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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1:17-34
강설날짜 2018-12-23

성찬에 참여하는 지팡이교회를 위해.....(고전11:17-34)

 

오늘날 신자들이 예배당에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참된 신앙의 고백으로 모인 성도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해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종교처럼 예배하면서 헌금을 하면 복을 주실 것을 바라보며 나오신 것입니까? 성찬에 참석해야 하나님께서 더욱 복을 주실 것으로 생각 하면서 나오신 것입니까?

 

어떤 성도는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기보다 자신의 복을 위해 마치 눈도장을 찍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자신을 위한 섬김의 봉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하는 것은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망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면서 자신의 목적과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날이 주의 날인데도 특별한 절기만 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잘못된 신앙인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입니까? 여전히 기도하고 예배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한 목회를 하면 안 됩니다. 과연 진정한 목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으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한 목회를 하는 것은 생명의 복을 주신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예배를 통해 세상의 상품처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의 의미를 변질시킴으로 세상의 종교처럼 만들어 버린 현실 속에서 지팡이교회는 오직 주의 이름만 부르면서 본향을 향해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목회자는 세상의 복을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복음의 증인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찬식을 하는 주일입니다. 카톨릭은 성찬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과 동일한 몸이 성찬식을 통해 매주 반복되는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매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히브리서를 생각해 보시면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에 더 이상 반복적인 제사는 필요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도 이와 비슷한 행위들을 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탄절에 오셔야만 하고 고난주간에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셔서 부활절에는 부활하셔야 하는 것처럼 생각 합니다. 이것이 카톨릭에서 미사로 행하는 성찬의식의 희생제물과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매주 희생 제물로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다시 반복적으로 하는 미사나 매년 탄생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시는 이것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12월 25일 성탄절 특강으로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성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찬에 대한 의미를 잘 알고 성찬에 참여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고전11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7-22절로 성찬과 애찬의 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23-29절로 성찬의 질서를 다루고 있고, 마지막 세 번째는 30-34절로 결론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성찬과 애찬에 대한 여러 가지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질서한 일을 경계하고, 신앙인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세를 자세히 설명한 후, 결론적인 교훈을 주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위해 섬기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찬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만찬”이었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영적 음식”을 먹고, “영적 음료”를 마시는 식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찬 행위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은 “새로운 계약”이고, 새 언약의 백성이 공동체로서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공동체를 생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전10:16절을 보시면 “우리가 축복 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오용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다툼이 있었기 때문에, 예배당 안에서 그것도 한 자리에서 먹어도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분열과 분쟁이 있는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교린도 교회와 같은 현실이라면 성찬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2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라는 의미를 24절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여기서 바울은 성찬을 통해 주의 죽음이 기억되며,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억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27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주의 만찬을 자신의 사적인 식사로 참여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만찬은 형제를 위해 죽음을 당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분열은 하나의 공동체에 맞지 않으며, 오직 형제와의 연합만이 참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 사랑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첫사랑을 경험한 말씀이 각자 다르고, 장소도 다르고, 그 임한 사랑의 모습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다르고 임한 사랑의 형태가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사랑에 기초할 것입니다. 첫사랑을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성찬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올 한해를 마감하면서 오늘 거행하는 성찬식을 통해 새롭게 첫 사랑의 감격과 감동을 회복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달려야할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몸이 찢기시고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신앙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사랑에 감사해서 주님께 충성하고 헌신합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랍기 때문에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잘 기억하게 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만찬을 행하시면서 이를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4-2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떡은 주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곧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잔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피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성만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만찬에 참여하는 지팡이교회를 위해 세 가지로 정리를 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기념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남네시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기억하라는 뜻으로써 스쳐지나가는 일시적인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기억하여서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 깊이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늘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께 헌신하며 충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1:26절을 보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진정한 의미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하는데 있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전파하는 삶이 진정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남은 삶 동안 십자가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그 성만찬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새롭게 덧입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자기를 살피는데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1:27-2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성찬에 참여할 때는 자신을 살펴 합당한 모습으로 참여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회개하지 않으면서 참석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고 참석해서도 안 됩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판단하는 마음으로 참석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완벽해서 참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부족하고 죄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한 다음에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삶이 되어져야 합니다. 나에게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형제에 대한 미움과 판단하는 마음이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좌표가 잘못되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살피고 성결하고 더욱 충성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곧 성찬에 참여함으로 자신을 살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아름다운 삶, 더욱 헌신하고 충성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찬의 의미는 자신을 살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데 성찬의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요약한다면 먼저, 주님의 십자가 구원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그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잘 알고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6:53-58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삶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를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 죽은 것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우리가 이 주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먼저 내 속에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증거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자신을 살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결단하는 귀한 성찬식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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