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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3:17-26
강설날짜 2018-07-08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가 강설하다(2)-행3:17-26

 

지난 주 강설이 무엇이었습니까?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가 강설하다”입니다. 오늘은 같은 주제로 하나님께서 은혜의 방도인 말씀을 통해 풍성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고친 사람이 누구인가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지팡이교회는 “지상대명령”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돈 즉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말은 실제적으로 앉은뱅이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함으로 완전히 치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인생에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삶에서 주님을 구하고 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을 속이면서 돈에 욕심이 많습니까?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주목된 것을 바르게 가르쳐 주고자 “솔로몬의 행각”에서 강설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일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였기 때문에 놀래면서 더욱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난 주 강설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를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왜 앉은뱅이를 고친 것인지를 알려야 하는데, 어떤 분들은 고친 것에만 관심을 두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중요한 것입니까? 병을 고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까? 병이 치유되는 것에만 더 중요한 것입니까? 베드로의 강설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의 강설을 듣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들은 후에는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합니까? 사람중심입니까? 하나님 중심입니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의(조상) 하나님과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아는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듣고 있는 그들의 죄를 분명하게 드러냄으로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14절과 15절에서 ‘거룩하고 의로운 이’, 생명의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분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아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놀랬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자신들이 죽였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듣는 유대인에게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로서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며 그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앉은뱅이를 통해서 전하였던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지난주 강설을 통해서 본문을 차분하게 읽어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앉은뱅이 사건, 등장인물들, 성전 미문, 솔로몬의 행각 등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성전미문에서 오랫동안 구걸을 해 왔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유대인들에게는 구걸하는 사람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기도하러 성전에 가지만 정작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종교와 신앙” 그리고 “성전과 예수” 그리고 ‘교회와 세상’, ‘예배당과 성전“의 의미를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성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핵심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떠합니까? 강도의 소굴입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장소입니까?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주목된 시선을 향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까?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동일하게 전해야 할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그 누구나 예수님에게 돌이킬 수 있는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는 현실을 보면 교회의 사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16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으로 즉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의 믿음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베드로는 말하고 행한 것은 자신이지만 결코 자신의 능력과 권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믿음으로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즉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강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베드로의 강설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찔려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깜깜한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까닭에 그렇게 한 줄로 안다는 것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용서를 하는 것아 아니라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의 강설을 듣는 사람) 종교지도자들이 지혜로운 줄 알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는 형벌을 줄여 줄 수는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면제받을 수 없습니다. 지팡이교회는 매주 강설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돌이키지 아니한다면 아마도 그 당시 사람들보다 더 무지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회개를 통하여 용서함을 받을 기회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메시야이심을 알고도 거부하거나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졌지만 믿지 아니하는 것은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지한 유대인들에게 18절 첫 시작을 보시면 “그러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죄를 단순히 죄를 폭로하고 들추어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러나’라는 강조 접속사를 사용하여 이 모든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시면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고난 받으실 예수님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를 위한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유대인의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구약 성경이 예언한 대로 불순종과 불신앙이 누적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왜곡하면 예수님이 오셔도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복음을 잘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는 전했지만 후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을 위한 종교로 만들어 버림으로 유대인들은 무지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예언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 친히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이루어진 즉 예언이 성취된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강설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막장 드라마를 보시면 나중에는 결론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도 막장 드라마처럼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싶습니까? 베드로는 돌이킬 수 있도록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베드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수난보다 더 중요한 죄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된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생활 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행복을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들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베드로를 통해 들었다면 결단해야 합니다. 당연히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상대명령”을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만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때가 됨으로 20절을 보시면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비참한 현실에 오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세상 사람도 잘 아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화해의 결정적인 조건은 아들이 돌아옴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아버지의 반겨줌이요 받아들여줌에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 반겨주시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의 강설을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옷 입기 위하여 죄를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분명하게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지만 다시 세상에 오십니다. 이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최종적으로 완성시킬 만한 능력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직 의지할 대상은 예수님임을 믿으십시오.

 

자신이 예수님을 믿을 때 회개를 할 때 당장 예수님이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남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믿음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2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만물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만물이 회복되도록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현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마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1절에서 제발 아십시오. 알아듣고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주의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18절에 말씀했던 것을 22-23절에서 더 자세하게 전합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를 구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한다는 아주 무서운 소리를 전한 것입니다. 구원은 이처럼 들음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한 대로 그 예언자는 누구십니까?

 

모세를 참으로 믿는다면 예수님 역시 참으로 믿게 될 것이니 어서 회개하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요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누립니다. 유대인이 잘 알고 있는 모세의 예언을 통해 가르쳐 줌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강설(설교)을 들어보면 본문을 전하지 아니하면서 세상적인 예화로 마무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오직 복음이 아니었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 후 만나와 메추라기를 제공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생명의 떡을 주시지 아니했습니까?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어 준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생수의 근원임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모세의 사역은 오직 사람의 육신을 위한 것이었고 제한적인 사역 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또한 우리도 같은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사랑하는 성도님, 구약에서 모세만이 사역을 한 것입니까? 모세만이 예언 한 것입니까? 베드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선지자를 이야기 합니다. 24절을 보시면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모세,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야 등 많은 선지자들이 오실 메시야를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실 것이고, 죽음의 형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을 전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하여 전하여지지만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되었던 분이셨고, 그 예언대로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메시야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은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세에 의지한 사도들의 활동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실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만이 증거자입니까? 오늘날의 지팡이교회도 증거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을 의지 하고 신뢰해야 하는 성도요, 교회요, 거룩한 신부요, 군사다운 신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성도님,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여 주신 것을 25-2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의 강설은 이제 청중들에게 너희들이 선지자들의 자손임을 강조함으로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불순종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언약의 정수를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모든 족속이 복되게 하는 언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이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언약의 약속을 하셨고 그것을 모세와 선지자를 통하여 알리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베드로는 강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리고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요 성도인 우리가 복음을 제시하고 증거 하는 것은 사도들과 유사한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권능에 힘입은 행동과 성경에 근거한 언어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대명령”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복음에 무지한 세상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으로 전도하여 구원 얻을 기회를 전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해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를 이루십니다. 우리를 통해 남은 자들이 받을 복의 내용은 ‘악함’을 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악함을 버림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행각에서의 베드로의 강설은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고 마무리를 했습니다. 회개하여 악함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사도의 간절한 강설은 끝을 맺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결국 사도행전 3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앉은뱅이가 고침 받는 기적 자체 가 아니리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치유 기적 자체만 강조하여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나무만 보는 것입니다. 마치 숲을 못 보는 안목을 가진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표적에 불과합니다. 앉은뱅이를 통한 기적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는 누구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를 통한 강설은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메시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성령 받아서 권능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결국 돈과 명예를 더 사랑하기도 합니다. 정작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것은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음을 설명하고 듣도록 하는 역사적인 기적이 성경에 있습니다. 다른 것을 구하기 전에 성경에 있는 말씀을 믿음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야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성경의 말씀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던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을 풀어서 증거 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증거자로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만 전해야 합니다. 만물이 새롭게 될 때 우주를 온전히 통치하실 것이지만 그 이 전까지는 교회의 머리로서 신앙 공동체를 주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요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때를 놓치면 장차 재림하셔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 그리고 모든 능력으로 회개하지 아니한 자를 멸하십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권능과 능력 그리고 권세 등을 물려받았다고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나를 인정해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아시는 성도님 그리고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움직여 주실 것을 믿으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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