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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5:1-11(1-5절 중심으로..)
강설날짜 2018-08-12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1(행5:1-1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와 양자됨을 얻고 성화를 늘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맛보는 생활을 하는 교회입니다. 장차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사명자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지상대명령”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맘몬주의를 이겨내야 하는 것이고, 이기주의와 야망적인 물질욕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초대교회는 유무상통을 한 것이고,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청지기의 역할을 잘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 비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으로부터 교회는 주식회사 예수라고 합니다. 아주 간략하게 말하면 기업입니다. 초대교회는 과연 이런 모습을 꿈꾸고 있었습니까?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함으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럴 때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필요한 신자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살아야 교회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을 증거 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짓 증거를 함으로 초대교회의 정신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공부를 함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목사교’로 만드는 것은 자신만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당신님을 더 믿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한 것입니까? 오늘날 목사가 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바르게 받을 때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필요에 따라서 재산을 팔아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청지기의 모습을 잘 감당했던 것입니다. 아주 이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자유롭게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을 무턱대고 모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역사적인 선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잘 관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이 초대교회 신자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희생과 나눔’으로 “지상대명령”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 즉 청지기의 정신으로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쳐진 그 재산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졌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고 함으로 정학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으로 청지기의 정신을 다한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공동체를 위한 섬김을 잘 보여준 것이고, 분위기가 확산되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본연의 모습과 역할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의 명령을 역사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교회를 세워 나갔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같은 것입니다. 초대교회 중심적인 생활이 활성화되었고 인생의 전부가 교회를 터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신앙생활이었고, 다스림과 통치의 정신을 실현하는 신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이런 정신이 초대교회에 있었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초대교회의 아주 멋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제는 최초의 사기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초대교회의 주인이 사람인지 예수님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까? 그들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에 비하면 훨씬 신앙심이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기록함으로 죄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모습을 보면서 즉 신앙의 분위기에서 자극을 받아 자신의 소유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죄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차분하게 그리고 행2장부터 문맥의 흐름을 잘 읽어 보았으면 합니다.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 교회가 새롭게 시작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척결되어야 하는 교회 안에서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위선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경고하는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너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본문이 오늘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누가는 바나바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대조함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읽어보면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아나니아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였고, 삽비라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은혜롭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을 당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역접 접속사 ‘그러나’는 앞장에서 자신의 밭을 팔아 기꺼이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정신을 보여준 것과 상반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대조하는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공동체의 유익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포기하였지만,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렇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접속사인 ‘그러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2절에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함으로 사건을 유추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유무상통 하는 것을 보면서 남들에게 인정 받고자 했습니다. 부부는 희생 없는 영광의 박수와 헌신 없는 기쁨의 행복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원어 앞부분을 좀 더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그 값으로부터 따로 떼어 두었다. 또한 그 아내도 함께 알아 왔고”입니다. 아나니아의 헌신이 순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밭을 판돈의 얼마를 감추었다는 데서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따로 떼어 가로채어, 즉 횡령하여 감추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순결성을 잃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팔았지만 성경은 횡령 즉 따로 때어 두었다는 것으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아간의 범죄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잘 드러낸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한 행동을 베드로에게 드러내신 것이 3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우리가 생각할 때 부부의 거짓말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죄의 심각성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이것이 죄가 될 수 있는가? 착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주님의 몸입니다. 거룩한 교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죄를 범한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까? 거룩한 교회의 정신을 자기 마음대로 터득한 정신에 의해서 부부가 억지로 한 것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이 억지로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이었지만 ‘성령을 속였던’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기도함으로써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탄이 가득했습니다. 사탄이 가득하다라고 사용될 때는 능동태로 죄를 범하는 것은 사람의 자발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마음에 죄악을 품어 사탄이 들어올 여지를 내어 주는 것을 보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성경의 말씀을 알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잠시 죄를 품으면 그 자리에 사탄이 성령을 속이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복음으로 증거하는 사도들을 속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을 속이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4절 보시기 바랍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성령을 속인 부당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땅이 그대로 있을 때는 너희의 밭이 아니냐 그리고 땅을 팔았으면 그 대금은 너희것이 아니냐? 누가 너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교회 공동체에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죄가 아닐 것입니다. 도덕적인 비방은 들을 수 있지만 범죄는 아닙니다. 이 사건을 베드로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부부처럼 행동을 한다면 굉장히 존경 받고 장로와 권사가 될 분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성령을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베드로를 통해 ‘정당하냐’라고 부부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사실 땅을 팔어서 일부분을 드렸습니다‘라고 해도 베드로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속여서 헌상 즉 헌금을 하는 것이 정당하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아나니아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다르게 해석하고, 거절하는 것은 사탄이 마음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속이고 기만하는 죄입니다. 두 부부의 소유의 일부만을 바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죄는 하나님과 사도들에게 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위선과 탐욕과 거짓은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으며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이 슬픔입니다.

