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20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2:22-37
강설날짜 2016-08-28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Qiv2Mij3N8A

오늘 우리는 예배당에 함께 모여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서로 다른 형편의 삶의 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예배를 하는 것은 단순히 삶의 힘든 육체의 쉼을 얻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혼의 쉼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라고 하시면서 당신님에게 나아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은혜를 통하여 당신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마음으로 육체와 영혼의 쉼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논쟁에서 참 안식이 무엇인가를 잘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육체적인 일에서 쉬는 날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예배로 참여하는 날이요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짐승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 예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지난주에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당하지만 예수님은 통하여 은혜를 받고 진정한 안식일의 쉼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의 죽음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다투지도 아니하시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마음이 온유하심과 겸손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가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의미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으로 당신님의 백성의 짐을 친히 대신 감당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 나의 짐을 감당하여 주십니까? 진정한 안식일의 쉼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야를 소개한 “종의 노래”인 사42장의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의 쉼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분위기에서 계속하여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시는 당신님의 정체성을 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말씀과 기적을 통하여 당신님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려 주셨어도 특히 바리새인들은 이해하기 보다는 오해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은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기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당신님의 정체에 대한 오해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예수님을 오해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시는가를 알려 주시기도 하십니다.

 

먼저 22절을 보시면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참으로 놀랄만한 일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귀신 들려 있고, 장님이요, 벙어리’를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동안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보아도 끔찍하고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그 때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오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처럼 회복이 됩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역사적인 사실임을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것이고,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신가를 알려 주시기도 합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들은 23절에서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라고 놀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심히 볼 동사는 “놀라다”입니다. 헬라어 단어로 마태복음에서 유일하여 여기서만 나오는 단어로 “쫓아내다, 제쳐놓다, 비켜내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정치적과 군사적으로 해방하시는 것이고, 치료하시는 것으로만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궁금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귀신들리고 육체적인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유일하게 고치고 있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바리새인들은 2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놀라면서도 예수님의 당신님의 권세를 부각시키고 있는 중에서도 오히려 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사탄이 만든 허수아비의 메시야로 믿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정반대의 귀신의 왕으로 그리고 사탄이 한 것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25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과 모순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에 귀신의 왕이 지금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라면, 그의 왕국과 통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귀신들이 하는 역사를 돕지 아니하겠는가? 귀신의 왕이 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영역을 내어 주면서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공정한 마음으로 귀신이 하는 것과 예수님이 아시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를 분별하라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26절에서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사탄의 나라가 분쟁을 일으키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아마도 주전 4년 헤롯 대왕이 사망하면서 가족과 나라가 분열된 사건을 생각하라는 의도로 말씀하신 배경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27절에서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여기서 ‘너희의 아들들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리새인들의 아들인 제자를 인정한다면 당신님은 스스도 예수님도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하는 행동과 말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시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28절에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바알세불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라고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권세가 바알세불에게서 온 것이 아닌 것을 제거하신 후, 예수님은 당신님의 권세가 하나님의 성령님의 힘입어 온 것임으로 분명히 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28b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이래적으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이 거의 드물고 겨우 다섯 번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쓰는 글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 천국이라는 말이 모두 32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임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지만 여기서는 더욱 명확하게 ‘임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수천 년 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의 왕국 하나님 나라의 임재 바로 지금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우리도 지금 이런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드러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통치의 영역이 실현되기 때문에, 바알세불과 사탄을 몰아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29절에서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더욱 적극적으로 사탄의 세력을 쳐부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쳤습니다. 바로 그 분이 당신님이신 예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계속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지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기 때문에 사탄은 더욱 치밀게 공격을 할 것이지만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주님만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사탄을 축출하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사탄을 멸하실 결정적인 전쟁과 근본적인 승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으로 섬기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런 후 다시 재림의 주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당신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 승리함으로 승리의 면류관을 그 때에 다시 왕의 왕 되시는 예수님께 올려 드립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으로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 시키고, 사탄에게 속했던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자유 함으로 안식일의 안식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30절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를 쫓아내신 것을 그들에게 특히 바리새인에게 보여 주셨지만 당신님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은 반역과 훼방자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만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사람들에게도 분명하게 선택하라는 의도를 지닌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변하시고 보호하시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공세를 취하여 외식하는 그들에게 반격하는 것입니다.

