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으로 주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을까?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신적인 성품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엄청나게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령님을 부어주심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님의 영광을 위해서 양자로 입양하셨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근거는 성경에도 초대교회의 교회사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단은 양태론을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표현 형식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으로, 집에서는 아버지로, 회사에서는 사장님으로, 교회에서는 장로로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지만 다른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 사장님으로, 아버지고, 장로인 것처럼,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으로, 오순절 후에는 성령으로 일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아버지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양자설과 양태론은 많은 교회를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이단들에 직면하

여 거듭 진리를 방어하기에 노력을 하면서 싸움의 분쟁은 커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세르비아 지역의 출신의 로마 군주인 콘스탄티누스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기독교의 박해를 끝을 내고, 정식 종교로 인정을 하면서 교회로부터 압류한 재산을 다시 돌려준 황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많은 논쟁이 발생한다는 것을 안 콘스탄티누스는 주후 4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이때 220명의 목사들이 참석을 했다고 합니다. 이 회의가 첫 번째 세계적 교회 공의회가 된 것은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론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가 영원히 일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더에게 사용할 것을 자문하여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 말을 왜 사용한 것입니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단들을 물리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벨기에 신앙고백서도 니케아 공의회에서 고백을 한 것처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계속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후 481년에 콘스타니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경으로 알려지게 되는 신앙의 진술을 채택을 합니다. 니케아 신경 초반부를 보시면 “우리는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아버지, 한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신,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독특하게 태어나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이 되셨으며, 빛으로부터 빛이 되셨으며,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하나님이 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갖고 아버지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보다 좀 더 확장된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이든 니케아 신경이든 모두 삼위일체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8항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본질상 오직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분은 단 하나의 본질이시고, 그 본질 안에서 세 위격이 있는데, 비공유적 속성에 따라 정말로, 진실로, 영원히 구별되신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성부는 보이는 모든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원인과 근원과 시작이십니다. 성자는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영원한 능력과 권능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구별에 의해서 셋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위격적 존재이며, 각각의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지만 이 세 위격이 오직 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고, 이와 같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심이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별된 위격은 나누어지거나 혼합되지 않습니다.”

 

한 분되시는 신적 본질 안에 삼위의 각 위는 서로 전달할 수 없는 특성이 있습니다. 전달할 수 없는 특성이란 한 위가 다른 위에게 전달할 수 없는 특성을 의미합니다. 서로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입니다. 본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우시아’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다른 어떤 것의 도움을 지탱하는 것이 아닌, 그러나 다른 것들의 공유할 수는 있는 하나의 사물을 의미합니다. 여럿에게 공통적으로 여럿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공유적 또는 공유된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이 함께 참여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해서는 비공유적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본질은 공유적이며, 여러 사람들에게 공통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켜 공유적이라할 수 있으나 이것은 다만 신성 혹은 하나님의 본성이 신격의 삼위 모두에게 동일하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위격은 무엇일까요? 실재하는 것으로 개별적이며, 살아 있고, 지성적이며, 비공유적입니다. 또한 이것은 다른 것 속에서 지탱되거나 다른 것의 일부가 아닙니다. 실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생각이나 결정이나 사라지는 소리나 혹은 어떤 창조된 특질이나 움직임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비공유적이라는 것은 삼위 안에서 공유가 가능한 하나님의 본질과 달리, 위격은 공유가 불가능합니다. 다른 것 속에서 지탱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그 자체에 의해서 지탱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실재하며 개별적이고 비공유적이며 지성적이지만, 그것은 위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말씀에 의해서 지탱되기 때문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각 위격은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이시지만, 각 위격들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이점은 서로 관련을 맺는 방식과 각 위격이 각 위격은 통합된 목적을 수행하는 것에서 담당하는 역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본질의 연합과 위격의 구분은 위의 그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존재가 하나의 존재라고 하지 않으며, 세 위가 하나의 위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본질 안에 세 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데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왜 믿음의 선배님들이 한결 같이 고백하는 이유를 깨달았으면 합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8항의 끝을 읽으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렇게 구별된 위격은 나누어지거나 혼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는 우리의 살과 피를 취하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그러하시고, 다만 성자께서만 우리의 살과 피를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 없이 계신 적이 없으시고, 성령 없이도 계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는 하나이시고 동일하시고 본질 안에서 이 세 위격이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되시거나 나중 되신 분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세 위격 모두 진리와 능력과 선하심과 긍휼하심에 있어서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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