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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9:9-13
강설날짜 2021-10-03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마9:9-13)

 

“화천대유”의 뜻은 “하늘의 부인 태양이 밝게 타올라 세상을 비추게 되어 모두 만족하고 천하를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하늘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뜻이지만 세상 나라는 어떠합니까? 화천대유를 통해 우리는 상심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습니다. 세상은 갑과 을 그리고 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은 부를 누리고자 애쓰는 삶을 생활합니다. 힘을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그들과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로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과 권세를 잡고자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인 성도는 오히려 주님처럼 섬기고자 하는 삶입니다. 세상 속에서 섬김이 있는 삶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삶의 생활을 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의 삶을 의지했으면 합니다. 내 뜻대로의 삶이 아니라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힘주시기를 바라며 섬김의 삶을 생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세와 물질 등으로 높은 자리에 있고자 하지만, 하늘의 권세를 사모하는 성도는 낮은 자세로 주의 길을 가는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와 청지기로 부르셨기 때문에 섬김의 길을 가고자 애쓰는 삶을 생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세상은 자신을 사랑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주의 길을 가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의 말씀으로 승리하고자 강설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중풍병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이시며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다시 본 동네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잠깐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치유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마태는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알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몸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혼자 거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지붕을 뚫어 침상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치유함을 받고자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본 어떤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가를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 타락한 자들에게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권세가 없습니다. 병을 고칠 힘은 있을지언정 죄를 사하여 주며 구원하여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타락한 자들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사건을 아는 것이고 주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죄를 사하여 주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권세에 대하여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도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 즉시 응답하여 일어나 따랐습니다. 우리는 마태를 잘 알기에 당연히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리고 마태를 제자로 부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세리는 동포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지는 직업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돈도 취급하기 때문에 정결 규례를 무시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마태를 제자로 부른다는 것은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매국노를 제자로 부른다고 할 때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태는 같은 유대인이라도 그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라 할지라도 유대인들로부터 인간말종이라는 소리를 듣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비열한 자라고 생각하는 세리 마태를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므로 자신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전하는 사명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특히 경건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심으로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처럼 외식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누구나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주님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1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입니다. 지금 막 제자로 부르신 마태의 집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은 세리의 집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세리와 함께 식사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세리만 아니라 우리는 그분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것보다 마태가 먼저 제안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식사였을 것입니다. 많은 세리는 마태와 같은 직업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자들 아니면 마태와 인연이 있는 자들로 생각됩니다. 마태가 식사를 제안한 이유는 아마도 같은 동료들을 초청해서 자신의 옛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하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참된 주님의 제자로 생활하겠다는 의지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식사를 통해 서로 상호인정과 평화의 사랑 그리고 언약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즉시 응답한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평소에 진리에 대한 애착이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 말씀을 통해 오실 메시야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세상의 돈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 등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복음을 듣고 마태처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태처럼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타락한 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태와 식사를 하는 예수님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이 한 말은 비난이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통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부정한 식탁 교제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정결규례를 어기는 자가 어떻게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받아들이면 됩니다. 순종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죄인과 같이 취급당하는 세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고 식탁 교제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지도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것을 통해 결점을 확보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권세를 알지 못한 무지의 행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질문함으로 이간질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바리새인입니다. 참으로 애처롭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본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니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고백하며 주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믿음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좋아하시며 그들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2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바리새인들을 향해 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친히 찾아가서 함께 식탁 교제하기도 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영혼이 상한 자를 고쳐주십니다. 죄가 없다면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죄인에게는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흔히 사용되는 속담을 이용해 알아듣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이는 권력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이기에 병든 자를 즉 죄인과 함께 하시며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몸과 영혼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병든자는 의사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처럼 죄를 아는 자들은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이렇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당신님께서는 죄로 병든 영혼을 고치시는 영적 의사로서 죄인과 함께 하며 식탁 교제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절실하게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 찾아가 죄를 사하여 주시며 교회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후 호6: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13절을 보시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입니다. 왜 인용을 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잘 알고 있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호세아가 왜 이런 말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 말을 통해 종교적인 규례들 자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종교에만 집착하여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긍휼을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경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한 호세야가 말한 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긍휼을 원하노라”는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보다 못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의로움만 자랑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위해 나보다 못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호6:6절의 전후 문맥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애와 긍휼을 이용해 호세아 선지자는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 패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합당한 모습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제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인애와 긍휴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의 생활을 하며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님을 사랑하는 자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은 특히 바리새인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래도 외식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자들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잘 알기에 바리새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자만심을 비웃으신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진실하게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외식을 통해 종교의 핵심인 인애와 긍휼을 상실한 자였습니다. 예배할 때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죄를 고백하며 믿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관 즉 신분과 사역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죄인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팜을 당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자들과 함께하며 구원의 길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인과 죄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해도 바리새인들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았다면 긍휼의 의미를 알고 믿었을 것입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돌아보며 인애와 긍휼의 사랑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세상의 권력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연기와 같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연기와 같이 사라지지 않는 메시야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천대유”처럼 보이는 땅을 좋아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더 좋아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와 반대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마음으로 외식하는 것은 인애와 긍휼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모르면 영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모르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처럼 외식하는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가를 꼭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모르기에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며 세상의 것을 더 좋아하는 삶을 생활합니다.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값진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기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의인이 아닙니다. 건강하여 의사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예수님이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기 싫어하는 세리 마태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죄인을 부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일에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마태는 상상도 못 할 은혜를 받은 것에 즉시 답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고별의 식사를 했습니다. 다시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겠다는 것이며 그들에게도 복음이 심어지도록 하는 시간이 되도록 했습니다. 마태와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백성입니다. 특별한 초대를 받은 사람이기에 기쁨으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이처럼 행복합니다. 세상이 누릴 수 없는 특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기에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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