 

31-3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많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가 과연 무엇입니까? 30절의 첫 시작을 ‘그러므로’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을 쫓아냈다는 앞의 주장과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결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면서 당신님의 신적인 권위를 가지 있다는 의미로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과 사람의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함을 얻지만 32절에서는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문맥적으로 ‘그러므로’를 고려하면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바리새인과 지금 그들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귀신의 왕’이라고 하면서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면서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병고치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다는 것은 회개를 한다는 의미기 때문에 회개는 성령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것은 성령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33절에서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말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말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할 때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만남은 그들의 말 자체가 그들의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를 통해서 좋다 하든지 좋지 않다고 하든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과 행동에 대해서 분명히 우리는 입장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4절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에서는 ‘독사듸 자식들아’라고 할 때는 바리새인들을 말할 때 지칭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의 숨겨진 정체성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 자신이 사탄에 속했기 때문에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좋은 나무와 열매를 통하여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5절에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사람의 마음의 가리키는 내재적이고 보이지 않는 인격을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36-37절의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너희는 분명히 심판을 받을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자신들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하여 다른 사람도 믿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말은 하기 쉽지만 다시 주어 담기는 어려운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 하지만 행동은 정반대라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귀신 들리고, 장님이요, 벙어리“인 사람을 치료하신 것을 너무 경솔하게 말한 것을 후회할 수 없는 심판으로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양심적으로 바알세불이라고 인정하시고 싶습니까? 그런데 ‘귀신 들리고, 장님이요, 벙어리’인 사람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을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신자는 어떠한 중립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믿는가 아니면 사탄에 올무에서 마음대로 거짓으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기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하고 있다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오늘 말씀을 간략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으로 요약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바리새인들의 행동의 잘못과 나의 신앙관을 비교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3. 성령님을 훼방하는 것과 예수님을 훼방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4. 우리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 말과 행동을 하십니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110 가이오게 삼박자 축복을 말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길을 잘 가라는 것이다. 전은덕 63
109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때의 주님의 반응(마12:14-21절) 전은덕 마12:14-21절 2016-08-21 122
» 예수님과 바알세불 나의 선택은? 전은덕 마12:22-37 2016-08-28 200
107 외식하는 자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거부함 전은덕 마12:38-45 2016-09-11 187
106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은 누구인가? 전은덕 마12:46-50 2016-09-18 138
105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전은덕 마13:1-9 2016-09-25 238
104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풀이 전은덕 마13:10-23 2016-10-02 101
103 제8항 본질에서는 한 분이지만 삼위로 구별되는 하나님 전은덕 신6:4-5 2016-10-09 104
102 가라지, 겨자씨, 누룩의 비유 전은덕 마13:24-43 2016-10-09 154
101 보화, 진주, 그물 비유 전은덕 마13:44-50 2016-10-16 143
100 비유들의 결론과 예수님을 배척함 전은덕 마13:51-58 2016-10-23 88
99 세례 요한의 죽음 전은덕 마14:1-12 2016-10-30 126
98 왜 오천 명을 먹이셨을까? 전은덕 마14:13-21 2016-11-06 78
97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과 게네사렛에서 병자를 고치심 전은덕 마14:22-36 2016-11-13 71
96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현실을 바라보라 전은덕 슥1:1-6 2016-11-20 169
95 장로들의 전통1 전은덕 2016-11-27 125
94 장로들의 전통2 전은덕 마15:1-20 2016-12-04 171
93 예수님의 오심은? 전은덕 요3:1-18 2016-12-25 41
92 신앙, 믿음과 행함(전장원 목사) 전은덕 약1:17-27 2017-01-01 70
91 가나안 여인의 믿음 전은덕 마15:21-28 11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