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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5:29-39

지팡이교회는 마15:1-28절의 말씀을 들은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간략하게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에게 항의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는 ‘장로들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구전이 있지만, 그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한다’는 것은 ‘정결’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결’에 대한 규례의 참 뜻은 물로 손을 씻어 외부적인 정결케 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죄로 더러워진 마음과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영혼이 죄로 더러워진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특히 원죄로 부정하게 된 더러움까지 하얀 물처럼 깨끗하게 정결하게 해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백성으로 설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은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도 아닌 가장 타락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두로와 시돈’에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유대인으로부터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조상을 생각 한다면 놀라운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애절하고 끊임없는 간청에도 예수님은 계속하여 침묵하시지만 그 여인을 시험하시는 것이고, 참된 믿음으로 고백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정결한 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깨서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를 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우리가 볼 때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가나안 여인이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는 고백을 함으로 예수님은 그 때서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심으로 구원은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참된 믿음의 고백을 받은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을 떠나서 갈릴리 해변을 따라 이동하던 중 산에 올라가 앉습니다. 마태는 아주 간략하게 기록을 하지만 병행분문이 마가는 막7:31절에서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갈릴리 하면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땅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고 있는 장소는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갈릴리 북동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이방인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인간의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앉히게 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비천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주님의 능력에 굴복한 태도로 보입니다. 자신들의 병이 고침을 받으면서 무리들은 보면서 기이하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보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능력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신은 참 ‘굉장한 신’이라고 하면서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들은 불치의 병이 고침을 받아서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오늘날에도 병만 나을 수 있는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결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셨고, 가나안 여인을 통하여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신 후 또 다른 이방인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역의 연속성으로 생각하면, 죄로 더럽혀진 자신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죄의 중함을 알게 된 그들은 자신의 믿음으로 겸손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단지 병만 낳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함을 드려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 앞에 온 많은 사람을 고치신 후 제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3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무리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있는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신 것도 한없는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동정심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동정심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당신님의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인 것입니다. 무리를 보면서 영적인 결핍과 육적인 결핍을 본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무리들은 굶어 가면서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돌려보내도 ‘기진할까’라는 표현을 하시고 있습니다. 원문으로 좀 더 해석을 하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기운이 다 빠져 버려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은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문 합니다.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제자들은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과거에 경험한 기적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질문은 예수님을 불신하는 것도 아니고 기억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 기적을 기억하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해 주실 것을 믿으면서 반문하는 질문의 태도로 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어떤 분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해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알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질문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34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곧 바로 제자들은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이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하심으로 도저히 무리를 먹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35-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예수님은 무리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땅에 앉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단어를 보야 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도 축사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지나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는 유대인들에게 행하신 기적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유대인의 기도의 관습을 따라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축사는 이방인의 관습에 따라 감사의 기도를 하는 축사입니다. 마태는 축사를 한꺼번에 한 번 한 것으로 기록을 하지만, 같은 병행본문인 마가는 더 구체적으로 막8:6-7절에서는 떡을 먼저 축사하시고, 나중에 다시 생선을 축사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이런 축사를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두 단어를 다 사용하심으로(마26:26-27, 막8:6-7)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37-3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고 기록합니다. 또 여기서 이런 질문도 하셔야 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는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리’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먹고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라고 합니다. 바구니는 어린 아이가 누울 수 있을 정도고, 광주리는 어린도 누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광주리에 대한 것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잠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변질자로 생각하고 공모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럴 때 바울의 제자들이 밤에 성 위에서 광주리로 달아 내려서 예루살렘으로 도망하도록 한 이야기입니다.(행9:15-25) 이처럼 광주리는 어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12바구니와 사천 명을 먹이고 남은 일곱 광주리의 양은 결코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양식과 배부름이 참으로 풍성하다는 표현으로 예수님은 진정한 ‘메시야’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후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어디로 가십니까? 39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오병이어 기적처럼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아니하도록 빨리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정반대로 배를 타시고 ‘마가단’으로 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지팡이교회에게 주님은 필요한 은혜를 주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생각하시면서, 고칠 수 없는 병들을 고쳐 주시고, 사천 명을 먹이심으로 예수님 스스로 당신님이 메시야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복리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소원성취를 하고자 하는 도구로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들이 섬기는 종교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5:7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이행한 것입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긍휼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각자 아등바등 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해 보고자 하기 이전에 주님께 무릎을 꿇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그럴 때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과 지혜로 필요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자신에게 유익한 말씀만 생각 하면서, 현실적인 유익만 얻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내 생각이 다르다면 성경의 말씀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 교통하는 것이고 은혜 가운데 생활하는 자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방인들에게 긍휼의 은혜를 베푸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고 있습니다. 단지 지팡이교회는 아멘으로 응답하면 됩니다. 우리는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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