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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14-36
강설날짜 2018-06-03

오늘도 계속해서 사도행전 강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서 오랜 신앙의 생활을 한 성도라면 대체적으로 “베드로의 오순절 강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말씀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방도인 강설을 통하여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복음의 증인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기 전에 잠시 지난 주 강설인 “성령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제사를 하러 온 사람들은 크고 급한 바람 소리를 듣고 다 놀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각 사람이 성령 충만함을 받아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 언어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신기하게 여기며 “이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라고 하면서 “시골뜨기 혹은 이방인들과 친밀”하게 지낸 것을 비꼬아 갈릴리 사람이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누가는 성령 강림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9-11절까지 유대인들이 살았던 15개의 지리적 장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았던 디아스포라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신비한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신기하고 놀랬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큰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령 강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욱 조롱하며 “새 술”에 취했다고 한 것입니다. 새 술은 오랫동안 숙성된 술이 아니라 다 발효되지 않은 신선하고 달콤한 포도즙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즙을 먹고 취할 수 있습니까? 성령 강림을 받은 사람들은 이처럼 조롱을 당하였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하나님의 큰 일’을 말만하면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베드로는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 베드로는 14절에서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우리들을 향해 새 술에 취했다고 하는데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강설을 한 시간을 구체적으로 15절에서는 “때가 제 삼 시니”라고 기록하는 것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이 시간에 술에 취했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기도 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오순절에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오순절 축제요 맥추절로 보리 수확을 마무리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후반절에서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러면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에게 16절에서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라고 하면서 요엘2:28-32절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용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성령 충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성가로 잘 알고 있는 가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 사건은 초대교회 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다시 성령이 다시 온다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미 믿는 자들은 성령을 받은 성도입니다. 누가는 오순절 성령사건을 기록하면서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을 넘어 종말의 마지막 사건들이 어떻게 발생할 것인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가지고 와서 행2:17-18절과 2:19-20절 사이에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를 첨가합니다. 17-18절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누구나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예언할 것이요, 환상을 보고, 꿈을 꾸리라’는 것을 통해 일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지자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구속 사건에 대해 증거하고 선포하는 사실은 하나님 백성이 성령을 받아 새로운 차원의 선지자가 되었다는 반박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 어떤 특수한 사람에게 특히 선지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오순절을 기점으로 하여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것 이라는 사실은 신약시대에 생활하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모든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부여받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주심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은혜입니다. 특히 17-18절에서 동사로 사용된 단어는 모두 미래시제를 사용함으로 19-20절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18b절에서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이 요엘서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우리를 ‘새 술’에 취했다고 하지만 이제 잘 들어 보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19-20절을 보시면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마지막 부분인 우주적 기사의 완전한 경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의 완전한 회개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과 모든 사람들의 역사의 과정에 가장 두드러진 최후의 종말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다시 보시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계실 때 해가 세 시간 동안 어두워진 사건이(눅23:44)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도록 성령 강림함으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회개하고 주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시대인 교회의 시대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의 날로 점점 가고 있는 종말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우리를 ‘새 술’에 취했다고 하지만 이제까지 잘 들었으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를 생활하는 우리에게 구원 사역은 계속되고 있으니 주의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회개하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오직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는 확신입니다. 이처럼 구속의 은혜를 입고자 간절히 원하는 분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사람임을 증거 하는 삶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회개 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 22-36절입니다. 베드로가 강설한 내용을 잘 보시면 실제적으로 한 말은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 말은 아홉 구절이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여섯 구절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강설을 유심히 보면 자기 주장이 아니라 성경을 인용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2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고 하는 것은 1세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아는 바와 같이’라고 함으로 너희들은 모른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확증할 수 있도록 말씀과 권능과 이적 등의 표적을 행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행하셨다’는 설명을 덧붙임으로,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로 정죄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라는 것을 암시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이 누구인가를 강설하면서 36절에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함으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23절에서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너희들은 로마제국의 권력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생명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인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에 의해서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지 힘이 모자라거나 너희들이 힘이 강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것을 모르고 마치 자신들이 힘이 강한 것처럼 생각했으며, 너희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악하게 예수님을 잡아 죽인 것이 아닌가?라고 강설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죽는 것을 힘으로 막지 않으신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실하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여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망하시기만 했습니까? 24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부활이라는 중대한 것이 무엇인지 알리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그리스도를 사망으로 이끌어갔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반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법 없는 자들의 어떤 행동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되어진 일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이 말한 것을 인용합니다. 시16:8-11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다윗)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시16편을 다윗에게만 적용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성령을 통해 강설하면서 이제 그것이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예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윗이 말한 시를 인용하여 25-32절은 부활을 말하고, 33-36절에서는 승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25절을 보시면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스라엘 왕 다윗은 자신의 앞에 그리고 자신의 오른편에 항상 계신 주를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자신 앞에 계신 주 때문에 늘 흔들리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신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뻐함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16:10절을 보시면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27절을 보아도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28절에서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29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은 왕국을 실현하였지만 결국은 죽어 부활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우리 중에 묘로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셨으므로 결코 죽을 수 없으며 실제적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므로 당신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활장이라고 하는 고전15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신뢰하는 교회요 성도요 거룩한 신부인 우리에게도 부활할 수 있도록 보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고백을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인용하고, 이 때 유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윗을 30절에서 이렇게 높여 주고 있습니다. 상반절을 보시면 “그는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은 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선지자라고 한 것입니까? 다윗은 선지자니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주로 알고, 장차 될 일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면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구절은 이미 인용된 27절에 대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선지자는 예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를 단순히 예언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장래에 될 일을 미리 보고 예언한 예언자이면서 영감 받은 시를 많이 써서 하나님을 찬양한 선지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과 관련된 다윗의 선지자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미리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베드로는 32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함으로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에 따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 일에 증인은 제자들만 유대인만이 아니라 ‘다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완전한 복음을 선포하기 원했기 때문에 십자가형과 부활에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3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냥 죽은 가운데에서 일어난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높이심으로 얻은 것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참한 현실에 오셔서 낮아지셨고 결국 죽음이 최후의 비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부활부터로 다시 높여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더욱 높아짐은 장차 최후의 심판자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34-35절에서 시110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왕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는 죽어서 예루살렘 가까이 장사되었고, 그의 육체는 무덤에서 썩었고 부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지금 인용한 이 시는 다윗에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오셔서 그 일을 다 완성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시110:1절은 유대교 해석자들이 난해한 문제로 삼았던 구절로 ‘주’가 누구인지를 몰랐지만 베드로는 ‘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2:1절에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가르친 적이 있듯이 ‘발등상이 된다’는 것은 항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는 36절에서 마지막으로 권고를 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는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 온 집’이라고 함으로 마지막 요지를 단단히 강설로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매우 강조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 민족 또는 종교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 오늘날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앞서 주장했던 모든 내용의 결론으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메시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와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베드로의 메시지의 제목이요 초대 교회 신앙고백의 내용이기도 하였습니다.(롬10:9, 고전12:3)

