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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빌2:5-11
강설날짜 2022-11-13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빌2:5-11)

 

이 세상에는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온전하신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태원 참사” 또는 “10.29 참사”를 아실 것입니다. 한국 역사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 10월 29일에 일어난 비극의 참사입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참사입니다. 용산 참사, 삼풍백화점, 세월호와 다른 비극의 참사입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혼잡으로 인해 일어난 참사입니다. 많은 사람이 길거리에서 사망한 사건으로는 최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었던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이 세상은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온전하다면 이런 비극적인 참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죄는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오직 온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만 믿을 때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것이 없지만, 하늘나라는 온전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는 슬픔과 눈물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생활한 후 주님의 재림 때 부활한 사람은 슬픔과 눈물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성경의 말씀으로 남은 자를 구원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다툼이나 허영”으로 싸우면 안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겸손한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권면과 사랑 그리고 성령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긍휼과 자비로 교회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툼과 허영”은 마귀가 좋아합니다. 마귀는 이런 것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마귀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핼러윈은 성경의 말씀과 다른 축제입니다. 핼러윈은 기독교와 다른 문화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으로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켜가야 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를 아시면서도 남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남은 자) 구원 맞았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과거의 삶을 회개한 성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슬픔과 눈물을 흘러야 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의 감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야 할 방향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은 당신님의 행적입니다. 그 행적으로 인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삶을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교회는 각자 자신을 돌보며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기쁨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은 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입니다. 이런 기쁨을 누리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으로 우리는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5절을 보시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을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없다면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는 서로 돌아보는 생활을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람은 심장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심장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생활하는 영적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행적에서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겸손한 삶을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도 겸손한 삶을 생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남은 자를 위해 교제하셨습니다. 남은 자와 교제하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구현하기는 불가합니다. 그러니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따라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겸손을 이야기하면서 구원의 사건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구원에는 겸손과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온전한 겸손과 온전과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남은 자를 구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알도록 빌립보 성도에게 6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만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구원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알고 싶으면 마태복음 강설을 홈페이지에서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것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온전하게 알 수 있는 날은 부활할 때입니다. 그때까지 온전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만큼 알아도 충분합니다. 사람은 죄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겸손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허영과 교만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처럼 동등 된 분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님의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와 같은 삶을 생활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 존재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좀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과 같이 되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몸이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낍니다. 우리의 운명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하시는 데 그러면 우리와 같은 죄도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권위를 비우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본체와 신성 등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각자 필요한 만큼 알려주신 것을 감사하며 믿음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우리에게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을 8절에서 말씀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야기한 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보여주신 삶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오직 온전한 순종이셨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없이 십자가의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모든 것을 낮추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알 수 있도록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명확하게 기록함으로 십자가의 죽음은 온전한 겸손이요 순종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온전한 순종은 낮아지심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예수님의 성육신은 가장 낮아지심의 극치입니다. 그리함으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구원을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대가는 비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성육신으로 계실 때 존귀와 영광 그리고 부자의 삶이 아니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부터 비방과 모멸 등의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오히려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죄로 인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며 영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한 삶을 생활할 수 있도록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이 무엇인지 성경으로부터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교회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는 바른길을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겸손하며 거룩한 공교회가 될 수 있도록 서로 돌아보도록 하십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당신님의 비하와 순종에서 새로운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9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입니다. “이러므로”로 시작함으로 새로운 전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높은 자리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온전한 겸손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예수님께 “주”라고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입니다. 11절에 대한 것은 조금 있다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는데 그것은 “주”입니다. 주라는 것은 만물을 통치하는 신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께서는 주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이제는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주”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45:2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10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주”이시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은 모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무릎을 꿇게 하심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예수님께 경배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백성이기에 예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함으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이 영광을 모르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 때에 후회하며 슬퍼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기쁨의 극치를 누리며 예수님께 면류관을 벗어서 감사함의 기쁨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며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도록 하심으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당신님 즉 주를 믿도록 하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으니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으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빌립보 교회와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에 관한 결정에 이르는 말씀을 11절에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에 대한 마무리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합니다. 주라고 시인한다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만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라고 고백할 때 비참한 세상에서 인내하며 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에 주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사람들은 로마 황제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에 주라고 했습니다. 주라고 시인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시대는 로마 황제였지만, 오늘날 시대는 무엇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나 자신입니까? 돈과 권력입니까? 아니며 사람입니까? 교회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오직 예수님만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며 힘을 주십니다. 인내할 수 있도록 하시며 극치에 이르는 주님의 때에 가장 행복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입으로 주라 시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도가 왜 이리 힘든지 아실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죄는 무섭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기에 사도 바울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 로마 감옥에서 자신의 몸 돌보기도 힘든데도 편지를 써 참된 진리를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생활하고 있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을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읽으며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빌립보서를 통해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삶으로 온전한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만 할 수 있는 참된 희생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교회가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뜻대로 삶을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온전한 순종의 삶을 생활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보다 예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보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알림으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을 늘 기억하며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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