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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9:1-8
강설날짜 2021-09-26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2ggTt6h6ha8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마9:1-8)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자주 불렀던 복음송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왜 이런 복음송이 유행했을까? 아마도 “당신은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개신교에서 말하는 타락으로 인해 죄로 범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그러면 과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개신교 측면에서 볼 때 좋은 노래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성탄절에 그리고 신입생 환영회 등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은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송에서 말하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더 큰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랑받기 위해 성육신으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막10: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저주를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송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당신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저주받고 있지요”입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런 삶 속에서 부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자들은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당장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지상명령을 담당해야 하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백성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기 위해 오늘도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하며 주는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믿습니다. 지난주 강설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않는 세계 즉 귀신을 알았습니다. 귀신의 정체를 통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세계도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면 귀신도 순종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타락한 마귀라도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 같지만, 마지막 날에는 심판당하는 자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준 것이 지난주 강설이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자신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발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알기에 자신들의 처지를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말한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의 몸에서 나왔지만, 몰살당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마도 돼지는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이 돼지의 몸 안에 들어갔지만, 돼지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로 돌진해 자살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본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시내에 들어가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말했습니다. 이런 일을 알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인 세계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중요했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세상이라도 교회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본분입니다.

 

오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신 후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근거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전진 기지이자 본 동네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본 동네”라고 불릴 만한 이유를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추측하면 예수님의 가족이 이곳으로 옮겨 정착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야 사역을 본격적으로 한 곳으로 마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절을 보시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적을 알기에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쳐줄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간략하게 요약하여 기록했지만,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과(2:2-3) 누가복음은(5:17-19) 네 명의 사람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간략하게 기록했을까? 아마도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이 사건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네 명의 친구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초점을 두기 위한 것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내려보내며 자신들의 친구를 치유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에서 내려오는 중풍병자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모든 복음서마다 중풍병자의 믿음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었기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작은 자라는 의미는 아이와 아들이라는 의미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어른에게도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병행본문인 눅5:20절에서는 “이 사람아”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어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전까지는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죄 사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지붕을 뚫고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셨는가에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병은 죄로 인해 생긴 것이기에 죄 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해 질병이 들어온 것입니다. 원죄가 없다면 사람은 질병에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질병의 원인은 죄의 결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로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람을 받았다고 하심으로 당신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말씀으로만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있던 서기관들이 속으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3절을 보시면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서 죄 사람을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속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신성모독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눅2:7절을 보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입니다. 서기관들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이 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특권을 예수님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죄 사람을 받았다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논쟁을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계기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왜 하셔야 하는가를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안심해야 합니다. 중풍병자야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늘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신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관을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죄 사함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에 대한 선한 마음이 아니라 악한 마음으로 잘못된 것임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5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우리라면 어느것이 더 쉽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 사람과 병을 고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겠냐고 하셨습니다. 속으로 말하고 있던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직접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생각할 때 어느 것이 쉬운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병을 고치기가 쉽다 그와 반대로 죄 사함 받는 것이 쉽다로 나뉩니다. 사람으로서는 병을 고치는 것이 쉬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 사하여 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처지에서 볼 때 둘 다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마도 죄 사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처지에서 볼 때 신성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당신님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전까지는 병자를 고치셨지만, 오늘 이 사건을 통해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협을 무릅쓰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공개적으로 서기관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다는 권세는 중풍병자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일어나 집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죄 사함과 눈에 보이는 세계 즉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인자로 오신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완전히 반박하심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중풍병자는 7절을 보시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집으로 갔습니다.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이라고 마태는 기록했습니다. 죄의 용서도 받고 치료도 받은 중풍병자는 집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가는 길을 상상 이상의 평화롭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종말이 오기 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신도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돼지에게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때를 알기에 더 살기 위해 예수님께 애원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지금은 은혜받을 때요 구원받아야 할 때입니다. 중풍병자가 믿음으로 죄 사함과 치유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죄로부터 돌이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예수님께 순종했던 것처럼 우리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구원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모든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8절을 보시면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입니다. 무리들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과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예수님의 권세를 보고 놀랐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을 본 무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재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자신의 삶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삶을 위해 재물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창조주 위에 건물주라고 합니다. 그만큼 재물이 나의 행복을 지탱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중풍병자를 통해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일어난 일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죄 사함을 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자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것이 더 좋았던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경계하며 핍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 받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께서 감당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영생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병을 많이 고침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육체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즉 당신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기적보다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사모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만 보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보았습니다. 친구들도 믿음이 있기에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믿고 지붕을 뚫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볼 수 있도록 침상을 내려 보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간절한 것입니다. 교회는 간절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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