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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9:18-26)
강설날짜 2021-10-17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ryHD7nFvQVs

예수님께서 관리의 딸과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마9:18-26)

 

그리스도인이든 세상 사람이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를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세상 사람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요구를 하는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주일 중에 하루를 하나님을 위해 떼어놓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정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어떻게 안식일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계획 안에서 사람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람에게 필요한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쉼을 주심으로 당신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이 휴식하는 날이라고 하여 사람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통해 예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팡이 교회는 오늘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에 예배하도록 하심으로 우리가 거룩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주일을 통해 거룩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심으로 마지막 날을 기다리도록 하십니다. 마지막 때를 위해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합니다. 우리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예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것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하셨던 사역을 기록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심과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더 알 수 있도록 마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알도록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금식 논쟁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보다 금식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금식보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는가에 질문을 해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셔야 하는데 오히려 역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지난주 강설 제목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금식 논쟁보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때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혼인집 손님들”이 있을 때 금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 앞에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메시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들은 혼인집에 참석한 자처럼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인집에서 슬퍼하며 금식할 수 있는가?입니다. 혼인집에 신랑이 와 있는것과 같으니 너희는 구원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님이 하셨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입니다.

 

금식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금식을 많이 한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종교지도자 중에 바리새인들의 믿음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었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사망하도록 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망과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하늘 나라를 소망하도록 하셨습니다. 새롭고 풍성하고 깊고 광범한 은혜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대화를 하던 중에 누가 왔습니까?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입니다. 여기서 관리는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을 보면 “회당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회당장은 회당을 지을 때 공헌한 사람으로서 회당건물의 건축과 유지를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의 하는 일은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고 예배순서를 위해 담당자를 지명하여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하나의 회당에 한 명의 회당장이 있었지만, 일부는 여러 명의 회당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지도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갈급했습니다.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힘들 때가 자신의 자녀가 죽었을 때입니다. 자녀의 죽음은 뇌와 마음에 가장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절했습니다. 회당장의 마음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병행본문에 의하면 회당장의 딸은 12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간절했습니다. 회당장은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딸을 살려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과 체면 등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셔서 딸의 몸에 손만 얹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딸이 살아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있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죄로부터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으로부터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간절함을 알았습니다. 회당장의 믿음은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간절함에 응했습니다. 19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시에 시대적인 생각을 잠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시체를 만진다는 것은 가장 더러운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시체에 가까이 가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가던 중에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건이었습니다. 20절을 보시면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기 위해 가던 중 부정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부정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이 왜 부정하다는 것입니까? 구약 율법에 따르면 월경하고 있는 사람을 만지는 것은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것에 근거하여 출혈하고 있는 여인은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월경 이외 피를 흘리는 경우 정결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이 여인도 회당장처럼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자 한 것입니다. 긴 세월 동안 출혈로 고생했기 때문에 여인은 회당장처럼 간절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혈루증 여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질병으로 고생했지만, 이제는 고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고질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잘 표현한 것이 21절입니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고쳐질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간절함은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는 구원입니다. 이것을 통해 여인은 예수님의 진정한 구원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면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정한 자와 접촉을 하면 정상적인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왜 옷자락을 만졌는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에세 손을 댄 사람이 누구인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더 의미 있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부정한 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이제는 부정한 자로 생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제는 죄인으로 생활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요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는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딸아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루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여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여인의 절박한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이 당신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자 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고 하시면서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치유함도 받을 뿐만 아니라 구원도 받았습니다. 여인의 믿음이 없었더라면 혈루증도 치유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으로 받는 도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사건이 마무리된 후 예수님께서는 빠르게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집에 도착하셨을 때 회당장의 집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2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입니다. 피리 부는 사람들은 장례식에서 슬픈 노래를 연주하는 자입니다. 떠드는 무리는 죽은 자를 위해 애곡하며 울어주는 자입니다. 당시에 가난한 자라도 이런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회당장은 부자이기에 악사와 애곡하는 자들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중동에서는 이런 문화가 원주민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회당장의 말처럼 그의 외동딸은 사망했던 것입니다. 회당장이 없는 가운데 장례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더운 기후로 인해 장례를 빨리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시체가 빠르게 부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24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님께서 물러가라고 하니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물러가라고 하니 황당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비웃었던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죽은 사람도 구원할 힘을 가지진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의 권세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증명하셨습니다. 사람의 죽음도 우리가 볼 때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잔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 영원한 사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즉 심판의 때에는 죽은 자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난 후 최후의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기다리며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몰랐기 때문에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웃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웃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만 비웃은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비웃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늦게 왔다고 생각하며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을 슬퍼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 보내셨습니다. 그런 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25절을 보시면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회당장의 딸이 숨을 쉬며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으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절망적이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사후에 일어날 부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사용해 “몸의 부활을 믿사오며”을 고백합니다. 바로 이것을 회당장의 딸에서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부활시킬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주관하실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믿었던 회당장은 그의 믿음대로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믿음으로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그리고 직접 체험으로 알았습니다. 이 사건 온누리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6절을 보시면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입니다. 이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자입니다.

 

오늘 두 사건을 통해 우리는 마태가 이렇게 기록한 의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혈루증은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의 딸은 목숨이 문제였습니다. 서로 연결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이렇게 기록한 공통이 있습니다. 죽음과 부정함의 관계는 서로 성경에서 밀접합니다. 둘 다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 다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와 구원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를 믿어야 합니다. 은혜받을 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하나님께서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신가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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