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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9:14-17
강설날짜 2021-10-10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1pAlEhnLZ9M

금식 논쟁보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마9:14-17)

 

다가오는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이 종교개혁을 한 지 504년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카톨릭에 대한 항의서는 95개 조의 반박문이었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요구하며 카톨릭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왜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고자 한 것입니까? 성직자로 생활하면 편안한 인생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건 개혁을 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개신교가 성립되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의 대가로 오늘날의 교회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타락한 교회가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기 위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개혁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자는 누구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목사, 장로, 집사, 신자 등의 수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수평적인 섬김의 관계입니다. 카톨릭처럼 수직적인 계급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교회에서는 성직 매매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성직 매매를 통해 돈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믿음의 선배님들과 함께 하시며 개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가장 타락했던 종교개혁의 시대와 같은 것 같습니다. 성당처럼 예배당은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실내장식이 좋아야 사람들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시대처럼 하나님보다 재물 즉 돈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강설은 번영신학과 기복신앙 등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가야 하는데 상실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다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성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강설 말씀을 듣고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주 말씀은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마태는 세리로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으로 정죄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종도 하기 싫어하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인간말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상상도 못 할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사도이면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마태는 즉각적으로 일어나 따랐습니다. 부를 버렸습니다. 부를 버린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후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대했습니다. 이렇게 초대한 이유는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규례를 어기며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비방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생각해 보아야 했지만,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권세가 중요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마태와 같이 부르심에 응답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말한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구원의 감격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죄인인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하는 죄인입니다. 마태처럼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것을 알면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은 “금식 논쟁보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한 것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금식 논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금식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는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연속 선상에서 금식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에 대한 메시야에 대한 바른 관점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바른 관점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것을 알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어떻게 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질문과 답변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수긍하면 예수님과 당신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 강설을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기 전 40일 동안 금식한 일을 알 것입니다. 금식한 후 마귀의 시험에서 이기셨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도 금식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금식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과 교회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다시 14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입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가?입니다. 왜 세례 요한이 질문하면 되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까? 그것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에게 금식은 보편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경건의 표시이며 통회와 슬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로부터의 정결한 절차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금식이 어떻게 생긴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금식은 대속죄일에만 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출20:10, 레16:1-34, 민29:9011 등) 매년 7월 10일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자주 금식을 했습니다. 참회의 때도 금식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도 금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포로로 끌려간 후 일 년에 네 번 금식 했습니다.(슥8:19) 점점 세월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즉 월요일과 금요일에 금식 했습니다.(눅18:12)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속죄일에만 금식하도록 했지만,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이 끝난 후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온 후 성전을 재건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슥7:5절에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입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관행대로 하다 보니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유대인들은 금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세례 요한도 관습에 따라 자신의 제자들에게 금식하도록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금식해야 하는데 오히려 죄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접 예수님께 당신은 왜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됩니다. 하지만,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질문한 이유가 있습니다.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의 책임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제자들의 책임을 스승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질문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답변하는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항변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하는 것 같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어느 때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는 역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의 도래를 통한 하나님과 백성들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데 금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집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알아 듣도록 하신 것입니다. 혼인집에 손님들이 가득할 때 누가 금식할 수 있겠는가?입니다. 혼인은 즐거움인데 왜 슬퍼하며 금식해야 하는가?입니다. 지금 너희 앞에 있는 내가 신랑이며 구원자이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지금 어느 때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으니 무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뻐하며 구원자이신 메시야이신 당신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받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잠깐 너희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동고동락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비록 초기이지만 당신님께서 장차 죽임을 당할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날을 예고하심으로 메시야이신 당신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기쁨의 시대가 지금이니 혼인 잔치가 열리는 것처럼 즐거워하며 구원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성경을 바르게 알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하면 불신앙으로 인해 영원한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으로 질문하신 다음에 제자들의 행동과 기존 유대 종파의 행동을 대조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새 옷 비유와 새 포도주의 비유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먼저 16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옷감은 오랫동안 사용하면 낡아져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베는 손질하지 않은 천 조각을 의미합니다. 한 번도 세탁하지 않은 천입니다. 이것을 세탁하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거기다 헤어진 곳에 새것을 덧붙이면 낡은 옷은 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사용하여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을 더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새로운 질서가 옛 질서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요한의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는 기억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의식에 접붙여지면 유대교의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립니다. 그러니 너희는 나의 말을 듣고 구원받으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이용하여 비유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진리의 의미가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포도주 부대에 담으면 그 부대를 터뜨리고 말 듯이 죄 사함의 은혜와 그 기쁨이 임한 시대의 새로움은 너무나 특별한 것이어서 비록 이를 미리 증거 하고 내다본 시대라 할지라도 그 옛 시대의 틀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17절에서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래된 가죽 부대에 있는 포도주를 새로운 부대로 포도주를 옮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결과를 당할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새로운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오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가르침과 왕국은 반드시 새로운 조직 즉 교회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에는 너무 굳어 있고 무감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형식에 매여 있는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관습에 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알고 메시야로 믿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주로 오십니다. 그때는 알곡과 가라지 그리고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분되는 심판의 날입니다. 유대인들처럼 경건을 추구하다 보면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과 자유를 생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는 것과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에 넣지 아니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이해함으로 예수님의 참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 때 구원받은 자는 감격이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처럼 외식하며 겉모습만 경건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생활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형식에 매이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기쁨이 있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신부인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 잔치가 열리는 그날까지 믿음의 생활을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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