 

지팡이교회 성도님, 이쯤 되면 베드로의 강설을 들은 사람들은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과 대화할 때 사용하신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사람이 돌변하여 지혜가 생기어서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자신들이 고민했던 문제였고, 자신들이 배신자였고, 자신들의 삶의 체험으로 몸소 겪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전개과정을 상세히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처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처럼 성령 충만함으로 담대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아무런 생각 없이 전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행4:13절을 보시면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유대인들이 놀랬던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을 조롱하여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하였고, 여기서는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베드로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우리 모두에게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복음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처럼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기업처럼 편법 세습한 목사는 징계조차하지 않고 불법 세습에 항의한 목사들은 출교시키는 시대에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미 국무부는 29일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2018 국제종교자유보고서’에서 북한의 종교자유 탄압을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2017년 한 해 동안 종교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19명이 처형당했으며, 770명이 수감됐다. 이 밖에 종교적 이유로 87명이 실종됐고, 48명이 강제이주 당했으며, 44명이 신체적 부상을 입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과거 북한에서 기독교를 포함해 종교를 가진 사람이 1950년에는 전체 인구의 24%였으나 2002년에는 0.016%로 줄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어떠합니까? 제가 고등학교 한 반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몇 명입니까?할 때 두 명이었습니다. 탄압을 받든, 탄압을 받지 않아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시대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는 상업적으로 기업적으로 가고 있는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오순절 강설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으로 전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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