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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엡2:14-18
강설날짜 2022-05-01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Fm9v71yD6s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엡2:14-18)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원수에서 이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사귐이 있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양식을 먹기 위해 말씀을 사모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에 성경을 사모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화평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화평은 진정한 화평히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화평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화평이기에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화평이 무엇인가를 삶을 생활하며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전하기 위해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삶을 생활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컽음”을 받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는 진정한 보물을 세상 사람에게 보여줍니다. 성도는 삶 속에서 예배함으로 화평히 무엇인가를 알도록 합니다.

 

화평이 있는 성도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신뢰의 교제를 합니다. 성도는 내적 평화를 어떻게 가지며, 어떻게 평화의 도구들이 될 수 있는지를 삶에서 생활로 보여주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화평을 말할 때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화목과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이제는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화평을 누리며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감출 수 없는 신분을 드러냅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신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은혜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복을 받은 성도이기에 세상에서 화평케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는 세상에서 화평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화평케 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화평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모든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라는 강설을 듣기 전 지난주 말씀을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물질이 많으면, 지식이 많으면 권력이 있으면 평화가 있습니까? 오히려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것이 원죄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와 반대로 화평을 지닌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섬김의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화평한 삶을 생활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세상은 불화와 대립과 분열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입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고전10: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옛사람이었을 때 어떤 존재였습니까?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자들로부터 할례 받지 않는 무리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선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에 대해서 이방인이요 무할례 자라고 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죄인처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과 산모를 도와주는 것도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개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던 자였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참한 현실에 보내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메시야가 누구신지 몰랐지만, 복음을 듣고 이제는 메시야를 알고 있습니다. 비참한 현실에서 진정환 화평이 무엇인지 아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알게 된 비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개된 비밀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해 화평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내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원죄로 인해 막혔던 담을 예수님께서 허무심으로 성도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멀리 있던 자에서 성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을 우리만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감출 수 없는 공개된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본문을 통해 진정한 화평이 무엇인지 말씀으로 알도록 하겠습니다. 14절을 보시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있게 에베소 교회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생각하는 화평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화평만이 온전한 평화입니다. 그 화평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이며 사람과 사람의 화평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화평한 존재이기에 세상 속에서도 화평히 있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화평이 있기에 세상에서 화평케될 수 있도록 삶으로 예배합니다. 특정한 시간만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열심 그런데 세상에서 세상 사람과 같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것으로만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신님 자체가 화평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화평은 온전하므로 성도는 만물을 충만하도록 하며 통일되도록 부르심을 입은 교회이기에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 밖에서 화평은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은 평화를 누리고자 하지만 오히려 자신만을 위한 삶을 생활합니다. 그러면서 평화를 외치지만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힌 담을 당신님의 몸으로 허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성도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즉 할례 자와 무할례 자를 하나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장벽이 있듯이 유대인과 이방인도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중보자로서 장벽을 허무시고 하나의 화평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학벌과 신분 등이 달라도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화평을 위해 무엇을 폐하셨습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입니다. 14절의 말씀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 없다면 화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화평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화목하기 위해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충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망을 요구합니다. 사람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사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님만이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율법을 없애 버렸다는 것입니까? 율법을 무력하게 만드셨는가? 그러면 사도 바울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5:17절에서 그것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에서 율법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서로 충돌되는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도덕적 그리고 의식적 마지막으로 법률적인 율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사람이 죄인임을 알도록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개로 만들어 지키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막혔던 담에서 화평을 누리는 성도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서로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는 율법을 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함으로 진정한 복음을 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웃을 속이고자 하지만, 성도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사랑을 알기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구약의 율법보다 오히려 강한 사랑입니다. 외적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지킬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님의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 율법의 담이 없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즉 교회 안에 있으면 서로 담이 없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은 독립된 사람으로 활동 하지만, 새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로 있을 수 있도록 교회를 주셨습니다. 막혔던 장벽을 예수님께서 허무시고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사람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옛사람과 다른 새로운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서로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으며 신앙생활 하지만, 비그리스도인은 원죄로 인해 자신을 위한 삶을 생활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새사람으로 지어 화평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사람은 할 수 없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화평을 누리며 새사람이 된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사건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시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존재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2:1절에서 “허울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삶을 생활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는 새로운 생명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 화평한 삶을 생활합니다. 옛사람은 약속이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은 영원한 삶이 있기에 부활을 믿으며 삶으로 예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으로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부활의 소망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예수님께서 사귐이 있는 관계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화목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원수의 관계에서 화평케 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로 존재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평의 범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입니다. 예수님의 화평은 먼 곳에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모두 화평케 하셨습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와 같은 이방인입니다. 가까운 곳은 유대인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갈3:28절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위로와 화목을 받으며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은 교회를 오해합니다. 우리 교회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 교회만 메이커 교회요 하나님의 교회라 생각합니다. 과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의 교회입니다. 서로 섬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특별한 날에 전도 행사를 하며 세상 사람이든 주위 교회 성도든 초청합니다. 이 세상에 특별한 교회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혔던 담을 허무심으로 우리는 평안을 누리는 성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 구성된 보편교회임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화목하도록 하셨는데 가짜 성도에 의해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화평을 누립니다. 그런 교회로 존재하는 지팡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건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사모하며 세상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세상 사람과 화평케 해야 하는 이유를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세상 사람과 화평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원수로 지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은 어둠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빛의 자녀로서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도 죄로 인해 옛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어느 누가 구원받는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나 사랑해야 합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사람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서로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보증하여 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니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과거에 원수였지만 이제는 십자가를 통해 화해한 성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화평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평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교제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죄의 담을 허무심으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성도입니다. 이런 특권은 세상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어진 특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화평은 중요합니다. 세상과 다른 화평은 영원한 생명이 있도록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화평케 하심으로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 세상 사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 화평케 하도록 하신 값진 대가입니다. 피의 대가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는 영광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화평히 있습니다. 막혀던 담을 허물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이제는 막힌 담이 없습니다. 율법을 폐하심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형벌을 감당하여 주심으로 십자가의 사건으로 모든 갈등을 해결하셨습니다. 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심으로 한 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화평을 누리면서 세상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화평을 누리는 지팡이 교회는 삶으로 예배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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