 

아나니아가 베드로로부터 책망을 듣자마자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5절을 보시면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베드로가 부부의 행동이 하나님을 속이는 엄중한 죄라는 것을 질책하자 사망합니다. 어떻게 보면 죽이는 것은 가혹한 것 같습니다. 지팡이교회는 마18장을 배웠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즉 위임을 받은 성도가 일대 일로 만나지만 그것이 통하지 아니할 때 두세 사람이 회개 하도록 권면을 하고 이것도 듣지 아니할 때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교회는 회의를 통해 공개적으로 치리하고 공동체에서 떠나도록 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의를 통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권징과 치리 없이 그 즉시 죽인 것입니다. 앞의 마태복음에서 말한 과정이 없는 것입니다. 추측이지만 마태복음의 과정을 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모두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짧게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베드로로부터 들었지만 끝까지 부정함으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8절에서 아내인 삽비라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보면 이미 남편인 아나니아에게 질문 한 것을 생략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거룩성, 정결성 그리고 의로움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일벌백계의 교육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기선제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건전한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세운 공동체 기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성도 즉 신자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신자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을 믿는 신자를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신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우신 당신님의 몸입니다. 구원한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기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하여 연합하는 지체로 연결하여 우리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성도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거룩성, 순결성 등을 지키기 위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인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하라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늘 성경의 문맥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재산을 팔아서 모두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읽은 것이 없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니 안전한 나라로 가야 한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럴수록 남은 자를 구원해야 하는 교회의 임무가 더 막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집을 팔아 일부를 내놓아도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까? ‘거짓말’하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간증을 해도 거짓말을 보태면 더 은혜로운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거짓말과 목숨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모두 다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거룩성에 사람의 거짓말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거룩성이 중요합니까? 신자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위해 하나님을 속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타락하는 것이고, 세상으로부터 주식회사, 기업 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짓말 했다고 죽이는 것은 너무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멸종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죽어야 합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나니아의 죽음은 성령을 속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형벌 즉 죽음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부부가 한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영광을 얻고자 자신의 소유 중 일부를 팔아 다 판 것처럼 말한 죄입니다. 어쩌면 다 팔아서 영광을 얻고 싶었지만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작으면서 많은 액수를 내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떠한 정신과 마음으로 예배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을 좋아하는 교회는 거룩한 교회의 순결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교회는 돈으로 운영되는 사회적인 기업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과 가르침으로 생활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성이 사라지면 사탄이 침투하기에 좋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속이고자 하는 마음도 많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을 속이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너는 마음으로 성령을 속이는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속이기로 마음을 먹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죽인 것입니다. 만약 아나니아를 살려두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나니아처럼 하면 영광을 받을 수 있다고 초대교회는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로부터 여러번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끝까지 속임으로 성령께서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위해 심판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말씀을 들으면 불편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키는 것은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이웃을 구원할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유기체인 옴의 한 지체가 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목회자로서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목회자도 교회의 한 지체요 성도입니다. 누구나 교회 안에서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유기적 연합이요, 주님의 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추구해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께서 지상에 세우신 유일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순결성과 거룩성, 의로움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한 보호와 인도를 받을 때만이 참으로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한 지체로서 자기만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의 방편으로 자신의 소유를 내놓는다는 일체감이 있었다면 결코 성령을 시험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일은 꾸미지 않았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매우 부정적인 내용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을 통해 기록함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 부부는 바나바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에 동참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던 그들은 종교적 명예와 세상적적인 부의 영광을 함께 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을 속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교회가 지양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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