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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0:29-34
강설날짜 2017-06-11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확인하신 후 세 번에 걸쳐서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제자들은 더욱 말씀을 생각하면서 고민하고 질문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서로 시기심과 질투로 분개하여 다투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지팡이교회는 지난주에 ‘한 어머니의 요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요구는 무엇이었습니까? 두 아들의 어머니가 엎드려 절하면서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누구이기에 예수님께 우편과 좌편에 앉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학자들은 친적(이모)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동료인 제자들 모르게 욕망과 이기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분개했었습니다. 오히려 두 제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잘 생각해야 했지만 오히려 으뜸이 되고자 하는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혹시 기억하십니까? 22-2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보다 으뜸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런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분개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25-27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집권자들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세상적인 모든 것들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사용하여 으뜸이 되고자 과시하는 것을 비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권세와 크고자 하는 것 그리고 으뜸을 들어서 세상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신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들으면 나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말씀이 다른 것이 무엇이고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종이 되어야 하고 섬겨야 하는 것은 세상적인 권세와 지위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섬김의 수고와 고난의 영광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대속물’이라고 하심으로 바로 나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목숨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왜 그런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 잔은 예수님이 가셨던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 길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 날에 다스림의 통치에 참여하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강설을 통해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사건을 통해서 ‘종’과 ‘대속물’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는 것을 마태는 두 맹인을 통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통해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중에서 맹인도 포함됩니다. 오늘은 맹인 두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마9:27-31절에서 맹인을 고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와 같은 내용입니까? 아닙니다. 두 맹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30절에서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지만 알렸습니다. 왜 다른지 그리고 무엇을 전달하시고자 하는지 의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29절을 보시면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을 ‘여리고’라고 지명을 사용하심으로 알려 주십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합니다. 대체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24키로미터 떨어진 거리로 지팡이교회당에서 망우리 또는 상봉역의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합니다. 병행본문인 눅18:35절은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라고 기록함으로 마태와 다른 본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병행본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저는 당시에 옛 여리고와 새 여리고가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과거의 여리고는 주전 8,000년 전에 세워진 고대도시라면 새 여리고는 1.5키로미터 거리로 헤롯왕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맹인을 고치신 사건을 예수님께서 새 여리고를 떠나갈 때로 보는 것이 마태고, 누가는 옛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로 보는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의 시각에 따라 기록한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다보니 소문은 소문을 낳았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여리고를 떠나 갈 때에도 큰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많이 모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이 모여든 사람들은 각각 다른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자, 정치적인 메시야로, 병을 고치고자 하는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합니까?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병을 낫게 해 주시는 예수님으로만 보이십니까?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중에 30절을 보시면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난데없이 소리를 외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맹인이라고 함으로 마9장의 본문과 같다고 하지만 다릅니다. 왜 다릅니까? 9장에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두 맹인은 고침을 받은 후 34b절을 보시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두 맹인으로만 기록을 하지만 병행본문인 막10:46B절은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그 이름의 뜻은 “존귀한 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이름처럼 예수님을 안 후 존귀한 자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존귀하고 부티가 나는 그런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었고 더욱 마음이 아프게도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구걸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참고로 마태는 두 맹인으로 기록을 함으로 유대인들에게 쓰는 글이기 때문에 두 명은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누가와 마가는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두 증인 보다는 한 맹인인 ‘바디매오’에만 초점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 이방인에게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합니다. 31a절을 보시면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왜 그들이 두 맹인을 꾸짖었는지 모르지만, 인자이신 예수님은 섬기려 하지만 사람들은 두 맹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두 맹인은 하반절에서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마21:9,15절에서 군중들이 사용을 했고, 예수님은 22:42-45절에서 예수님과 다윗의 자손에 대한 가르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두 맹인이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을 잘 드러낸 것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두 맹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을 하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질병을 치료하는 초월적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약자인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지르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같은 유대인들은 잠잠하라고 함으로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회적으로 보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무엇이 다릅니까? 거지와 부자 무엇이 다릅니까? 두 맹인에게는 지금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리를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잠잠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잠잠하라고 하는 그들과 다른 가치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값없이 구원하시는 메시야임을 모르는 것이고, 섬김을 위해서 종의 신분으로 온 그리스도이심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도는 하지 않고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알고자 하고, 신비적인 경험만을 중요시 하는 것은 예수님이 왜 ‘종’과 ‘대속물’로 오셨는지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를 외치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두 맹인에게 예수님은 32절에서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유대인처럼 잠잠하라 나도 휴식 좀 취하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아마도 가르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두 맹인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과 두 맹인에게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놀랬을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사회적인 약자이고 비참한 자신의 현실을 비통하게 아뢰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33절에서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인 ‘눈’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마태는 다소 은유적 의미를 가진 단어(옴마톤)를 사용함으로 영적인 깨달음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두 맹인은 육적인 눈이 뜨기를 원함으로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을 제거해 달라고 하는 간구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영적인 깨달음까지 연결하는 것을 보면 영적인 깨달음을 알라고 같은 유대인에게 외치는 호소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메시야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심으로 더욱 예루살렘으로 그것도 죽음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그 죽음에는 부활이라는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게도 그 길을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특히 사29:18절과 35:5절은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예언함으로 메시야의 증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증표가 두 맹인을 고치심으로 더욱 인자로 오신 섬김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심으로 고난과 죽음은 더욱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섬김의 사랑이십니다. 진정한 섬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의 34a절에서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야적인 증표입니다. 가까이 보고 있는 많은 무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있는 분들도 있었겠지만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이방인이 아니라 메시야를 안다고 하는 유대인 아닙니까?

 

두 맹인은 자신들의 육신적인 눈만 치료가 되었다면 그들은 각자의 길로 떠났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불행한 삶의 생활이 아니라 볼 수 있음으로 거지의 처지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34b절을 보시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는 말씀은 더욱 그들의 영적인 눈이 뜨게 되었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들은 으뜸이 되고자 분개하기 보다는 두 맹인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왜 가시고 있는지 세 번에 걸쳐서 가르쳐 주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깨달음으로 진정한 섬김을 알아야 하는 것이 참된 제자 아닙니까?

 

마태복음 20장은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이야기 하실 때 제자들 중에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를 하여 좌편과 우편에 한 자리씩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당신님의 겸손한 섬김이 희생적 죽음을 수반하는 ‘대속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섬김을 위해서 두 맹인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마태는 유대인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두 맹인을 기록함으로 예루살렘의 입성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메시야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초라하게 본다 할지라도 더욱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두 맹인처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아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기도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당에서 할 수도 있고 골방 등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럴 때 맹인을 고쳐 주신 것과 같이 그리고 믿음을 보신 것과 같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지식적으로 알라고 하는 것은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어두운 눈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영적인 맹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입니다.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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