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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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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4:32-37
강설날짜 2018-08-05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의미?(행4:32-37)

 

지팡이교회는 사도행전 4장을 통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사건을 통해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설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종교지도자들은 공회에서 두 사도를 죽이고 싶었지만, 백성들의 폭동을 두려워했고, 또한 죄를 찾지 못함으로 결국 위협과 협박으로 풀어주었습니다. 두 사도는 세상적인 권세와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진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두 제자는 풀려난 후 ‘동료들’에게 돌아와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두 사도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동료들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라고 하면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지팡이교회도 한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길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오직 주의 길,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에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모인 동료들은 시2편의 제왕 시를 사용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반역하는 대리자들을 좌절시키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적 자들은 공포의 분노로 위협을 하고 죽이고자 하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승리하신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믿음을 소유한 성도요 교회는 마지막 최후의 심판에서 영광을 누닐 것을 바라보면서 참된 주의 길을 걷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대적 자들은 자신들의 세상적인 것을 좋아함으로 예수님을 배척하지만 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두 사도들처럼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죽은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고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알기 때문에 남은 자를 위해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사도로부터 동료들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들었고,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먼 곳으로 도망을 하여도 두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담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짜 그리스도인은 더욱 담대함으로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자신의 생명을 예수님께 의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보면 나도 어떻게 신앙 생활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회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아니했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모인 장소가 진동한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이 증거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가는 당시의 내부 상태를 볼 수 있는 본문이 오늘 말씀입니다. 또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실례이기도 합니다. 먼저 32절을 보았으면 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 즉 교회는 한마음으로 연합한 현상이 공동 분배의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행2:42절 말씀을 통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서로의 집에서 모여 떡을 먹으며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목회자와 권력자와 사회적인 유명한 자가 있어야 교회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것을 바로 행할 때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주는 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하는 신자들이 많아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행2장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신자들은 물건을 결코 자기의 소유로 여기지 않고 가난한 자들의 궁핍함을 채워 주기 위하여 물건을 통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 현대교회에서는 더욱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삶이 가능한 것은 무리들이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된 모습을 오늘 분문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삶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변화된 모습으로 보입니까? 마지막 질문은 이 사람들처럼 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드십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은 사람들에게 유무상통의 삶을 요구하지도 그렇게 살라고 권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만 알기 보다는 행5-6장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말씀을 통해 강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말씀과 다르게 기도의 내용은 아마도 복 받기 위해서 ‘물질과 돈’이라고 생각됩니다. 본인이 먼저 잘 살아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삶을 보시면 그렇습니까? 잘 살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삶이 나아져서 교회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자 그리고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성찬의 교제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오늘 본문에 대해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강철보다 더 굳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본문을 부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하여 짐으로 정치적인 유토피아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예시히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이기주의와 물질욕 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이든 오늘날의 교회이든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생활을 하면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한 몸을 이룬 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예배당이 있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하나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초대교회는 자연스럽게 ‘통용하고’. ‘친교’ 하였던 것입니다. 각자의 재산이 있었지만 공동체의 필요를 느꼈을 때 언제라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말하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33절을 보시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입니다. 사도들의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했을 때 사람들은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큰 은혜 앞에 유무상통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청지기 정신이 무엇인지를 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33절입니다. 사도행전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날 교회를 주관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각자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목사교’를 만들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것을 많이 준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보아도 어려운 현실에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천막을 만들어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좁은 길을 가더라도 행복해 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3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당신님을 더 믿도록 하게 하심으로 신자들은 유무상통을 하면서 삶의 변화가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떻게 교회에 나타난 것입니까? 제자들의 카리스마적인 명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결과입니다.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신자들의 생활이었고,자신들의 소유를 나누어서 다른 사람들의 궁핍함을 채워 주는 가운데 명백히 나타난 새로운 삶의 권능이 교회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같이 사역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일을 하는 것은 빚진 자의 마땅한 사역입니다. 그럴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오늘날로 치면 사회적인 권력자로부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오직 복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예수님을 또 다시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복음만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34절을 보시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우리말로 그냥 읽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원어를 살려서 생각하면 이런 뜻입니다. 모두가 있던 재산을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단 번에 모두 팔아서가 아니라 산발적으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해 달라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산으로 생각하면서 그리고 청지기 정신으로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늘 나누어 주는 정신으로 신자들을 섬긴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있어 각 사람의 소유는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밭과 집’을 팔아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만 자신에게 위임되어 있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이 초대교회 신자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신15:4-11절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희생과 나눔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35절을 보시면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쳐진 그 재산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진 것입니다. 한 공동체를 위한 제자들의 마음은 은혜 안에서 지혜롭게 사용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신앙적으로 연합되었고, 이기적이지 아니했고, 종교지도자들의 권력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초대교회의 내부 상태를 기록하던 중 이제는 구체적인 실례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36절을 보시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누가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일치와 나눔을 입증할 보기를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인 요셉을 예로 든 것입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고,사도들로부터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의 성격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만약에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면 바나바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바나바가 처음으로 등장을 하지만 제1차 전도여행까지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여튼 바나바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의 이름의 뜻인 ‘위로의 아들’이라는 것처럼 유무상통 행위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이방 선교의 거점인 안디옥 교회를 발전시킨 목회자였으며, 사도 바울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성도로 37절을 보시면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공동체를 위한 섬김을 잘 보여준 것이고, 분위기가 확산되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로 재물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재물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요세푸스에 의하면 1세기에 와서는 부분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인 Bruce하는 학자는 레위 족속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그 규정을 적용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여튼 바나바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심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그 어떠한 장벽과 장애물도 극복하며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생활을 증거 한 것입니다.

 

유세비스에 의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말씀의 감동을 받아 완전에 대한 열렬한 소망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 취한 첫 번째 행동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집을 떠나 전도자의 일을 시작했다. 신앙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고 거룩한 복음의 책들을 전해 주는 것이 그들의 야망이었다. 그들은 외국 백성들 사이에 기초를 놓는 것으로 만족했다. 단순히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강화하는 임무는 그들이 선임한 다른 목사들에게 위임되었다. 그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얻어 다른 나라와 민족을 향해 떠나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의 정신이었고, 예수님의 “지상대명령”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성경은 기도를 많이 하면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상한 방법으로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시스템으로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잘 자라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계속적으로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르침에 전심전력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양육하였습니다. 말씀만 공급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있어야 하는 것이고, 말씀이 내 속에 항상 있어서 성령께서 은혜의 방도로 사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말씀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숫자를 늘리고자 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정신과 다른 것입니다. 복음의 사역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당신님을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수고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를 통해 사도들의 사역이 열매 맺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하지만 이단들은 어떠합니까? 교리는 불건전하지만 체험적인 공동체적 사랑과 돌봄을 이용하여 가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럴수록 지팡이교회는 바른 복음을 전함으로 울며 씨를 뿌리더라도 참된 증거를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성도(단수이며 복수) 즉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그리스도인이면 말을 합니다. 이 개념이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닌 그리스도의 특수한 결속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권능으로 채워져 있으며,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역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있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생활을 하면서 헌신된 성도로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생활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의미를 아는 성도는 어떠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지 알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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